# 57
절대의 경지에 이른 고수와 비교해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 무공. 그 무공은 이미 당가에서의 일로 입증된 바가 있었다.
독성이라 하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정파의 고수 중 하나다.
그런 그와 비등한 무력이라고 한다면 자운의 무공 역시 하늘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그런 그와 친분을 맺으려는 문파는 많았다. 자운 정도 되는 고수와 친분을 맺어서 득이 될 것이 있으면 있었지 실이 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당가와 걸왕의 존재였다.
당가의 독성이 황룡문에 참석할 의사를 밝혔고, 걸왕마저 참석할 의사를 표명한 상태에서 대부분의 문파들은 감히 거절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참석 의사를 밝혔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독성과 걸왕이 참석 의사를 밝힌 자리에서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위상이 무너지게 된다.
거기까지 생각한 여러 문파의 문주들은 서둘러 황룡문의 문주 취임식에 갈 채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속속들이 날아드는 답신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름 좀 있는 것들을 불러줘야 위신도 서고, 좋은게 좋은 거라니까.”
이 정도면 꽤나 성대하게 문주 취임식을 보일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서 황룡문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공식적으로 무림에 보여 부흥을 위한 날갯짓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운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를 해야지.”
천하제일문, 조금씩 그곳을 향해 날아오를 황룡이 태동하고 있었다.
* * *
허공을 수놓던 얼음 알갱이가 단번에 설혜의 검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검이 검갑 속으로 갈무리된다.
착.
눈보라가 대번에 검갑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허공중에 휘날리던 얼음 알갱이가 모두 사라졌다.
그녀가 주시하고 있는 전방에는 탈진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우천과 운산이 있었다. 둘 모두 검기지경에 오른 고수로서, 나이에 비해 굉장한 실력을 지녔다 할 수 있었지만 설혜에게는 새 발의 피.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었다.
자운이 셋의 비무를 바라보고 있다가 박수를 짝짝 쳤다.
“잘했다. 역시 대단해.”
자운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려는 것일까? 운산과 우천이 자운을 바라보았다.
“역시, 단 한번을 스치지도 못하다니, 정말로 대단하게 약하네.”
그럼 그렇지. 자운의 입에서 칭찬의 말이 흘러나올 리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한 번을 못 스치냐. 물론 설혜 실력이 월등히 우월한 면도 있지만, 결론은 너희가 약하기 때문이지.”
자운이 손뼉을 짝 쳤다.
“그리고 운산, 넌 조용한 곳 가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자운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는 황룡문의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러가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운산은 향해 말했다.
“안 따라오고 뭐하는 거냐?”
자운과 운산은 문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전에는 자운이 사용하던 방이지만, 이제는 운산이 사용하고 있었다.
문주의 집무실인 만큼 황룡문의 대소사에 관련된 문서들이 이리저리 놓여 있고, 다른 이들의 왕래가 많지 않아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나쁘지 않은 장소. 자운이 편하게 자리에 앉으며 운산을 향해 말했다.
“앉아.”
마치 자신의 방에 들어온 객에게 말하는 듯한 모습이다. 자주 봐온 모습인지라 운산은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사형, 하실 말씀이라는 건……?”
운산에 말에 자운이 탁자를 딱 때렸다.
“너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그리고는 손을 휙휙 흔들어 찻주전자를 당겨온다. 찻주전자 안에는 얼마간의 차가 남아 있었고, 자운이 내기를 불어넣어 그 안을 휘저었다.
단번에 강력한 열이 발생하며 차가 데워지고, 그가 찻잔에 차를 쪼르르 담아내었다.
첫잔은 자신의 앞에 놓고, 두 번째 잔은 운산의 앞에 놓는다.
“후르릅.”
운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감탄사를 토했다.
“캬아, 좋다.”
차를 맛있게 잘 마시는 자운에 비해 운산은 눈앞에 놓인 차를 계속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운이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말했다.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네 문제가 뭔지.”
여전히 말이 없는 운산. 자운은 그것이 너무도 문제를 잘 알아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 지금 굉장히 조급하지?”
자운의 말에 운산이 움찔 움직였다. 설혜와의 비무에서 조급해하는 운산의 검이 분명히 보였다.
막을 수 있는 검인데도 조급한 움직임 탓인지, 조급해하는 생각 탓인지 쉽게 막지 못했다.
“그래도 검기지경에 올라서 사제보다는 조금 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제가 검기지경에 올라 버리니 조급해지는 건 당연하지.”
자운이 자신의 찻잔을 비워내었다.
운산과 우천, 둘은 사형제지간으로 엮여 있다고는 하나,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가장 많이 보고 함께 수련한 사이이기도 하다.
경쟁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했다. 더군다나 운산은 우천의 사형이 아닌가.
사형으로서 사제를 이끌어주지는 못할망정 비등한 실력이 되어버렸다.
이전에는 둘 다 무공이 너무도 허약하여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무공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런 감정이 강하게 들었다.
자운이 손끝으로 가볍게 찻잔을 튕겼다.
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이 제법 큰 소리로 튕겨지고,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운산이 고개를 벌떡 들어 자운을 바라보았다.
“조급해 봐야 좋은 거 하나도 없다. 본래 무공의 경지가 한번에 상승하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야.”
그래서 그런 일을 달리 기연이라고 한다. 영약이나 영물, 천고의 무공만이 기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와 같은 깨달음, 그런 깨달음으로 단번에 무공이 상승하는 것 역시 기연의 한 갈래였다.
“무림인이 기연, 기연 찾으면서 지랄해 봐야 돌아오는 건 죽음뿐이야.”
무림인은 기연으로 이루어지고, 기연으로 고수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무림인은 노력으로 쌓고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존재다. 기연이 다가오기를 바라지 말고 그 시간에 조금 더 노력을 해라.”
자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에 벽을 만나면 단번에 허물 생각으로 돌진하지 마라. 아주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이 벽이니까.”
자운이 미련 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자운이 운산이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이런 건 체질에 안 맞아.”
자운이 멀어지며 이리저리 주먹을 휘둘렀다.
“어디 또 때려 부술 것들 없나?”
취임식 준비는 무리 없이 진행되었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취임식 당일이 되자 황룡문의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순수한 의도로 왔다기보다는 철혈난신이라는 자운과의 친분, 그리고 독성과 걸왕에 의해서 반 타의적으로 움직인 이들이었다. 그래도 그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자운이 원한 대로 규모 있는 취임식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취임식에 대외적으로 인사를 초청하는 문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있다면 소림 정도다. 그 외에는 군소 방파끼리 어울려 취임식을 하게 마련이다. 소림을 제외하고 이토록 많은 이들이 취임식을 축하해 주러 온 문파는 무림 역사를 통틀어서도 많지 않을 것이다.
운산은 취임식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으레 있는 취임식 행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단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무림명숙들의 축하 말이다.
독성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운산을 향해 내 손녀사위라는 말을 사용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으며, 또한 걸왕은 자운의 눈치를 보느라고 계속해서 눈을 힐끔거렸다.
그 외에도 구파의 많은 이들이 찾아왔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구파의 장문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소림의 방장까지 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니 자운이 그들을 주시하는 것은 당연. 그런 자운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취임식은 진행되었다.
취임식이 진행되는 와중에 자운이 걸왕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야, 기껏해야 장로들이 올 줄 알았는데 구파의 장문인이 전부 다 몰려온 건 도대체 무슨 일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다. 고개가 빳빳하기로 유명한 것이 구파인데, 그들의 장문인이 모두 황룡문 문주의 취임식에 왔다는 사실은 다른 무림인들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자운의 시선이 그들을 좌르륵 살폈다. 그들 중 몇이 자운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흠흠.”
자운이 속으로 피식 웃으며 걸왕의 답을 기다렸다.
‘제까짓 것들이 불편하면 어쩔 거야.’
곧이어 걸왕의 답이 들려왔다.
[흘흘. 말하려고 했는데 먼저 물어보시니…….]
걸왕이 뜸을 들였다. 자운이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고 바닥을 통 때렸다.
바닥을 타고 내려간 암경이 단번에 걸왕 아래에서 솟구쳤다.
“켁.”
갑작스럽게 걸왕이 신음을 흘리자 황룡문에 모인 많은 무림인들의 시선이 걸왕을 향했다. 걸왕이 쓰린 엉덩이를 문지르며 인상을 쓰고 있다가 그 시선들을 의식했다.
그가 괴걸왕답게 소리쳤다.
“흘흘. 뭘 꼬나들 보나!”
괴걸왕이 살벌한 시선을 내리깔자 그 시선을 마주친 무림인들이 시선을 돌렸고, 자운이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걸왕에게 전음을 보내었다.
[죽을래?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자운의 말에 걸왕이 속으로 인상을 썼다.
‘저건 악마가 분명하다, 악마가.’
하지만 또 뜸을 들이다가는 언제 바닥에서 암경이 날아올지 모른다.
[얼마 전 무당의 태허 진인이 쓰러졌습니다.]
자운이 걸왕의 눈에 보일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이번에도 적성이라는 놈들이 나섰다며?]
걸왕이 고개를 끄덕인다.
[놈들이 어디 있는 줄 알기만 하면 구파가 나서서 놈들을 잡아들일 텐데, 본거지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워낙 신출귀몰한 녀석들이라…….]
[그건 이백 년 전에도 그랬어. 덕분에 끝을 보지 못했지. 꼬리만 자르고 도망갔으니. 이번에도 놈들을 완전히 처리하지 못하면 다음에 또 튀어나올걸?]
그 말에 걸왕이 신음을 흘렸다. 적성이라는 단체가 얼마나 거대한지는 모른다. 그저 알고 있는 사실이라곤 역사에 기록된 사실일 뿐. 그마저도 적성의 모든 힘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