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제2장
“우리 애들 어때?”
운산과 우천이 물러가고 자운이 설혜에게 물었다.
설혜가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아.”
자운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누가 가르친 녀석들인데.”
설혜가 친절하게, 또 그녀답지 않게 입을 한 번 더 열어 자운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거 말고 재능이.”
자운이 뜨거운 찻물을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고는 오만상을 쓰며 구시렁거렸다.
“젠장. 누가 내 덕이라고 해주면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귀여우면 안 되냐?”
그 말에 설혜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지목하며 말했다.
“나 이백스물…….”
“으아악! 알았다, 알았어. 무슨 말을 못하겠네. 그래, 좋아. 어쨌든 애들, 나쁘지 않았잖아.”
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놈, 생각이 많아.”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런 놈들이 대게 신중하고 깊이 생각해서 움직이지. 단점은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거야. 물론 그게 장문으로서는 장점이라 시킨 거지만, 생각이 너무 많으면 무공을 펼치는 데는 불리해지지.”
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많은 이들은 안전함과 위험함을 냉정하게 생각하고 몇 초식 앞을 읽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로 인해 살아남아 무림에서 고수가 될 가능성도 높지만, 반대로 고수가 되기 전에 죽어버릴 가능성도 높았다.
너무 많은 생각이 움직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자운이 침음성을 흘리며 물었다.
“음. 그럼 작은 놈은?”우천을 물어보는 것이다.
“적당히. 하지만 본능이 삼 할 더 커.”
역시 자운과 같은 판단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우천은 적당히 생각도 하고 움직인다. 생각이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니었으나 굳이 말하자면 본능 쪽이 삼 할 더 컸다.
짐승, 그중에서도 늑대 과에 속하는 짐승과 같은 느낌이다.
“좀 저돌적이어서 오래 사는 녀석은 없어.”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자운이 피식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팡팡 때렸다.
“내가 있으니까.”
설혜가 중얼거렸다.
“역시 많이 컸어.”
“그러지 마라, 원래 키는 너보다 컸다.”
설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 말고 내공이.”
“젠장.”
얼마 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태원삼객을 통해 자운을 찾아 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황룡문의 문주인 운산을 찾아왔고, 그 자리에 자운이 함께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운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태원삼객이 그들을 자운과 운산에게 소개했다.
“이들은 저희가 정착하지 않고 떠돌 때 친분을 유지하던 이들입니다. 저희가 몸을 의탁하는 것을 보고 저들도 몸을 의탁할 문파를 찾는다기에 저희가 불러왔습니다.”
그들의 말에 자운이 턱을 가볍게 쓸며 태원삼객의 뒤에 있는 인물들을 찬찬히 살폈다.
정해진 곳 없이 떠돌던 이들이니만큼 실력은 낭인들과 비슷하거나 혹은 조금 위였다. 이류정도는 되지만 일류는 되지 못하는 수준이 대부분. 거기에 외모로 추측해 본 나이는 대부분 서른이 넘어간다. 많은 이는 쉰에 육박해 보이는 이도 있었다. 자운이 인상을 팍 썼다.
“이봐, 니들. 황룡문이 자선 문파인 줄 알아?”그 말에 당황한 것은 태원삼객이었다. 자운의 성격에 곱게 그들 모두를 받아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강한 말을 던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원삼객 첫째의 말에 자운이 손을 흔들었다.
“아, 넌 좀 조용히 해봐. 너넨 황룡문을 찾아올 이유라도 있었지, 너넨 뭐냐?”
그러자 그들 중 대표로 보이는 이가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순수한 이유로 황룡문에 몸을 의탁하고 싶어서 온 것이오! 그런데 당신은 누구길래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매도하는 것이오?”그 말에 자운이 피식 웃었다.
“순수하긴 개뿔. 일단 물어본 건 답해주지. 황룡문의 태상호법 천자운이라고 하는데, 혹시 들어봤어? 요즘 개새무적 천하제일고수로 이름 좀 날리고 있는데.”
자운이 싱글벙글 웃었다. 입꼬리가 한쪽으로 씨익 올라간 웃음, 명백한 비웃음이다.
하지만 자운의 말을 들은 이들은 그 비웃음에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운의 정체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들 중 몇이 크게 소리쳤다.
“황룡문의 태상호법!”
“철혈난신(鐵血亂神)!!”
자운이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별호는 또 언제 바뀌었대? 그것보다 기분 나쁘게 난신(亂神)이 뭐야, 난신이. 그러면 내가 꼭 이리저리 사건사고 치고 다니는 놈 같잖아.”
자운의 별호가 난신으로 바뀌게 된 것은 당가 사람들의 공이 컸다. 자운이 육적과 당가에서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당가의 절반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보고 그들이 자운을 난신(亂神)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물론 당가는 막대한 금력으로 무리 없이 복구되고 있으나, 자운을 난신으로 부르는 것은 바뀌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자운은 자신의 별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 툴툴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말해봐. 너희가 황룡문을 찾아온 그 순수한 마음이라는 거.”
자운이 그들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러자 그들 중 대표로 보이는 이, 가장 처음 자운에게 말했던 이가 조금은 작아진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태원삼객에게서 황룡문이 얼마나 좋은 문파인지 들었소. 본래 우리처럼 늦게 몸을 의탁하면 무공을 알려주기는커녕 일반 식객과 다를 것이 없이 대하게 마련이오. 한데 황룡문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 무공을 알려주고 상승의 무공 역시 지도해 준다고 하는데 어찌 의탁하지 않을 수 있겠소.”
자운이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명예고 나발이고 다 잊은 모습. 마치 나려타곤을 펼치는 것처럼 좌우로 굴러다니며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뭐? 으하하하하! 으하하하! 킬킬킬킬! 으하하하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뭐라고 했냐? 응?”
한참을 바닥을 구르며 웃음을 터뜨리던 자운이 바닥을 치며 일어났다. 정말로 크게 웃은 듯 그의 눈가가 붉었다.
“아, 웃겨서 눈물이 다 나네.”
손을 들어 눈가를 훔치는 자운. 그리고는 매서운 눈길로 태원삼객과 함께 찾아온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정말 그게 전부야?”
자운이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그들이 한 걸음 물러나며 자운을 바라본다.
“그, 그럼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겠소?”
자운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나는 혹시 이런 이유가 있을까 해서 물어봤다.”
곧 다시 자운의 입이 열린다.
“너희들, 나이 먹을 만큼 먹었잖아. 이제 이렇게 떠돌아다니면서 낭인이랑 비슷한 대우 받기는 싫고, 명색이 무인이고 나이도 좀 있는데 문파 하나 잡아서 못해도 무사부 역할이나 좀 하면서 놀고먹고 싶고, 근데 좀 큰 문파 찾아가려고 하니까 걔들이 너네를 안 봐주잖아. 그렇지?”
자운이 말을 하며 계속 그들에게 다가갔다. 자운이 다가오는 것과 반대로 그들은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서 지금 좀 커질 가능성이 보이는 문파 중에 대접 좀 해주겠다 싶은 문파 몇 개 찾아봤을 거야. 그렇지?”
자운의 이죽거리는 표정이 점점 더 맛깔을 더해간다. 재미가 더해가는 표정이다. 운산과 우천 역시 이제는 재미있다는 듯 그런 자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즐기고 계시나.’
운산의 생각은 이러했고, 우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 저렇게 이죽거리면 되는 거구나. 입꼬리를 이렇게 틀어 올리면 되나?’
우천은 점점 더 자운과 닮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자운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태원삼객의 이야기를 들은 거지. 상승 무공도 알려주고. 좋지, 안 그래?”
자운이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들 중 몇이 자운을 따라 고개를 주억댔다. 그것은 생각을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라 자운의 눈이 고개를 끄덕임에 따라서 위아래로 움직이자 함께 움직인 무의식전인 행동이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운이 손바닥을 짝 쳤다.
“거봐. 고개 끄덕이잖아. 너넨 정말로 황룡문이 좋아서 온 게 아니라 그냥 대접 잘 해주는 정착할 곳이 필요했던 거야.”
말을 마친 자운이 몸을 획 돌렸다.
자운이 고개를 돌리자 일전의 그가 다시 소리친다.
“그, 그렇지 않소! 그건 억지요!”
그의 말에 다시 자운이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자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가 싸늘한 얼굴로 황룡문의 벽 한쪽을 가리켰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황룡문이 정말로 좋아서 온 거란 말이지? 그럼 너희가 황룡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봐야겠네.”
자운의 손에서 강력한 흡입력이 발생하며 허공섭물이 펼쳐졌다.
그의 양손으로 벽에 가지런히 기대어져 있던 빗자루들이 딸려 들어왔다.
그 수는 정확하게 지금 황룡문을 찾아온 이들의 수와 일치하는 서른. 자운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서른 개의 빗자루가 모두 그들의 앞으로 날아간다.
“그거 잡아.”
자운의 말대로 그들이 자신에게로 날아온 빗자루를 하나씩 쥐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무공이 있기 때문에 빗자루를 놓치거나 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이걸로 무엇을 하라는 말이오?”
무인의 손에 검이 아닌 빗자루가 들렸다. 한 무인이 발끈해서 자운을 향해 물었다.
“지금부터 구역을 나눠주지. 그곳을 청소해 봐. 얼마나 깨끗하게 청소하는지 보고 너희가 황룡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평가하겠어.”
말을 마친 자운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각자 청소할 곳을 배정해 주었다.
모두 청소할 곳을 배정해 준 자운이 고개를 돌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정확히 한 시진 후에 돌아올 거야. 그때가지 잘들 해봐.”
그리고는 운산과 우천, 태원삼객에게 말했다.
“자, 그럼 우리는 가자고.”
자운이 사라지자 한 사내가 손에 들린 빗자루를 바닥에 내 팽개쳤다.
“젠장! 이게 도대체 뭔지!”
응안검(鷹眼劍) 홍수안. 무한에서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이다. 실력은 이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하며 일류에 발을 걸쳤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어느 문파를 가더라도 어느 정도의 대우는 받을 것이다. 하지만 태원삼객의 전례를 듣고는 황룡문에 오면 조금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고작 비질이나 시키다니. 일류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비질을 하려니 화가 나기로 했다.
그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발로 비벼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