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우천은 터져 나간 허리 옷깃을 한번 살핀 후 신중하게 호흡을 골랐다.
다시 한 번 접근했다가는 이번에는 옷깃이 아니라 정말 허리가 터져 나갈지도 모른다. 방금 전의 충돌로 그것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신중하게 공략해야 할 것이다.
우천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근육을 긴장시켰다.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팽팽한 긴장감이 척추를 타고 들어와 뇌리로 스며든다
‘빈틈을 찾을 수가 없어.’
검을 비스듬히 들고 있는 설혜를 바라본 우천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지금 우천의 실력으로는 절대로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빈틈을 찾을 수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우천이 손을 가볍게 털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정면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겠습니다.”
설혜가 무감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쏜살같이 우천이 튀어나갔다. 검을 앞으로 곧추세워 달려가는 찌르기. 검이 그의 손에서 회전하고, 설혜가 검을 뻗었다.
우천의 검과 설혜의 검이 충돌한다. 얼음 알갱이가 단번에 우천의 검을 타고 들어왔다.
우천이 내력을 움직여 다시 얼음 알갱이를 털어내고는 설혜의 겸을 연달아 때렸다.
따당―
검과 검이 충돌하는 소리가 북풍 소리에 섞여 들린다. 자운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다.
“눈이 살아 있네.”
자운이 우천의 눈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과격하게 달려드는 듯하지만 우천은 지금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검을 맞대는 열기와 더불어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냉철함이 맞물린 눈빛이다.
나쁘지 않은 눈빛이다. 그리고 우천이 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도 알았다.
우천은 의도적으로 움직임 하나하나마다 슬쩍슬쩍 빈틈을 만들고 있었다.
이를테면, 일곱 걸음째에서 여덟 걸음째로 보법이 이어지며 왼쪽 허벅지를 전방에 노출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일부러 노출시키는 듯한 허점.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습관적으로 허점을 만들어 마치 설혜에게 찌르고 들어오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 자운이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실력 차이를 간과한 선택이네. 살을 잃고 뼈를 취한다는 생각인 거 같은데, 잘못하면 살을 잃으려다가 목숨 줄이 날아갈 수도 있지.”
자운이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운산은 자운의 옆에 서서 우천과 설혜의 비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비무를 할 때만 해도 밀리고는 있었지만 크게 밀리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천과 설혜의 비무를 보니 알 수 있다.
크게 밀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설혜가 크게 밀리지 않도록 봐준 것이라는 사실을, 운산의 눈이 둘의 비무를 담았다.
자운이 그런 운산의 등을 퍽 때렸다.
“잘 봐둬, 어차피 너흰 이백 년이 지나도 나나 쟤는 이기지 못하겠지만, 잘 봐두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거다.”
운산이 물었다.
“어느 정도로요?”자운이 가볍게 턱을 쓸어내리며 히죽 웃는다.
“백 년쯤 후에는 나나 쟤 칼을 한 백번은 막을 수 있을 정도?”
운산과 자운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우천과 설혜의 비무는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고의적으로 허점을 노출시킨 탓에 우천은 계속해서 설혜에게 밀렸다.
하지만 우천이 노린 대로 설혜는 계속해서 우천의 빈틈을 따라 점점 깊게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참으면 우천이 역공할 기회가 생긴다.
우천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한순간, 섬전처럼 공간을 제쳐 든 설혜의 검이 우천이 원하는 수준까지 찔러들어 왔다.
‘이때다.’
부욱―
우천의 허벅다리를 감싸고 있던 옷이 찢겨 나갔다. 그와 함께 그의 허벅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움직임에 불편함이 올 정도였다.
쓰라린 감각이 엄습하고, 우천이 고통을 참아내며 검을 움직였다.
파고든 설혜의 검을 움직이지 못하게 황룡문의 절기를 이용하여 움켜쥔다.
우천의 검이 연검처럼 꿈틀거리고, 우천의 입에서 초식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교룡도(蛟龍道)!”
교룡이 움직이는 길. 검이 연검처럼, 천주(天柱)를 휘감고 하늘로 솟구치는 용처럼 꿈틀거리며, 설혜의 검을 움켜쥐고 파고들었다.
단번에 우천의 검이 설혜의 가슴팍으로 치닫는다.
연이어 펼펴지는 직도황룡(直道黃龍).
입곱 개의 변화가 그대로 갈라지며 설혜의 가슴팍을 노렸다.
어지간한 고수라면 그 자리에서 공격을 허용하고 일곱 개의 구멍이 뚫린 채로 절명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자운도 깊이를 다 읽지 못할 정도의 고수인 설혜는 그런 어지간한 고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설혜의 검이 변화를 일으키고, 차가운 북풍이 그녀의 검에서 줄기줄기 뿜어졌다.
쩌저저정―
우천의 검에 묶여 있는 그녀의 검이 강력한 힘을 발했다.
우우우웅―
대번의 기운이 집중되고, 주변의 얼음이 그녀의 검을 찬찬히 덮어갔다.
선명하게 빙기(氷氣)를 띠는 검.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검기였다.
검기는 대번에 우천의 검을 풀어버리고, 일곱 개의 변화를 쳐 내었다.
따당, 쩌저저정―
연속적인 공격을 이기지 못한 우천의 검에 실금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실금은 공격을 받을수록 그 깊이와 정도를 더해갔다. 곧 검이 깨어질 것이다.
“크윽.”
우천이 신음을 흘리며 퇴법을 밟았다.
동시에 그녀의 검이 위로 들어 올려진다.
베기.
검기가 줄기줄기 흐르는 검이 솟구친다. 완전한 검이라도 검기를 빗겨낼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데, 금이 가 다 깨어지기 직전의 검으로 어찌 검기를 받아낸단 말인가.
성공적으로 사량발천근의 수법을 펼친다 하더라도 그 힘을 받아내지 못한 검이 깨지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우천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통제되지 않은 기운은 내부로 침입해 내상을 만들 것이고, 검이 깨어지며 밖으로 터져 나온 힘은 외상을 입힐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없었다. 내력을 모두 검에 집중시켜 검이 사량발천근의 수법이 끝날 때가지 견디게 만들 수밖에 없다.
“으아아아아압!”
우천이 소리를 쳤다. 그것은 일종의 기합. 기합성과 동시에 내력이 검으로 집중되기 시작한다.
흐르는 검기가 우천의 검에 닿았다. 우천이 세심하게 두 개의 기를 맞대고 조율했다. 촛불은 옮겨 붙이는 와중에 작은 바람만 불어도 꺼지고나 어디로 옮겨 붙을지 모른다.
사량발천근 역시 마찬가지. 온몸의 육본 하나하나의 의지와 신경을 모두 기울여 내기를 조절하고, 설혜의 검기가 우천의 검을 타고 흘렀다.
“크으으으으윽.”
우천이 심음을 흘렸다.
멀쩡한 검으로도 검기는 막기 힘든데, 역시 금이 간 검으로 막는 것은 무리였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지금 포기하면 폐인이 될 수도 있다.
당장에 검으로 넘어온 힘이 너무 많다. 지금 포기해 버리면 갈 길을 잃은 기운이 모두 우천의 몸속으로 들어와 폭주할 것이다.
우천이 입에서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내기를 더울 세심하게 조절하고 압축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운을 압축하고 압축하여 설혜의 기운을 견뎌낼 정도로 만드는 것이다.
주변의 넓게 감싸고 흐르던 우천의 기운이 우천의 의지를 받았다.
그리고는 검으로 더욱 가깝게 모여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검, 기운이 압축되고 압축될수록 그 형상은 검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 기운이 선명하게 검의 기운을 띠게 되었을 때, 운산이 놀라 크게 소리쳤다.
“검기!”
운산이 그랬던 것처럼 우천 역시 검기의 경지에 접어든 것이다. 물론 아직 그 기운의 통제가 완전하지 못한 것인지 검기가 흐릿해졌다 원래대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것은 꾸준히 노력한다면 완벽해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천이 검기의 경지에 한 발을 올렸다는 것이다.
자운이 우천을 보며 운산을 향해 낄낄거렸다.
“너도 이제 좀 긴장해야겠다. 곧 좁혀지겠어.”
운산은 겉으로는 씨익 웃어 보였으나 속으로까지 좋아할 수는 없었다. 분명 사형제의 경지가 심후해진 것은 축하해 주어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격차가 자신을 좁혀오니 무인으로서 조바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운산은 우천의 사형이기도 하지 않는가. 항상 우천의 앞에서 우천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인데, 어느새 우천이 성큼 쫒아온 것이다.
그가 주먹을 꾸욱 움켜쥐었다.
자운이 그런 운산을 보며 속으로 피식거렸다.
‘그래, 원래 그러면서 크는거지.’
다시 고개를 돌려 확인한 비무. 이제 둘의 비무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검기가 솟구치자 설혜의 검을 막아내는 우천의 움직임에 한층 힘이 시렸다.
또한 위에서 내려오는 설혜의 힘을 견뎌내는 것까지 수월해졌다. 아직까지는 설혜의 힘이 훨씬 위였으나 위의 두 가지만 해도 충분한 소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우천이 펼친 기교는 사량발천근이 아니던가. 적은 힘으로도 충분히 큰 힘을 이겨낼 수 있다.
“으아아아아!”
우천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기운을 움직였다. 검기에 실린 설혜의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검에 담긴 진력(眞力)까지 점차 약해졌다.
그리고 그 힘이 약해진 한순간, 우천이 설혜의 검을 흘려버리는 동시에 벼락처럼 찔러 넣었다.
‘이겼나?’
한순간 우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언가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파삿―
자신이 설혜의 옷깃을 베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아득해지며 가슴팍에서 충격이 타고 올라왔다.
우천이 고개를 움직여 자신의 가슴팍을 확인했다.
‘어?’
목 한 가득 피가 차올라 말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우천의 가슴팍에는 한껏 벌려진 설혜의 손바닥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슴을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한기. 빙공 특유의 기운이 그의 가슴팍을 파고든 것이다.
또한 검기가 솟구치던 우천의 검은 어느새 그의 손을 벗어나 허공에서 회정했다.
핑그르르르―
검이 바닥에 박혀든다.
푸욱―
바닥의 절반 정도의 검신이 박혀든 검에는 검기가 사라진지 오래. 우천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쿨럭!”
우천이 날아가는 와중에 입으로 피를 뿌렸다. 자운이 그런 우천을 받아 들고 손가락 끝으로 혈도 몇 군데를 눌렀다.
우천의 몸속에서 날뛰던 빙공의 기운이 단번에 진정되며 밖으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우천은 이미 혼절해 버린 지 오래였다.
자운이 우천을 운산에게로 넘겨주며 말했다.
“살짝 내상을 입은 거 같으니까 총관더러 내상에 좋은 약초 몇 개 챙겨 먹이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