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설…소저가 북해빙궁의 전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훌륭하게도 정답이야.”
피식피식 웃어 보이는 자운. 우천이 그를 향해 다음 질문을 던진다.
“대사형이 북해빙궁의 전인과 어떻게 아는 사이인데요?”
그 말에 자운이 눈을 감았다.
“음,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자운이 생각에 빠지자 설혜가 빤히 자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론 자운은 눈을 감고 있어 그런 설혜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잠시간 생각하던 자운이 결론을 내렸다.
“그냥 좀 아는 동생이야.”
설혜가 고개를 홱 돌린다. 자운은 모르고 있지만 보고 있던 운산과 우천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아.’
하지만 얼마 전 자운에게 ‘키워서 잡아먹어’ 하는 소리까지 들은 운산은 그에게 말해주지 싫었다. 우천 역시 방금 전에 맞은 턱이 너무나 아팠다.
‘그냥 그렇게 사세요.’
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자운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설혜에게 전음을 보낸다.
[혹시 말이지, 할 일 없으면 이놈들이랑 가끔 비무 해줄 수 있어?]
빙공을 사용하는 인물과 비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빙공의 특성상 다른 무공과는 차별적이고 조금 변칙적인 부분이 많아 비무, 혹은 대련을 통해 꽤 많은 임기응변을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자운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손바닥을 짝 쳤다.
짝―
“자자,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는데, 설 소저가 밥값도 할 겸 가끔 니네들이랑 비무를 해줄 거다. 그러니 많이 배우도록 하라고.”
자운이 말을 하며 설혜를 스윽 살폈다. 기운을 흘려 자극도 해보고 속을 읽어보려 했으나 좀처럼 읽히지 않는다. 자운이 거의 읽을 수 없다는 말은 자운과 비슷하거나 혹은 아주 조금 아래라는 의미.
지금 자운의 실력을 생각해 보았을 때 운산과 우천에게는 태산과 같은 존재였다. 아마도 비무를 통해서 얻는 것이 꽤 많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든든한 존재가 당분간 황룡문에 있으니 적성 등에 대한 걱정 역시 잠시 접을 수 있으리라.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좋군.’
자운이 설혜를 바라보며 운산과 우천을 향해 말했다.
“그럼 가볍게 지금 한판 해볼까?”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설혜가 단전을 개방했다.
그녀의 내공은 빙궁 특유의 심법과 얼음 속에 있었다는 상황이 합쳐져서 이백 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늘었다. 그 총량은 자운에 비견될 정도였다.
거대한 내력이 뿜어지고, 바람이 얼기 시작했다.
허공중으로 얼음 알갱이가 날린다.
자운이 그 모습을 보고 이채를 띠었다.
‘대단하네.’
저 정도의 내력이라면 이미 수치로 나타내는 것은 무리다.
설혜의 앞에는 운산이 서있었고, 자운의 옆에서 둘의 비무를 바라보고 있던 우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자운이 우천에게 묻는다.
“대단하지?”우천은 대답 대신 끄덕였다. 기세의 방출만으로 주변에 북풍을 불러오는 위대한 빙궁의 후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에 근육이 저릿하다.
자운이 설혜에게 소리쳤다.
“살살 해, 살살. 이래 봬도 그 녀서, 황룡문의 문주라고.”
자운의 말에 설혜가 운산을 바라보았다. 자운이 태상호법이 되고 자운의 사제가 장문이 되었다는 말은 이미 들었다. 그 장문이 저 사람인 모양이다.
설혜가 과거 황룡문의 장문을 떠올렸다.
‘모자라.’
확실히 그에 비교하면 모자라다. 설혜가 검을 비스듬하게 눕혔다. 그녀의 검 위로 얼음 알갱이가 서리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운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살펴봐도 빈틈이 없다.
다가가면 그 순간 북풍에 휩싸여 한 덩이의 얼음이 되어버릴 것 만 같은 한기가 감각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먼저 가겠습니다.”
운산의 말에 설혜가 고개를 끄덕이고, 운산이 힘겹게 걸음을 움직였다. 정면으로 가는 대신 북풍을 비스듬하게 타고 파고드는 것을 선택했다.
“좋은 선택이긴 한데, 안 통할걸.”
자운이 운산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어지간한 수준으로 빙공을 익힌 이에게는 분명 통할 것이다. 기운의 결을 타고 들어가는 방법. 빙공을 익힌 이들을 상대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 비슷할 때의 이야기지.’
운산의 실력은 설혜에 비해서 너무나 부족하다. 보름달과 반딧불이라고 하면 비교가 적당할까?
대충 그쯤 된다.
그 순간, 운산이 바닥을 힘차게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타닷―
“하아압!”
그리고는 힘차게 질주하는 운산. 운산이 검을 작게 휘둘렀다. 그리고는 앞을 막아서는 북풍을 치워내었다.
하지만 바람은 치운다고 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검으로 벤다고 베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순간 틈이 생기기는 했으나 그 틈은 현재 운산의 실력으로 파고들기에는 너무도 작았다. 우모침(牛毛針)보다 작은 틈이었고, 찰나라고 부르기도 힘든 순간 생겼다 사라졌으니 말이다
휘이익―
북풍의 흐름을 타고 검이 날아들었다. 설혜의 검이다.
한기가 풀풀 풍겨지는 검이 운산의 검을 때렸다.
꽝―
검이 한순간 부러질 듯 크게 휘청거리며 운산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운산이 빠르게 퇴법을 밟으며 힘을 줄이려 했으나 그리 쉽게 줄여지지 않는다.
불어오는 얼음 알갱이에 발이 꼬인다.
“크윽.”
운산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다. 설혜가 그런 운산을 보며 말했다.
“못 막았네.”
아무 감정 없이 한마디 툭 뱉은 것이나, 그 모습이 오만하고 깔보는 듯 보였다. 운산으로서는 비무인 것을 알면서도 참기 어려웠다.
운산이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눈이야.”
설혜가 운산의 눈을 보고 말했다. 운산이 검을 움켜쥐었다.
그가 천천히 보법을 밟기 시작한다. 지룡천보행의 보법이다.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스스로 고난을 겪으며 천 걸음을 걸어간다. 그리고 그 걸음 동안 여의주를 갈고닦는다.
바람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북풍이 조금이나마 운산의 발 아래로 빨려들어 가는 것이다.
운산의 내력을 움직여 주변의 바람을 장악했다.
북풍이 그의 발 아래로 모여들고, 조금씩 원의 형태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설혜는 언제든지 주변의 주도권을 뺏어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산이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자운이 살살 하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혜가 제 힘을 내었다가는 운산은 순식간에 얼음 동상이 되어버릴 것이다.
‘올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운산이 튀어나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이 그의 아래로 빨려들어 간다.
설혜가 통제하는 바람이 점점 적어지고, 두텁게 두르고 있던 북풍의 벽이 점점 얇아졌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서 운산이 질주한다.
운산의 검이 바람을 갈라 틈을 만들고, 몸을 비집어 넣었다.
휘리릭―
그의 검이 회전하며 바람을 빗겨내었다.
동시에 뿌리는 직도황룡(直道黃龍).
직도황룡이 일곱 개의 변화를 불렀다.
여섯 개의 변화가 바람을 빗겨내고 갈랐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변화가 그대로 바람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설혜의 몸이 빙글 회전했다.
회전과 동시에 그 힘을 검에 집중시켜 바람을 열고 들어온 운산의 검을 때렸다.
따앙―
검극과 검극이 충돌하고, 운산의 몸이 뒤집어졌다. 바닥을 때린 설혜의 몸이 그를 뒤쫓았다.
북풍은 다시 설혜의 통제에 들어오고, 그녀의 앞으로 얼음 알갱이가 뭉쳐졌다.
마치 소의 뿔[牛角]과 같이 집중되는 얼음 알갱이가 그대로 공간을 부수며 운산에게로 날아들었다.
“크윽.”
운산이 바닥으로 내려서며 허벅지 가득 힘을 주었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그가 검면을 내밀었다.
쩌엉―
검과 충돌하는 얼음의 뿔. 한순간 공기가 밀려나고, 운산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동시에 반 토막 난 검이 바닥에 떨어져 아무렇게나 굴렀다.
터엉―
검이 반토막 났음에도 불구하고 얼음의 뿔은 멀쩡한 모습으로 한기를 뿜으며 운산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가 운산의 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끝났네.”
허공중으로 얼음의 불이 알갱이가 되어 사라진다. 완벽한 패배였다.
비무가 끝나자 자운이 손뼉을 짝짝쳤다.
“그 정도면 잘했네.”
하지만 운산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다.
“네 실력을 다 보이지 못한 거 같지?”
자운의 말에 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자운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근데 그게 네 실력이야. 비무든 실전이든 시작하고 바로 최선의 실력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지. 천천히 실력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넌 언젠가 제 실력이 나오기 전에 실전에서 목숨을 잃을 거다.”
그렇게 말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 우천, 들어가서 한번 뛰고 와라.”
자운의 말에 우천이 빠르게 뛰어가 설혜의 앞에 섰다. 운산을 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설혜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다.
처음과 그대로 자운이 둘을 바라보며 운산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시작하자마자 최고의 실력을 내도록 해봐. 아마 죽어라 노력해야 할 거다.”
자운의 말에 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어느새 둘의 대련은 시작되고 있었다.
검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기교를 부렸다. 하지만 북풍은 사량발천근과 이화접목만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음 알갱이를 간신히 막아내고는 있지만, 우천의 검은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검 주변으로 얼음이 달라붙어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후우.”
우천이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바람이 폐부 깊은 곳까지 들어오고, 숨을 따라서 내공이 꿈틀거린다.
내고이 검으로 주입되자 우천의 검에 달라붙은 얼음 알갱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다시 움직일 수 있다.’
그 순간, 설혜가 단번에 검을 찔러 넣었다.
피잉―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쏘아지듯, 설혜의 검이 직선으로 쏘아졌다.
정직한 찌르기, 하지만 막아내기 쉽지 않다.
그 속도가 우천의 인지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우천은 막는 대신 몸을 회전시켰다.
빙글 몸이 회전하며 설혜의 검이 우천의 허리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앗―
옷깃이 검에 터져나가며 우천이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그와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설혜의 검격에서 빠져나온다.
우천이 빠져나가자 설혜가 제자리에서 멈춰 서 우천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