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제1장
자운이 눈을 빤히 뜨고 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인 역시 자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얼굴을 붉힐 법도 하건만 둘은 얼굴을 서로 마주 보기만 했다.
자운이 천천히 입술을 곱씹었다.
‘닮았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이백 년 전의 사람이 아닌가?
이백 년 전의 사람이 지금까지 젊음을 유지하며 살아 있을 리가 없다. 그 스스로가 조금은 특이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로도 일어나기 힘든 극히 드문 일이다.
고금을 통틀어 유일한 존재가 자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하나 더 있다?
자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자운이 눈에 힘을 꽉 주고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뭐냐?”
자운의 말에 그녀가 자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의문을 표하는 것인가?
표정을 쉬이 읽을 수 없는 것까지 어쩜 이리 똑같이 닮았는지,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믿을 법도 하겠다.
하지만 그녀 본인이라는 것은 믿을 수 없다.자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너 뭐냐고.”
자운의 물음에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몰라.”
무슨 의미일까?
모르냐고 물었다. 그렇게 묻는다면, 모른다. 하지만 그녀와 똑닮은 얼굴을 가진 여자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사기를 칠 거면 제대로 치지? 이백 년 전의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걸 믿으라고?”
그 말에 여인이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를 보였다. 눈 아래가 움찔 떨린 것이다.
“이백 년 전?”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주장대로라면 넌 이백 년 전의 사람이라는 말이지.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고.”
자운이 단전을 움직여 기운을 뿌렸다. 그의 몽에서 뿌려진 기운이 철저하게 기막을 치고, 새어 나가는 소리를 다시 한번 차단했다.
이 방에 있는 것은 자운과 이 여인뿐이나, 언제 소리가 새어 나갈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운의 그런 기운을 느낀 것인가? 그녀가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내공.”
자운이 의문을 표했다.
“……?”
그러자 그녀가 자운의 눈을 바라보며 고저가 없는 음색으로 마저 말했다.
“많이 늘었네.”
이번에 움찔한 것은 자운이었다. 자운의 내공이 부족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과거에는 꽤 많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혀 없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여인이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하지만 자운은 당황하지 않고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는 씨익 웃어 보인다.
“재미있는 소리를 화네. 난 원래 내공을 충만했지. 이 넘쳐나는 내공이 줄어들지를 않아서 세상은 나를 개새무적 고수라고 부른다고.”
그런 자운의 말에도 그녀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다. 마치 정말로 자운을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아홉 개의 손가락을 펴 보인다.
“나 아홉 살.”
그리고는 다시 자운을 지목했다.
“오라버니 열한 살.”
그 말에 자운이 움찔한다. 열한 살 때의 일이 기억난 것이다. 그녀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비무. 오라버니, 나한테 맞고 지렸…….”
쾅-!
자운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려쳐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이내 당황한 표정으로 그 손을 흔들었다.
“으아악! 그만! 그만!”
그가 앉은 자리에서 몸을 축 늘어뜨렸다.
힘이 없는 목소리. 방금 전 그녀가 말하려 했던 일은 그녀와 자운이 아니면 절대로 알지 못하는 일이었고, 자운이 절대로 알려지지 않길 원하는 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자운이 허탈한 음색으로 말했다.
“진짜구나.”
자운의 말에 그녀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자운은 실감이 나지 않는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진짜 설혜구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자운이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지. 폐관에서 나와 보니 무려 이백 년이 흘렀더라고. 이게 말이 돼? 이 년도 아니고 이십 년도 아니고 이백 년이다.”
자운의 입에서 허탈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설혜의 얼굴에는 달리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자운이 설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 예전에도 저렇게 표정이 몇 개 없었지.”
북해궁주의 정통 빙공을 익힌 대가로 감정이 조금 줄어든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이건 정도가 과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는다는 것과 무공을 대성하면 다시 감정이 천천히 돌아온다는 점이다.
자운이 설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지금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자운의 말에 설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 전부터 이백 년 전, 이백년 후라는 등 이백 년이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설혜의 입장에서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북해빙궁, 없어.”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룡문, 작아졌어.”
다시 한 번 끄덕였다. 설혜가 궁금해 하는 것은 아마도 이것들이리라. 그녀가 나고 자란 북해빙궁이 사라졌다. 그리고 황룡문의 성세가 예전에 비해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졌다.
이 일이 어떤 연유 때문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을 빙빙 돌리고 돌려 안정감을 주도록 이야기한다. 사실 이것이 정설이나 자운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인지해야 할 것은 빨리 인지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잠시 생각에 빠진 자운은 곧 설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주기로 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들어.”
자운이 말을 꺼내며 입을 피식거렸다.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설명하고 적응하고 지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그 역시 쉬이 안 되는 것은 설혜에게 한 번에 이해하고 적응하라고 하면 무리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이렇든 저렇든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북해빙궁과 황룡문은 망했어.”
“망해?”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과 같은 성세를 생각한다면 그건 절대로 불가능이야.
거기다 황룡문은 어떻게든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북해빙궁은 이백 년 전 적성과의 결전 후 완전히 망했어.“
자운의 말에 설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지금은 너와 내가 이십대 중후반이던 때보다 이백년 정도 후의 시대지.”
자운이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말했다. 이백 년. 사람이 살아가기에 적은 시간은 아니다. 백 살이 넘게 사는 무림인이 몇 있으나, 이백 년은 말도 되지 않는 시간이다.
“이백 년…….”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설혜의 중얼거림을 들은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 그리고…….”
자운 역시 당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나마 몇 가지 알게 된 것을 설혜에게 설명해 주었고, 설혜는 무감각한 표정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자운의 말을 경청했다.
자운의 말이 끝났을 때는 자리 앞에 놓인 차가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린 후였다.
말을 마친 자운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어때? 이해가 좀 돼?”
자운의 말에 설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들었다.
“이백스물아홉 살.”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이백스물아홉 살.”
“그렇다니까.”
“이백스물아…….”
“그만해! 너도 이백스물일곱 살이야, 이 할망구야.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왜 이래?”
자운이 버럭 소리쳤다.
운산과 우천이 자운을 향해 물었다.
“이 소저는 누구십니까?”
자운이 피식피식 웃었다.
“소저라고 하지 마. 젊어 보여도 나보다 고작 두 살 어리니까.”
그 말에 설혜가 자운을 보고 중얼거렸다.
“바지에 지…….”
자운이 손을 급히 흔들었다.
“아, 물론 소저라곤 불러도 아무 문제없는 거 같아. 계속 소저라고 불러.”
운산과 우천이 설혜와 자운을 번갈아 보며 바라보았다.
‘대사형을 이겼어?’
‘대사형을 제압했어?’
말은 달랐으나 의미는 같았다. 둘은 모두 설혜를 향해 눈을 크게 떴다. 말 한마디로 자운을 제압한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구도 제압한 적이 없는 자운을 말이다.
“이름은 설혜, 소저라고 불러도 되니까 설 소저라고 부르면 되겠다. 당분간 황룡문 식객으로 지낼 거고, 북해빙궁의 유일한 전인이다.”
말을 하며 자운이 설혜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백 년 전의 신분을 지금 사용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신분을 하나 만들어야겠어. 넌 그냥 북해에서 빙궁의 진신절기를 발견해 익힌 전인쯤으로 해두고,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리니까… 대충 하고, 이름은 그대로 써도 될 거 같다.]
자운의 전음에 설혜가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미미한 반응. 평소 북해 빙궁의 사절이 오면 설혜와 친하게 놀던 자운이기에 그나마 가능한 것이지 타인이라면 감히 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할 것 이다.
‘그래, 신분은 그거면 되겠고…….“
[북해빙궁, 다시 세울 거지?]
자신에게 황룡문 부흥이라는 목표가 있는 것과 같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설혜의 전음이 자운에게로 들려왔다.
[방법, 모르겠어.]
문파를 살릴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소리. 사실 자운으로서도 황룡문을 다시 부흥시키는 건 막막하기 그지없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고, 노력을 해야 할 뿐이다. 계획이 있지만 쉬운 계획은 아니다.
자운이 다시 전음을 보내었다.
[천천히 계획을 잡고 생각해 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운이 고개를 돌려 운산과 우천을 바라보았다.
입을 떡 벌리고 설혜를 바라보는 운산과 우천. 이백 년 전 망해 버린 북해빙궁의 전인이라는 말이 생각보다 충격이었나 보다.
자운이 손끝으로 그들의 턱을 가볍게 튕겼다.
따악! 따악!
“악!”
“으악!”
벌렁 뒤로 넘어지는 우천과 비틀거리며 옆의 벽을 잡는 우천, 그들이 얼얼한 턱을 쓸어내리며 자운을 바라보았다.
자운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입에 벌레 들어가겠다. 닫아라.”
운산과 우천이 계속해서 얼얼한 턱을 만졌다. 얼마나 세게 때린 건지 턱에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자고 일어나서 얼굴에 이불 자국이 남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쓰라림. 거기에 머리까지 울린다.
운산이 쓰라림을 참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