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운산이 다시 물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한참 말이 없다. 원래 말이 느린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운산과 말을 하기 싫다는 의사 표현일까?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무표정한 얼굴에 자리하고 있는 붉은 입술이 열리고, 이전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이전보다는 조금 더 선명한 소리.
"북쪽."
이번에는 분명히 알아들었다. 북쪽에서 왔다는 말. 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에서 오셧군요. 그럼 본 문에는 뭐하러 오신 겁니까?"
운산의 말에 여인이 운산을 바라본다.
청옥을 박아 놓은 것처럼 푸른 눈동자, 그 시선이 차갑다 못해 시리기까지 하다.
한데, 저 시린 눈빛을 받아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 특이한 감각이다.
여인이 운산을 바라보자, 운산은 괜히 머쓱해져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인은 아무런 말도 없다.
한참을 운산도 말이 없었고, 여인도 말이 없었다.
곧 여인이 입을 뗐다.
"당신이 아니야."
고개를 흔드는 것일까?
그녀의 목이 움직이다 말았다.
고개를 흔드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운산은 전자라고 생각했다.
정말 분위기가 그러했으니 말이다.
"자운, 자운 오라버니."
운산이 되물었다.
"문주, 아니, 태상호법님 말씀이십니까?"
당가의 일 이후로 자운은 정말로 태상호법이 되어버리고, 운산이 문주가 되었다.
운산은 문주가 되었는데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지 종종 자운을 문주라고 부르곤 했다.
"오라버니가 태상호법?"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의문이라는 감정이 확연히 드러났다.
"예. 대사형이 얼마 전에 태상호법이 되었지요."
운산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또 한참을 멍하다.
'참 어려운 여인이구나.'
운산이 입맛을 다셨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을 하면 얼굴에 감정이 비치게 마련인데,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감정이 얼굴에 보이게 마련인데, 이 사람에게는 전혀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 감정도 없다.
무감각하고 무감정한 얼굴. 그녀가 그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있지?"
그녀의 말에 운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대사형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운산이 방에서 나가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적지 않은 시간임이 분명했는데,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멍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어느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관심과 흥미가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과연 저 사람이 사람일까?
인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사람에게서 모든 감정이 사라지면 저런 모습이 될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여인이 있는 방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운의 목소리와 운산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글쎄, 난 찾아올 여자 없다니까 그러네. 네 약혼녀가 찾아온 거 아니야?"
운산이 소리를 빽 질렀다.
"대사형!"
자운이 손을 흔든다.
"알았다, 알았어. 그럼 네 숨겨둔 여인이 찾아왔겠지. 아들은 안 데리고 왔더냐?"
자운이 농을 던지며 문을 여는 순간,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운을 향해 다가간다.
웃으며 실실 농을 던지던 자운의 얼굴도 대번에 굳어버렸다.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멈추어 서버린다.
여인은 자운에게 점점 다가오고, 자운이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설혜?"
여인이 다가와 자운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다. 그 순간까지 자운은 단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여인이 기습이라도 하려고 했다면 자운은 지금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기습을 하려던 것이 아니다.
단순히 자운의 가슴에 머리를 가져가 대려고 했을 뿐이다.
여인이 머리를 자운의 가슴팍에 기대로 중얼거렸다.
"자운 오라버니."
두 남녀가 이백 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서로를 마주했다.
그것도 한쪽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다른 한쪽은 세상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 * *
콰과과과!
폭음이 일며 무당산이 한차례 뒤집어졌다. 그 사이에서 반쯤 찢어진 도복을 입은 도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검을 들며 중얼거렸다.
"무량수불. 칠적께서는 오늘 기어코 이 말코의 목을 거두어갈 셈이시구려."
도복을 입은 도인, 그는 바로 무당의 절대 고수인 원검도자(圓劍道子) 태허 진인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역시 넝마가 된 옷을 입고 있는 사내가 서있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나이, 하지만 몸에서 솟구치는 기도가 그의 나이가 훨씬 많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도대체 이 기도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태허 진인은 칠적을 바라보며 단단한 철벽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태허 진인의 말에 칠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웬 누른 지렁이 새끼 하나 때문에 본 별의 계획이 앞당겨지게 되었다. 그러니 탓하려거든 그놈을 탓하라고."
그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칠적, 그는 적성에서도 단 하나뿐인 금강불괴지신을 완성한 이였다. 어지간한 검강으로는 상처도 생기지 않으며, 또한 내가중수법에도 취약하지 않다.
이미 속까지 강철 이상의 경도로 단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외공과 다르게도 조문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금강, 그것을 금강불괴지신이라 부른다.
"허허, 황룡문의 천 대협을 말하는 것이라면, 응당 무림을 위해 옳은 일을 한 것이지요."
"글쎄, 너희가 말하는 무림이라는 게 물론 정파의 세상을 말하는 거겠지?"
태허 진인이 웃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바른 것이 바른 것 아니겠습니까. 무량수불."
그의 말에 칠적이 귀를 후볐다.
"알아듣지도 못할 요상한 소리 지껄이지 말고, 좀 죽어주지?"
"허허, 빈도의 한목숨, 세상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들께서 나타나 미련을 갖게 해주시는군요."
칠적이 주먹을 뻗으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그 미련 곱게 접으라고!!"
금강불괴지신에 이른 신체가 바람을 가르고 원검도자를 향해 쏘아진다. 진인의 검이 원을 그렸다.
그리는 것은 태극(太極).
돌고 돌아 결국에 도달하는 것은 태극이다. 여러 개의 원이 생겨나고, 원이 칠적의 주먹에 담긴 힘을 이리저리 분산시켰다.
콰과과과과―
분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방향으로 쏘아진 칠적의 힘은 그 부분의 땅을 뒤집어놓는다.
초목이 뒤집어지고, 산의 이름 모를 풀들이 사방팔방으로 비산했다.
"무량수불."
자신의 공격이 이번에도 무위로 돌아가자 칠적이 다시 주먹을 뻗었다.
태극과 힘의 충돌. 칠적이 펼치는 것은 극강에 다른 패도일변도였고, 거기에 대응하는 태허진인은 유능제강의 묘로써 칠적을 대했다.
끝이 나지 않을 듯한 대결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무당산이 계속해서 뒤집어졌다.
다른 무당파의 고수들이 놀라 달려왔으나, 그들로서는 감히 끼어들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공격을 날리는 칠적과 역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원을 그리는 태허 진인. 공격이 사방으로 날아들어 다른 무당의 제자들은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무당의 장문인마저 이십여 장 이상의 거리에 떨어져 있을 정도였다.
십오 장 안의 거리에 들어간다면 그라도 견뎌내지 못하고 휩쓸릴 것이다.
안전하게 버텨내기 위해서는 이십여 장의 거리가 가장 적당했다.
무당의 장문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싸움. 그 사움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서서히 승기를 잡아가는 쪽은 태허 진인이었다.
두 시진이나 이어진 공방 끝에 칠적의 금강불괴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던 것. 금강부로기라고 하더라도 절대 무적은 아니다.
물방울이 한 점으로 몇 천 년을 떨어져 내려 바위를 깎아내는 것과 같은 힘의 집약. 작은 힘이라도 한 점에 집약하게 되면 마침내 금강불괴도 무너지게 되는 법이다.
태허 진인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크으으으."
칠적이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는 승산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금강불괴가 무너지고 있으니 언제 태허 진인의 손에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일이다.
칠적이 걸음을 뒤로 훌쩍 날리며 물러섰다.
"오늘은 그쪽이 이긴 것으로 해두지."
그가 물러섰으나 태허 진인은 그를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오랜 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잡은 승기다. 오늘 이대로 보내준다면 다시 언제 승기를 잡을 지 알 수 없다.
"허허. 그대는 무림의 안위를 위해 오늘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할 것이외다."
태허 진인의 발에서 무당의 보법인 연청십팔비(戀靑十八비)가 펼쳐졌다.
그의 몸이 훨훨 날 듯 칠적의 앞에 떨어지고, 태허 진인이 손을 뻗었다.
무당에서 자랑하는 조공 호조수(虎爪手)가 펼쳐졌다.
건곤구공의 묘리에 의해서 펼쳐지는 호조수는 야산의 성성이와 같이 민첩하고 기기묘묘했다.
또한 단련된 손가락의 힘은 절대로 약한 것이 아니었다. 태허 진인의 손이 칠적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쩌엉―
극한으로 집약된 힘이 칠적의 몸을 후려쳤다.
칠적의 몸이 훨훨 날아 뒤로 나가떨어진다. 그 힘을 그대로 이용한 칠적이 그대로 자리에서 내뺐다.
"오늘은 네 승리지만 내가 다시 왔을 때 그날은 무당이 무림에서 사라지는 날이 될 것이다!"
그가 내빼며 소리쳤고, 태허 진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태허 진인의 기감에서 칠적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태허진인이 입안에 가득 담고 있던 피를 토해내었다.
주르륵―
도복이 붉은 피로 적혀지고, 그런 그를 향해 무당의 제자들이 달려왔다.
"사부님!"
"사조!"
무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태허 진인이 지켜낸 무당이다.
마지막 순간, 공격을 가하는 순간에 태허 진인은 역공을 당해 내상을 입었다.
이 자리에서 칠적을 끝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만들어낸 빈틈이었고, 칠적은 그것을 파고들었다.
칠적 역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당분간은 무당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태허 진인의 눈에 비치는 모습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허허, 내 몸이 완치될 때까지 아무런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그 생각을 끝으로 태허 진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