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수염은 잘 깎지 않아 지저분하지 않고, 잘 씻은 것인지 몸에서 악취도 풍기지 않는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개방도의 정반대였다. 그런데 괴걸왕은 이놈을 지금 거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놈을 발로 찼다.
"캐액! 이게 도대체 무슨……."
자운의 발길질이 공야후 위로 떨어져 내린다. 비가 내리듯 쏟아지는 발길질. 자운의 발길질에는 사심이 아주 많이 담겨 있었다.
'감히 새로 맞춘 정문을 박살 내?'
돈은 돈이고 사심은 사심이다. 자운의 발길질은 그 후로 반각 가량 이어졌다.
괴걸왕은 그런 자운을 보며 뒤에서 좋아라 박수를 치고 있었다.
"옮지, 옳지! 좋구나, 내 제자야 드디어 거지꼴이 되어가는구나."
제자가 맞는 것이 기분 나쁘기보다는 거지꼴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기분 좋은 괴걸왕이었다.
자운이 괴걸왕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이제야 좀 거지꼴 같네요."
괴걸왕이 맞장구치며 손뼉을 쳤다. 그가 웃어 보인다."
"헐헐헐헐. 그렇구만, 천…문주."
자운이 그의 말을 수정해 주었다.
"이제 전 태상호법입니다. 제 사제 놈이 문주가 되었지요."
물론 여섯 살짜리를 키워서 잡아먹는 대가로 물려받은 아주 명예로운 문주 직이었다. 이 소리를 운산이 들었다면 발작했을 것이나 다행히 운산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흠흠. 천 호법이라고 부르면 되겠나?'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운 태도.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락의 의미. 그러자 그가 활짝 웃어 보이며 자운에게 신세한탄을 시작한다.
"말년에 제자라고 하나 더 얻었는데, 이놈이 아주 자기 멋대로지 뭔가. 헐헐."
그가 이제야 좀 거지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의 제자를 발로 툭툭 차며 말을 이어가다.
자운의 발길질에 맞아 그대로 기절한 공야후가 꿈틀꿈틀거렸다.
"흘흘. 뭐라더라. 나는 개방의 무공을 알려준다고 해서 따라왔지 거지가 되려고 온 게 아니라고? 내 돈으로 좋은 거 사고 좋은 옷 입는데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했던가?"
까놓고 말해서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거지다운 생각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이놈 옷을 벗겨서 거지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더니 나만 보면 죽자 살자 도망을 간다네. 그거 때문인지 이놈 경공 실력 하나만큼은 제 사형보다 떠 뛰어나."
공야후의 사형이라면 현 개방의 방주를 말하는 것이다.
한데 그보다 경공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아마도 그보다 경공 실력이 뛰어난 이는 천하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운과 괴걸왕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잇을 때였다.
공야후가 정신을 차린 것인지 몸을 격하게 꿈틀거리며 제 스승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도망갈 틈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한순간, 공야후의 몸이 높게 치솟았다. 틈을 발견하고는 대번에 내빼는 것. 괴걸왕이 자기 제자가 내빼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흐허허허허헐! 저놈이 또 내빼다니! 넌 잡히면 옷 다 벗고 나랑 같이 구걸하러 다닐 줄 알아라!"
저 멀리서 공야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흥! 내가 쉽게 잡힐 줄 압니까?!"
공야후의 뒤를 쫓아서 괴걸왕이 질주했다.
멀어지는 공야후와 괴걸왕을 보며 자운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결국 여기는 왜 온 건데?"
끝까지 알 수 없는 의문이었다.
* * *
"육적이 죽었다고?"
미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목소리는 넓은 제전을 가득 채우며 울린다.
하늘로 향하는 천장에는 둥근 구멍이 나 있고, 그위에서 붉은 별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듯 솟아 있는 네 개의 기둥.
그 기둥들은 성인 남성 셋이 팔로 끌어 감싸도 다 감싸지 못할 정도로 거대했다.
또한 기둥을 뱀이 칭칭 휘감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더욱 기괴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일적이 부복하는 자리. 그 위에 천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가진 이가 있엇다. 미성의 목소리답게 얼굴 역시 준수하다. 그리고 젊었다.
선이 굵은 사내. 눈매는 뱀과 같이 날카로워으면 머리는 잘 정리가 되어 정갈하기 그지없다.
그가 제전에서 장 높은 곳, 태사의에서 일적을 내려다보았다.
일적을 부복시킬 수 있는 자라 하면 분명 적성의 우두머리인 일성(一星)이 분명한데, 어찌 이리 젊은 외모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로 전설 속에 나오는 반로환동이라도 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저렇게 젊은 나이로 일적을 부복시킬 정도의 무위를 갖추었다는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확실한 것은 그가 붉은 별의 주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일적이 고개를 숙이며 침을 꿀꺽했다. 일적이 판단한 지금 주인의 기분은 좋지 못하다. 또한 주인은 잔혹하고 수하기 그지 없어 수하의 목을 치는 것쯤은 우습게 아는 인물이다.
패왕이며 동시에 아이와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신검을 넘겨준 것, 그것이 바로 일성의 성격이었다.
"예,"
하지만 거짓을 고할 수는 없는 법. 그가 머리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이면서도 진실을 고했다.
말을 잘못할 경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거짓을 고하는 것은 더욱 큰 불충이라는 사실을 일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숨기지 않고 진실을 고했다. 일적이 뛰어난 것은 무공뿐만이 아니다. 눈치 또한 칠적 중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다른 칠적들과 달리 일성을 지근거리에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육적이 죽었다는 말에 주인이 노한 것일까?
'허어.'
심기가 불편할 것이라 생각했던 주인이 미소를 짓고 있다.
놀랍게도 주인은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즐거움인가?
그렇지 않으면 호기심인가?
확실한 것은 주인이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독성이 그렇게 강했나?"
그의 말에 일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성은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않다. 육적과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
독공이라는 특성상 어떤 변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무림에 알려진 무력대로라면 육적에 조금 못 미치는 고수였다.
한데 육적이 독성을 죽이러 가서 죽임을 당했다?
말이 되지 않는다.
일성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봐, 일적.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일성이 히죽 웃어 보이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합공을 당한 듯합니다."
일성이 손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마리 파리 떼를 쫓는 듯한 가벼운 손짓. 그 가벼운 손짓에서 광풍이 일었다.
일진광풍이 제전을 휩쓸고, 거대한 제전을 받치는 기둥이 무너질 듯 휘청거렸다.
"당가의 놈들에게 합공을 당해서 죽었다는 말은 안 하겠지? 응? 벌레는 아무리 많아봐야 벌레잖아."
그의 말에 일성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육적이 칠적 중 거의 말석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럼 누가 죽인건데?"
일성이 손을 휘저었다. 그의 손으로 방금 전까지 벽을 기어가던 손가락만 한 거미가 딸려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일성의 손으로 빨려들어 간 거미는 처음에는 당황하였으나, 곧 독이 있는 이빨을 보이며 일성을 물기 위해 위협한다.
일성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거미의 다리를 움켜쥐었다.
뚜욱―
조용했기 때문일까?
거미 다리 부러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리고, 다리와 몸통 사이로 체액이 길게 늘어졌다.
일성은 그 모습을 사뭇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말해봐. 누구한테 합격당해서 죽은 건지."
일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철혈황룡과 독성의 합격을 당한 듯합니다."
철혈황룡, 요 근래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신진고수다. 그런데 그가 육적을 쓰러뜨릴 정도로 강했던가?
일성이 그런 눈빛으로 일적을 내려다본다.
뚜둑.
"육적이 익힌 무공이 뭔지는 모르지 않겠지?"
뚜둑.
일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닥쳐오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내게 해주는 무공, 광혈신공을 익히지 않았던가.
뚜둑.
광혈신공을 본격적으로 운용하게 되면 독성이라 할지라도 그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뚜둑.
그런데 죽었다?
뚜둑.
죽을 위기에서는 분명 목숨을 담보로 광혈신공이 움직였을 것이고, 광인이 되어 무공이 상상할 수 없이 강해졌을 것이다.
뚜둑.
그런데 죽었다?
뚜둑.
마침내 모든 거미의 다리가 부러졌다. 체액이 일성의 앞에 길게 늘어져 있고, 거미가 몸통만 남아서는 꿈틀거렸다.
일성이 거미의 다리를 모두 부러뜨리고 만족한 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으하하하! 그래, 그런데도 죽었단 말이지. 그런데도 죽었어."
일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부복한 자세를 유지했다.
일성의 손에 잡힌 거미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일성이 거미의 머리와 몸통을 각기 움켜쥐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정복하는 맛이 나지. 과연 무림이란 말이지. 무림의 저력은 알 수 없다는 말이지. 역시 재미있네."
그의 손에 움켜쥐어진 거미가 고통스러운지 몸을 비틀었다. 모든 다리가 부러진 상황이라 반항을 할 수는 없으나, 몸을 비트는 것으로 최대한의 반항을 해본다.
하지만 그는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거미의 머리와 몸통을 움켜쥐었다.
"과연 재미있단 말이지. 무림."
그의 손에 들린 거미의 몸통과 머리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뚜둑―
그리고 진득한 체액이 길게 늘어졌다. 그것을 바라보는 일성의 눈이 잔혹하게 빛났다.
"흐흐흐."
* * *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운산이 눈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얼음과 같이 차가워보이는 외모에 무표정한 얼굴, 옷은 덥지도 않은지 천산에서나 입을 법한 동물 털로 만든 옷을 입고 있다.
이곳에서 저런 옷을 입으면 더울 법도 한데 전혀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 여인은 태연한 모습니다.
하ㄴ데 그것이 또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확실한 것은, 다시 보지 못할 정도로 드문 미녀라는 점이었다.
그녀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얼굴에 올망졸망 자리하고 있는 또렷한 입술이 열린다.
무표정한 얼굴에 한동안 말이 없는 얼굴에서는 백치미까지 느껴진다.
"북쪽."
작은 목소리라 제대로 듣지 못한 운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다시 묻는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