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하지만 독성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자운이 하는 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자운을 바라보던 그가 툭 말을 던졌다.
"미친 거냐? 발광을 하는구나. 허허허허."
그 말에 자운이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것을 뚝 그친다.
사실인즉 이러했다. 자운이 폐관에 들어선 후 황룡검존은 당시의 당가주이자 자신의 친우였던 이를 찾았다.
당시의 당가주와 검존은 성격이 잘 맞을 뿐만이 아니라 그와는 함께 전장과 사선을 넘나들며 생과ㅏ 사를 공유한 사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진 술자리, 그 술자리에서 황룡검존은 황룡문의 신물 황룡신검을 가주의 손에 넘겨주었다.
'이것을 나에게 넘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마도 당시의 당가주는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지금 독성의 말에 의하면 당시의 검존, 자운의 사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네. 그동안 황룡문의 힘이 너무 약해졌어. 이 신검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네. 그러니 당가가 보관해 주게.'
'이 친구야, 자네가 있지 않은가. 찔러도 죽지 않을 거 같고 끓는 독 속에 목욕을 하고 나와도 죽지 않을 것 같은 자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검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닐세. 나는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아마도 내가 죽으면 황룡문은 이걸 지킬 힘이 남지 않을 거야.'
'그래서 이걸 어쩌라는 말인가. 내가 가지고 있다가 후에 황룡문에 전해주면 되는 건가?'
'그것도 아닐세. 본 문의 제자들이 그렇게 나약한 놈들일리가 없지 않은가? 직접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게.'
'당가에 이걸 직접 찾으러?'
검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지. 그 정도 기백은 있어야 황룡문의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녀석들은 꼭 찾아올 걸세. 내 후인들이 아닌가.'
검존의 말에 당가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비워내었다.
'그렇군. 자네의 후인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의 후인이면.'
당가주가 입맛을 삼켰다.
'꽤 쓸 만하겠는걸?'
그의 말에 검존이 희희낙락 웃었다.
'왜? 사위라도 삼을 생각인가?'
'안 되면 손녀사위라도 삼아야겠지!'
독성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 자운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는 독성을 마주 본다. 사실 황룡신검이 당가에 있기는 하지만 당가와 혼약이 되어 있다는 증거가 없지 않은가?
자운이 아무렇게나 손을 휘두르며 몸을 늘어뜨렸다.
"배 째요."
"어허. 귀한 내 손녀사위 배를 째면 되나."
무려 이백 년이다. 지금의 독성과 당시의 당가주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독성은 자운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듯했다.
'일 검에 검기점혈로 본가의 식솔들을 모두 제압해? 이거 물건이로다.'
당묘기에게 들은 대로라면 눈앞에 있는 이 놈은 정말 물건이다. 외모로 보아 이제 스물 중반 정도인데, 일신의 무력은 무림의 중견 고수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
이대로 쑥쑥 커나간다면?
십 년 후에는 절대고수?
이십 년쯤 후에는 천하제일고수가 될 것이다. 자운도 그런 독성의 눈빛을 보고 그의 속셈을 눈치챘다.
자운이 속으로 한탄했다.
'빌어먹을 꼬맹이야, 내 나이가 올해로 이백하고도 몇 갠지 모르겠다.'
자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봐, 당가 영감."
자운이 일부러 독성을 당가 영감이라고 불렀는데, 독성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꾸했다.
"왜 그러는가. 손녀사위?"
'이놈아, 손녀사위가 되면 네 버릇부터 고쳐 주마.'
불론 속으로는 벼르고 있었다.
"증거 있어?"
"허허허. 뭐가 있느냐고?"
자운이 황룡신검을 탁 등으로 걸쳐 메며 물었다.
"증거 있느냐고. 우리 사부, 아니, 검존께서 그런 약속을 했다는 증거 있냐고."
설마 증거가 있겠는가. 자운이 기억하는 자신의 사부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달랐다.
"물론 있지. 여봐라, 그걸 가지고 와라."
독성이 사람을 시켜 내어오게 한 목합. 귀한 나무와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목함이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목함을 열자 안에는 붉은 비단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붉은 비단 위에는 낡은 서신 하나가 놓여 있었다.
독성이 그것을 집어 자운에게로 넘겨주었다. 자운이 놀란 눈을 치켜뜨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젠장, 정말 증거가 남아 있다니…….'
펼쳐서 확인해 보니 분명 자운의 사부인 검존의 필체가 맞았다. 또한 황룡문의 문주임을 상징하는 낙인까지 찍혀 있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한다.
자운의 눈에 갈등이 어렸다.
'이걸 태워 버려?'
그런 자운의 기색을 읽은 것일까. 독성이 자운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거기에 불붙이면 사위는 오늘 독이라는 독은 다 퍼먹게 될 걸세. 당가의 절독은 종류가 많지.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뿐만이 아니라 남자의 기능을 상실시키는 독도 있다네."
자운이 그를 향해 물었다.
"가지지 못할 바에는 부숴 버리겠다는 건가?"
독성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내 손녀사위가 되지 못한다면 그 어느 놈에게도 줄 수 없지. 자네는 평생 남자가 아니게 될 걸세."
자운이 속으로 침을 삼켰다.
'빌어먹을 사부. 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약속을 해서 날 괴롭게 하는 겁니까.'
괜히 하늘에 있는 사부도 원망해 보고, 눈앞에 있는 글도 다시 잃어본다.
'황룡문의 문주와 약혼'이라는 선명한 글자가 자운의 눈에 들어왔다.
'응? 문주?'
자운이 고개를 들어 독성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손녀사위?"
자운이 손을 흔들었다.
"아직 확실한 거 아니니까 한발 앞서 나가지 말고, 분명 약조를 한 건 황룡문의 문주라는 말이지."
독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지. 현 황룡문의 문주 철혈황룡 천 문주."
그 말에 자운이 환하게 웃었다.
"미안한데, 나 문주 아닌데?"
독성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문주 대리라는 것은 문주의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문주가 아니다.
"사실 문주로 눈여겨봐 둔 녀석이 있어. 지금 당가로 부르면 되겠네. 전서구 좀 빌려도 되겠지?"
자운이 보낸 전서구는 며칠 지나지 않아 황룡문에 도달했다. 허공에서 내려오는 전서구에게서 서신을 풀어낸 우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것이다.
우천이 놀란 표정으로 대번에 운산에게로 달려간다.
"사형, 사형, 이것 좀 보세요."
운산이 태원삼객에게 무공 지도를 해주다 말고 우천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자운이 보낸 서신을 받아 들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야?"
서신을 펼쳐 읽어 내려가는 운산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도대체 이 말이 안 되는 서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약혼녀를 구해뒀으니 지금 당장 사천당가로 오라고?
거기다가 이제부터 황룡문의 문주가 자운이 아닌 운산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우천과 운산이 동시에 머리를 싸잡았다.
만나볼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황룡문을 나갔을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한다.
둘이 고개를 푸욱 숙였다.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일이기에 황룡문의 문주가 갑자기 바뀌며, 그리고 사천당가가 얽혀 있다는 말인가.
우천과 운산 둘의 머릿속에는 지금 공통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또 친 겁니까. 대사형.'
운산이 우천을 향해 말했다.
"일단은 당가로 가보자.“
제10장
운산과 우천이 당가에 당도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을 타고 걸음을 재촉했기 때문일까?
오주야가 채 되기 전에 그들은 당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운산과 우천이 가장 먼저 당가에 당도하여 들은 소리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황룡문의 문주와 당가의 금지옥엽이 약혼관계라는 겁니까?"
운산의 물음에 자운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는 독성을 바라보며 말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전 이제 황룡문의 문주가 아닙니다. 황룡문의 음… 뭐하지?"
운산과 우천을 향해 물었으나 그들이 답해줄 리가 없다. 운산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고, 우천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조고는 과연 이 사람을 믿어도 될지 마음속으로 저울질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자운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직책을 정해 버렸다.
"난 이제 황룡문의 태상호법이니까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지."
자기 마음대로 덥석 태상호법의 자리를 꿰어차 버렸다. 운산과 우천은 누구 마음대로 태상호법이냐고 소리를 버럭 지를 뻔했다.
하지만 여기는 독성의 앞이다. 참아야 한다.
운산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자운에게 말했다.
"대사형, 문주 자리는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설득하려 한 것이다.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응, 알아."
알아.
알아?
알면서 그랬다는 말인가?
알면서 그러는 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근데 난 원래 문주가 아니라 문주 대리였잖아. 잊은 거 아니지? 문주 대리가 문주한테 자리를 넘겨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말을 마치며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당연하고 지당한 일이지. 역시 사필귀정(사필귀정), 일은 순리대로 흘러가는 거라니까."
자운의 말을 듣고 있는 운산과 우천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운이 독성을 보며 말했다.
"이놈이 이래 봬도 벌써 검기지경에 오른 녀석입니다. 대단한 놈이지요."
독성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눈으로 운산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저 나이에 검기지경이라고 하면 절대로 낮은 경지가 아니다.
오히려 무제, 혹은 뛰어난 무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데 자운만큼은 아니다.
이십 중반의 외모에 가지고 있는 일신의 무공은 독성으로서도 다 읽을 수가 없다.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얼마나 숨기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대충 짐작해 보건데 아마도 강기지경 이상.
스물의 나이에 강기지경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도 독성은 자운의 수준을 그렇게 추측 할 수밖에 없었다.
강기지경, 명문 가문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를 받고, 영약을 밥 대신 먹어도 이루기 힘든 경지가 강기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