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러지 않기로 했으니까.
자운이 자신을 공격한 화산의 검수를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이게 돌았나. 화산의 기세니 기개니 하더만 결국은 기습이냐?”
자운의 이죽거리는 표정이 화산파 인물들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이것은 기습이었다.
화산의 인물이 기습을 한 것이다. 비록 분노로 인해 이성을 통제하기 어려웠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심법이 있는 것이 아니던가.
이것은 기본적으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검수의 문제이고 화산의 실수였다.
화랑거사가 자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오, 천 문주.”
호칭 역시 소협에서 천 문주로 바뀌었다. 실력을 보이자 호칭이 바뀐 것이다. 자운이 발로 검수를 툭 찼다.
“넌 저리 꺼져.”
실신한 채로 검수가 화산파 인물들에게로 굴러갔다. 그 모습이 흡사 나려타곤과 같다. 화산의 검수들이 수치심에 물들었지만, 그들은 감히 자운에게 무어라 할 수 없었다.
먼저 기습을 한 것은 이쪽이니 체면이 상하더라도 참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검수 중 하나가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외치려고 하는 것을 화랑거사가 말렸다.
그리고는 자운과 괴걸왕의 눈을 응시한다.
“후우. 이 일에는 본 파가 사과를 하겠소. 지금 이 검수를 보름간 참회동에서 보내겠소이다.”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라면 뭐…….”
“그럼 이제 말해주시오. 그분을, 스승님을 살해한 자가 누구요?”
매화검선은 화랑거사의 스승이었다.
자운과 괴걸왕을 바라보는 화랑거사의 눈이 숨길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걸왕과 자운이 동시에 끄덕였다. 괴걸왕이 소림의 범혜를 바라보았다.
“조만간 방장 대사에게 내가 뵙자 한다고 전해라.”
그리고는 주변을 바라본다. 지금 이곳에는 전 무림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곳에서 진실을 말해 앞으로 대비하자는 것이 자운과 괴걸왕이 내린 결론이었다.
“선인봉에 남겨진 검상. 흘흘. 그것은 바로 성우적하검(星雨赤霞劍)이라는 검술이었다.”
걸왕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몇몇이 성우적하검이라는 이름에 움찔한다.
이백 년 전의 검법. 지금은 그 이름과 함께 그 위력마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몇은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흘흘. 아는 사람이 몇 있는 것 같군.”
걸왕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랑거사도 성우적하검을 들어본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사실 그들에 대한 건 비밀도 아니었다. 이백 년 전 무림을 말아먹을 뻔했던 세력이 아닌가?
고작 이백 년이다.
그사이에도 많은 문파가 흥하고 망한다고 하지만, 무림에 있어서 그 정도로 강렬하게 인상을 각인시킨 세력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수괴 중 하나가 사용하는 검법이 성우적하검이었다.
“설마?”
화랑거사의 말에 괴걸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설마일세.”
무림은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적성이 다시 준동하는 듯하네.”
그의 말을 알아들은 대부분의 인물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백 년 전 무림을 말아먹을 뻔했던 조직이 다시 준동한다는 꼬리를 잡았다.
괴걸왕이 뒤에 서서 웃음 짓고 있는 자운을 바라보았다.
자운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꼬리를 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운은 무림을 구한 신성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문의 제자들과 함께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괴걸왕이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미친놈.”
단번에 전음이 날아들었다.
[죽는다?]
제6장
적성이라는 말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다들 적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붉은 별.
적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유명한 또 하나의 이름. 그들은 무림 제패라는 거창한 명문을 가지고 일어난 이백 년 전의 조직이었다.
단일 조직으로서는 그 누구보다 강했으며, 또한 고수의 수 역시 적지 않았다.
그들 중 최고라 불리던 칠적(七赤)은 당시 무림의 절대자들과 맞먹는 무위를 가지고 있었을 정도. 그런 그들이 다시 준동했다는 사실은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괴걸왕을 향해 소리쳤다.
“그 무공이 성우적하검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너무 성급한 처사가 아닙니까? 백번 양보해서 성우적하검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들의 비급을 주워서 익혔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그 의견에 동조하는 의견들이 흘러나왔다.
“맞는 말이오. 단지 그 하나로 적성이라는 단체가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믿을 수 없소.”
그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괴걸왕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괴걸왕이 입은 다문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어느 순간 다시 침묵이 돌아왔다.
괴걸왕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흘흘.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흘흘흘. 하지만 너무나 공교롭지 않은가?”
그가 여러 문파의 이름을 주르륵 부르기 시작한다.
“백검문(白劍門), 황룡문(黃龍門), 북해빙궁(北海氷宮), 신검장(神劍莊), 그 외에 이름이 불리지 않은 많은 문파들, 이들이 어떤 문파들이었는지 기억하는가? 흘흘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망해버렸거나 그 영향력이 과거와는 달리 완전히 죽어버리다시피한 문파다.
그리고 이백 년 전 적성과 맞서 가장 선두에서 싸웠던 문파이기도 하다. 무림의 구세영웅들이 몸담았던 문파란 말이다.
좌중이 입을 열지 않자 자운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괴걸왕의 말을 받았다.
“북해빙궁은 당시에 적성의 공격을 받고 멸문했다고 하지만, 다른 문파들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 근데 웬 사파의 개새끼들이 다시 전쟁을 일으킨 거지. 그때 너넨 뭐했어? 쟤들은 약해진 힘을 이끌고 그들과 싸웠는데 그동안 너넨 뭐했지?”
자파의 안정을 위해 세력을 숨기고 힘을 뒤로 돌렸다. 누군가 대신 나서서 사도천을 막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자파의 안위를 챙겼다.
그리고 그 결과, 저들은 완전히 몰락을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너네도 알지? 쟤들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는거. 근데도 사도천을 막았어. 그리고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지.”
자운의 손이 흥분한 듯 이리저리 움직이고, 그의 목소리는 짐승이 울분을 토하는 듯하다.
“그들이 몰락하는 게 참으로 공교로워. 하나같이 주변 사파의 공격을 받았거든. 근데 이상한 게, 다른 많은 문파들은 정사대전 이후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 유독 그 문파들만 사파의 공격을 받았다. 이상하지 않아?”
마치 누군가가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한 이들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자운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바닥에 탕 내리꽂았다.
“황룡문도 내가 없으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지. 황룡문을 습격한 그 사파의 문주가 화산으로 가보라고 하더군.”
그리고 그 화산에서 공교롭게도 발견된 것이 있었다.
“근데 화산에서 적성의 흔적이 발견되었어. 우연치고는 너무 대단한 우연이네. 이건 마치 절벽에서 떨어졌더니 절대고수의 기연이 ‘나를 먹어주세요’ 하고 기다리는 수준의 우연 아니야?”
자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닌 거 너희도 알지?”
무림에 우연 따위는 없다. 우연이 이 정도로 연속된다면 그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필연.
이것은 분명한 필연이다.
괴걸왕이 그런 자운의 말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본 방에 연락해 필요한 정보를 부탁했으니 곧 확인할 수 있겠지. 흘흘흘. 그리고…….”
그가 주변을 차가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자운 역시 마찬가지. 괴걸왕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자운과 괴걸왕의 몸이 동시에 섬전처럼 튀어나간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좌중의 중심. 자운이 그대로 조법을 펼쳤다.
화랑거사가 놀라 소리친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요?”
자운이 좌중 중에서 한 사람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우리가 적성이라는 말을 꺼내니 살기를 숨기지 못하는 녀석들이 보이더라고.”
자운의 손이 대번에 그의 팔목을 타고 흘러 맥을 점하고, 그를 획 던져 버린 후 다시 다른 이를 움켜쥔다.
“이익!”
자운의 손이 다가오자 그가 반항을 했다. 자운의 손과 그의 손이 얽혀들고, 자운이 그의 손을 쳐 내며 단번에 다가갔다.
탁탁? 탁탁탁?
그의 옷깃을 움켜쥐는 순간, 자운의 좌수가 그의 목 뒤를 꾹 누른다.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지는 인물, 자운이 다시 그를 집어던졌다. 그가 떨어지는 자리에는 괴걸왕이 집어 던진 인물 역시 떨어져 내렸다.
눈치 빠른 몇몇이 그 자리에서 솟구친다.
도주로를 확보하려는 것. 자운이 빠르게 그들을 살폈다.
그들이 경공을 내질러 화산의 산문을 벗어나려는 순간, 화살과 같은 검기가 자운의 검세에서 쏘아졌다.
탄검기(彈劍氣),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검기가 그대로 그들의 다리를 꿰뚫는다.
괴걸왕 역시 지풍을 쏘아 보냈다. 손에서 거지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맴돌고, 강력한 지풍이 쏘아진다.
핑? 핑?
그의 지풍 역시 정확하게 저들의 다리를 꿰뚫었다. 다리가 검기와 지풍에 꿰뚫리자 경공으로 탈출하던 그들이 아래로 추락한다.
자운과 괴걸왕이 단번에 그들을 낚아채고 점혈을 했다.
그 수는 도합 아홉. 자운이 그들을 좌중의 중심에 내려놓았다.
“사실 지금 전 무림이 이 화산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적성이 움직인다면 이 안에도 세작을 심어놨을 줄 알았어.”
자운이 그들을 보며 이죽거렸다.
“흘흘흘. 고놈들 참 깜찍하기도 하구나.”
괴걸왕이 그대로 한 명의 팔을 꺾어버렸다.
“으아아아아악! 왜, 왜 이러는 것이오!”
괴걸왕의 손에 팔이 꺾인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잡혔으니 딴청을 부리는 것이다.
자운이 괴걸왕의 손에 팔이 비틀어지고 있는 사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왜 그러냐고? 몰라서 물어? 설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이죽거리는 자운의 얼굴에 차가운 살기가 보이고, 자운이 그대로 손을 뻗어 사내의 머리를 잡았다.
“너 적성에서 나온 놈이잖아. 사실대로 말 안 하면 머리를 터뜨려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