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하지만 이 자리는 화산의 검선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한 자리이지 않는가?
자신의 사사로운 울분을 표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화산의 장문인 무연 진인이 나섰다. 그의 검이 마치 매화꽃이 파도치는 것과 같다 하여 무림에서 부르는 이름이 화랑거사(花浪巨士). 그에게 거사(巨士)라는 별호가 붙은 것은 평소 그의 모습이 도를 닦는 도인이라기보다는 선비와 같았기 때문이다.
“허허, 소협. 내 소협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본 파를 위해 참아주었으면 하네.”
화랑거사가 자운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추후 내 자리를 마련하여 그들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하겠네.”
자운이 화랑거사의 말에 콧방귀를 꼈다.
“흥. 말은 잘하네. 좋아, 그럼. 너희는 너희가 그렇게 자랑하는 검선이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알고 있나?
사실 지금까지는 무대를 만든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겸사겸사 울분을 토한 것이다.
이제 화산에 모인 모든 무림인들의 시선이 자운에게로 집중되었다. 자운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던진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오고 있는지 직접 실감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뜨악하는 표정으로 자운을 주목했고, 화랑거사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소협, 그게 무슨 말이오?”
“무슨 말이긴, 너희가 하다가 만 조사, 내가 선인봉에 올라가서 다시 했다고.”
자운이 손가락으로 화산파를 지목하며 말했다. 그 말에 화산의 검수들이 대번에 검을뽑아 들고 자운을 겨누었다.
자운의 목에 시퍼런 화산의 검날이 향하고, 화랑거사가 자운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화산의 금지인 선인봉에 올랐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소?”
목이 검에 닿아 있는데도 자운은 겁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도 되지.”
화랑거사와 자운의 눈이 마주쳤다.
“남의 문파에 와서 금지에 오르는 것은 자랑이 아니오.”
“나도 인정해. 하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자운이 검수들의 검을 잡으며 말했다. 자운이 자신들의 검을 잡으려 하자, 자운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팔 인의 검수가 빠르게 자운의 제공권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자운의 손이 더 빨랐다.
단번에 펼쳐지는 공수탈백인.
자운의 손에 검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검수들의 검이 딸려 들어온다.
착착착?
자운이 검수들의 검을 그대로 던져 버렸다. 순식간에 검을 빼앗기고 맨손이 된 검수들이 자운을 바라보았다.
“검선이 죽던 날, 본 문이 습격을 당했지.”
자운이 화산의 검수들을 보며 오만하게 말했다.
“재밌지 않아? 전 무림의 시선이 화산으로 향한 날, 황룡문이 습격을 당했다고.”
말을 하는 자운을 운산과 운천이 그런 일이 있어냐는 듯 바라보았다. 자운이 그들이 알지 못하게 처리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운은 그들을 향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화랑거사를 바라보았다.
“우연이라기에는 절묘했다. 물론 본 문이 검선으로 눈가림을 하면서까지 쳐야 할 대단한 문파는 아니야.”
화랑거사가 자운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눈앞의 이 젊은 사내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근데 놈들의 수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화산으로 가보라고.”
입을 뭉그러뜨려서 정확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화산이라는 두 글자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검선의 사망 소식. 뭔가 느낌이 왔지?”
자운이 짝 하고 손바닥을 때렸다.
“그래서 선인봉에 올라갔어.”
“자네의 사정은 이해했네. 하지만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은 자네가 선인봉에 올라갔다는 사실이 아니네.”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선인봉에 올라갔다는 사실 하나로 검수들이 자운의 목을 겨눌 리가 없으니까.
“그렇겠지. 내가 거기서 뭘 발견했는지가 중요하겠지.”
자운이 주변의 무림인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금 화산으로 쏠린 전 무림의 시선이 자운에게로 향했다.
자운은 뜸을 한 번 더 들였다.
“사실 선인봉에 올라간 건 나 혼자가 아니야.”
자운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이제 그만 나오시죠!”
그의 말에 악취가 진동하며 남루한 거지 하나가 대번에 허공에서 날아든다. 괴장을 들고 결이 없는 거지. 그를 알아본 무림인들이 하나같이 소리쳤다.
“괴걸왕!”
“개방의 태상방주!”
그들의 반응에 괴걸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자운을 향해 눈짓을 해 보였다.
‘어떠냐, 내 반응이 이 정도다’ 라는 눈빛.
자운이 그를 향해 단번에 전음을 날린다.
[죽는다. 판 열어놨으니까 장난치지 말고 각본대로 해라.]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흘흘. 그러지요, 선배님.]
괴걸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운이 깔아놓은 판을 보았다. 무림인들이 바글바글 몰려있다.
그리고 자운의 울분을 들었을 때, 판을 짜기 위한 연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뜨끔했다.
‘방으로 돌아가면 이놈들 시켜서 주변의 문파 좀 신경 쓰라고 해야겠다.’
그런 마음까지 먹었을 정도다.
그가 무림인들을 바라보다가 화랑거사와 눈이 마주쳤다.
화랑거사가 괴걸왕을 보고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갑자기 젊은이가 괴걸왕을 불러내다니, 의문스러울 만도 할 것이다.
그가 화랑거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천 문주와 함께 선인봉에 올랐던 이는 바로 날세. 흘흘흘.”
그가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의 발언에 전 무림인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왜 걸왕(乞王)이 아니라 괴걸왕(怪乞王)인지는 잘 알고 있다.
한데 아무리 그라도 화산의 금지에 올랐다는 사실에 무림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괴(怪)는 괴(怪)다.
화랑거사가 괴걸왕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괴걸왕이라 하시더라도 이번 일은 피해가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 말에 괴걸왕이 혀끝을 찼다.
“쯧쯧. 그새 잊은 게로구먼. 나와 천 문주는 그냥 선인봉에 오른 게 아니네. 알아볼 것이 있어서 올랐지.”
그가 슬쩍 자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에 자운은 남모르게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다는 뜻. 고개를 돌리며 문득 괴걸왕은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 나이 먹어서 남의 눈치나 봐야 하다니…….’
설사 나이가 자신보다 배는 많더라도 그래도 외모는 스물이 아닌가!
차라리 외모라도 이백 년 먹은 노괴물이라면 인정하겠지만, 이건 외모가 아니라 속이 이백 년 먹은 노괴물이다.
신세한탄을 하면서도 걸왕은 해야 할 말은 계속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했네.”
다음에 이어진 괴걸왕의 말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검선이 어느 무공에, 누구의 손에 당한 것인지 알게 된 것이지. 물론 그 과정에서 천 문주의 도움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네.”
마치 그가 없었다면 흉수를 알아내지 못햇을 것이라는 말투. 아마도 이것으로 화산의 금지에 들어간 죄의 대부분을 덜어낼 수 있으리라.
또한 이렇게 괴걸왕이 직접 나서서 자운을 옹호했으니 화산으로서도 자운을 처벌하기 어려워진다.
그를 처벌하려면 그와 함께 금지에 들어간 괴걸왕을 처벌해야 하기 때문이다.
화랑거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운과 괴걸왕이 금지에 들어갔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자존심이자 자부심인 검선을 살해한 범인을 알아내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괴걸왕이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선인봉에 새겨진 자국이 무엇인지 아는가?”
화랑거사가 화를 삭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수법을 알아내기 위해 몇 주야를 노력했으나 감조차 잡을 수가 없다.
그저 알아낸 것이라곤 무언가 육중한 것이 허공에서 떨어졌다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야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흔적, 그것은 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네.”
그 말에 화랑거사의 눈이 튀어나왔다. 소림승 역시 마찬가지다. 방금 전 자운에게 제압당했던 소림승의 대표로 보이는 이가 걸어나와 그를 향해 물었다.
“아미타불, 소승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 흔적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괴걸왕께서는 지금 그 흔적이 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한 흔적은 검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승려의 말에 괴걸왕이 콧방귀를 뀐다.
“흥! 범혜(凡惠), 너는 내 말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냐?”
괴걸왕의 말에 반문했던 승려, 범혜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흘흘. 천 문주, 보여주시게”
괴걸왕이 자운을 보며 말했다.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는다.
스르릉 하고 뽑힌 검이 단번에 허공에 검영을 그리고, 수개의 변화가 어우러졌다.
검영과 검영이 뭉쳐지며 자운의 검을 따라 바닥ㅇㄹ 훑고 지나간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새겨지는 검상. 그 모습은 거미줄과 같고 선인봉에 나 있는 상처와 같았다.
“놈!”
화랑거사의 옆에 있던 검수 하나가 대번에 자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운이 그것을 펼치는 것을 보고 흉수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생각이 짧았다.
자운이 흉수였다면 오래전에 괴걸왕에게 제압당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무공 역시 자운에 비해서 짧았다.
그를 향해 자운이 손을 뻗었다.
“미쳤냐”
자운의 손에서 황룡이 일어난다. 황룡이 용음(龍音)을 내며 단번에 검수를 항해 돌진했다.
콱-
황룡이 그대로 검수를 깨물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바닥이 갈라지며 검수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죽지는 않았으나 실신했다.
화산에서 자랑하는 매화검수가 단 한 수에 제압당한 것이다.
비록 무공을 펼치기 전이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현격한 실력 차이였다. 눈앞에 있는 황룡문의 자운이라는 젊은이가 생각보다 훨씬 고수라는 말이다.
화랑거사를 포함한 무림인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전, 범혜를 제압했을 때까지만 해도 한 수 재간이 있지만 기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것은 기습이 아니라 압도적인 실력 차이였다.
‘아미타불.’
범혜가 불호를 외웠다.
‘도대체 이 젊은이는 어디 있다가 튀어나온 이란 말인가.’
괴걸왕은 그런 그들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