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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난신-33화 (33/175)

# 33

아니, 창백하게 변했다기보다는 냉담하게 식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방금 말했던 무공, 다시 말해봐.”

“오성락(五星樂) 말씀이십니까?”

자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 앞에.”

“성우적하검(星雨赤霞劍)… 설마……?”

말을 하다 말고 괴걸왕이 단번에 자운의 옆으로 뛰어왔다. 그리고 검상의 자국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한다.

자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단 하나의 검법.

이백 년 전 전장에서 보았던 검법이다. 압도저인 무위를 자랑하던 적의 수괴가 사용하던 검법이다.

물론 그의 사부에게 패했지만, 사부 역시 그를 상대하며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기억이 있다.

자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아니어야 하는데…….’

하지만 무공의 이름을 알고, 기억이 조금씩 떠올려지며 그것은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기에 검법을 알아볼 수 있는 괴걸왕의 표정 역시 좋지 않게 굳어갔다.

그 역시 이 검법을 알아본 것이다.

자운이 고개를 들었다.

괴걸왕 역시 고개를 들어 자운을 바라보았다.

“맞는 거 같네.”

자운이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괴걸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인봉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흘흘흘. 어쩌면… 한차례 피바람이 불겠군요.”

자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선인봉에서 내려온 자운은 단번에 운산과 우천을 찾았다. 그들 역시 갑작스럽게 사라진 자운을 찾고 있었기에 그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대사형?”

자운이 머리를 긁었다.

“아, 별거 아니야. 화산파 구경 좀 하고 왔지.”

운산이 자운을 향해 말한다.

“그러다가 자칫 화산의 금지에라도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지금 화산의 문제가 작은 게 아니라 화산에서도 매우 민감하단 말입니다.”

그들은 자운이 화산의 금지에 들어가는 것을 걱정했으나 자운은 속이 뜨끔했다.

이미 화산의 금지인 선인봉에 들어갔다 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운이 괜히 씨익 웃었다.

“걱정도 팔자다. 아무 걱정 하지 마라. 그럴 리는 없으니까.”

금지에는 들어갔지만 걸릴 일은 없으니까. 자운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지만,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가는 운산이 또 뭐라고 할지 몰라 그럴 일이 없다고 했다.

자운의 말에 운산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이군요. 그보다 검선께 조의는 표하셨습니까?”

자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미쳤냐?”

나보다 족히 백 살은 어린 꼬맹이한테 고개 숙이고 절을 하느냐는 말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자운은 간신히 그것을 찍어 눌렀다.

“검선은 무림의 선배이십니다. 무림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신 선배를 위해서 조의를 표하는 것이 왜 미친 일입니까!”

운산이 소리쳤다.

자운이 고개를 으쓱해 보인다.

“그렇게 평화를 위해서 힘썼기 때문에 사파 따위가 황룡문을 압박하고 있나?”

자운이 고개를 빙글 돌리며 운산에게 물었다.

“많은 무림의 명숙들은 항상 말하곤 하지. 정파무림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힘썼다고.”

자운이 빙글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한 게 뭐가 있지?”

자운이 싱글벙글 웃으며 그들을 바라본다.

주변의 시선이 이상한 눈으로 자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곳은 화산이다.

그리고 많은 무림인들이 화산에 모인 이유, 그것은 조문을 표하기 위해서다.

한데 지금 저자는 노골적으로 검선을 조롱하고 있다.

조롱하고 있는 것은 검선뿐만이 아니다. 그 검선을 품은 화산과 무림의 명숙들을 싸잡아 조롱하고 있다.

무림인 하나가 자운의 어깨를 잡았다.

“소형제, 말이 좀 심한 것 같…….”

자운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이 단번에 튕겨 나간다.

“으악!”

그가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자운이 그를 내려다보다 말고 시선을 옮겼다.

한 번의 소란으로 모든 시선이 자운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틀린 말을 했나. 그래, 좋아 그렇다고 치지. 그럼 너희들은 뭘 했지?”

자운이 좋은 옷을 입고 중후하게 나이가 든 인물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말했다.

“너희가 정파무림을 위해서 뭘 했지?”

한 것은 없다. 명숙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정파무림의 위해서 무언가를 한 적이 있던가?

십오 년 전, 정사대전 이후 그 피해를 복구하기에 급급했다.

정파를 위해서 무언가를 했다기보다는 자문을 위해서 무언가를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너희는 힘이 약해진 문파를 버렸다.”

그중에는 황룡문이 속해 있다. 황룡문 말고도 정사대전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도외시하고 앞장서 싸웠던 문파들이 버려졌다.

몇 개가 망하고 몇 개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그들을 구할 수 있었다. 뒷방에서 뒷짐 지고 있던 너희를 대신해서 앞장서 싸운 문파들이 너희들의 손에 의해 버려졌다.”

주위가 대번에 숙연해졌다.

그 말에 동의하는 문파가 몇 있었던 것. 하나 반대로 반발하는 문파들도 있었다.

“이놈, 젊은 놈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런 망발을!”

누군가가 자운을 향해 소리쳤다.

자운이 손을 뻗었다. 손에서 강력한 경력이 일며 그의 가슴팍을 후려친다.

간단한 한 수에 그가 밀려나 바닥을 굴렀다.

“쿠억!”

“저자는 누구지?”

자운이 바닥을 구르는 인물을 응시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운에게 전해졌다.

“호북 천수문(千手門)의 고대기 장로, 너는 무림을 위해서 무엇을 했나?”

자운이 그를 조롱하듯 웃으며 말했다.

“목숨을 걸고 너희들을 지켜준 문파를 위해 작은 무언가를 해본 이가 여기 있어?”

자운이 콧방귀를 뀌며 좌중을 살핀다.

어느 하나 감히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 자리는 쉽게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사람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화산의 이도 있었고, 소림의 이도 있었다. 꽤 명문대파의 이들이 자운의 모습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그들을 피하기 위해 걸음을 물리는 것이다.

점차 대문파의 인물들은 늘어났다.

제갈세가의 이들도 자운을 알아보았다. 우천과 제갈수가 서로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지금 자운이 하는 일로 인해 대놓고 인사를 하기는 조금 상황이 그랬던 것이다.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자운도 그들을 보고 있었고, 그들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소협, 말이 과한 것 같소이다. 아무리 쌓인 것이 있다지만 이 자리는 무림의 명숙이신 검선께 예를 표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닙니까.”

소림승 중 하나가 보다 못하고 자운을 말렸다. 자운이 고개를 휙 돌려 소림승을 노려본다.

자운이 손을 뻗고 다가갔다.

일 보(一步)와 일 수(一手).

승은 대경하며 뒤로 피하려 했으나, 자운의 손이 기기묘묘한 각도로 꺾어지며 단 한 걸음에 공간이 좁혀진다.

그리고는 그의 승복을 움켜잡았다.

“소림은 무엇을 했지?”

자운의 완력에 승복이 잡힌 승려가 숨을 고르게 쉬지 못하고 캑캑거렸다.

“캑, 캑! 소, 소협, 이걸 좀 놓으시고…….”

뒤에서 바라보던 다른 승려들이 자운의 행동에 분기탱천해 소리쳤다.

“이놈,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하는 말이냐?”

자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 알 게 뭐야. 확실한 건 뭔지 알아?”

자운이 잡고 있던 승려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다. 그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승려는 낙법을 펼치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단순하게 던진 듯 하나 많은 변화와 무리가 숨어 있는 던지기. 주변 인물들의 눈빛이 변했다.

아까 보여준 일 보와 일 수, 그리고 이번에 보인 던지기.

눈앞의 청년은 보통 청년이 아니다.

고수. 비록 기습적이었다고는 하나 소림승을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한 수 재간이 있는 고수다.

“나는 몰라. 검선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무림을 위해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희생했는지. 폐관에 들어 있었으니까.”

무려 이백 년 동안 폐관에 들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이번에 좀 들은 소문이 많아.”

정보를 알게 된 것은 하오문을 통해서였다. 십오 년 전 일어난 정사대전. 사실 그것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된 것은 간단한 호기심에서였다.

당시 황룡문주가 사도천주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기에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한데 전후의 일이 가관이었다. 어찌 된 것인지 앞장서서 싸웠던 문파들이 하나둘씩 망해가기 시작했다.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던 문파가 분명한데 망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괴걸왕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이상한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문파들이 과거 이백 년 전 적성을 막아내는 데 힘을 보탠 문파들인 것이다.

그들의 절기가, 그들의 무공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화산에 나타난 적성의 흔적, 이것을 모두 우연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분노가 치솟았다.

아무리 자신들의 문파를 복구하는 것이 시급했다 하더라도 같은 정파끼리, 대의를 논하는 정파라면 한 번쯤 신경을 써줄 수도 있지 않았는가?

“무관심 속에서 그들이 죽어갔다.”

자운이 걸음을 저벅 내디뎠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갈라지고, 자운의 족적이 바닥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끝을 알 수 없는 방대한 내공이 그의 몸에서 치밀어 오른다.

자운이 무림의 대문파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무림의 신성? 무림의 구세주? 과연 정파의 대문파들이 그런 이름을 달 자격이 있는가?”

자운의 몸에서 솟구친 기세가 하늘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화산의 하늘에 자운의 기운이 내려섰다.

모든 것을 짓눌러 버릴 정도로 강한 기운, 패도적인 기운이 천지사방을 눌러 내린다.

“그들이 사라질 동안 소림은 무엇을 했지? 화산은 무엇을 했지? 무당은 무엇을 했지?”

자운이 말을 해보라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운을 말리려던 소림승이 자운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이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무당 역시 무량수불을 조용히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화산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물론 자신들이 주변의 작은 방파에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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