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그제야 자운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온다.
“사조?”
그러고 보니 공우는 이백 년 전의 사람이 아닌가. 지금 살아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사손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다.
단지 과거의 흔적을 만난 것이 너무 반가워 흥분했다. 자운답지 못했다.
“공우가 네 사조라는 말이지?”
그제야 괴걸왕도 무언가 이사하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한다. 공우라 함은 괴걸왕의 사조일 뿐만 아니라 개방의 방주였던 인물이다. 당금 무림에서 그 누구도 저렇게 친근하게 공우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있다면 미친놈이거나.
‘반로환동.’
괴걸왕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그냥 미친놈이었으면 좋겠다. 눈앞의 이 사람이 반로환동을 한 사람이고, 정말 공우 사조와 친분이 있다면 자신은 배분이 몇 배나 높은 사람한테 까분 격이 되는 것이다.
기사멸조의 대죄까지는 아니지만, 무림의 배분으로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제발 저놈이 미친놈이기를…….’
그럼 자신의 사조를 능멸한 죄로 단번에 처죽일 수 있다. 왜 이리 계속 입안에는 침이 고이는지……. 침을 삼키다 말고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반로환동했냐고 물었을 때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거라고 답한 것이다.
이젠 괴걸왕이 두 손을 꼬옥 말아 쥐었다.
‘젠장.’
그냥 미친놈이어라. 그냥 미친놈이어라. 그냥 미친놈이어라. 그냥 미친놈이어라.
그렇게 속으로 주문을 걸다 문득 자신의 생각을 입으로 말해 버렸다.
“미친놈.”
그것도 앞뒤를 다 잘라먹고 말이다. 미친놈이라는 말에 자운이 물끄러미 괴걸왕을 바라보았다.
“죽을래?”
제5장
무너져 내린 빙궁의 잔해 위에서 여인이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신을 타고 북해의 바람이 몸속으로 흘러든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
북해의 바닥은 춥고 시리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한기가 흘러들어 올 것이 분명하다.
한데 여인은 너무도 편하게 그 위를 딛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흉내도차 낼 수 없다.
빙공(氷功), 그것도 극상품(極上品)에 속하는 빙공을 일정 수준으로 익혀야만 가능한 경지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고 움직였다.
마치 여기는 어디일까 하고 생각하는 모습. 그의 동공이 천천히 빙궁의 터를 응시한다.
기억에 익은 곳인데 너무 다르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다.
이곳은 그녀의 대지다.
이곳은 그녀이 집이다.
이곳은 그녀의 궁이다.
이곳은 그녀의 빙궁이었다.
그것을 분명히 잘 알고 있는데 어찌해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빙궁의 소궁주였다. 그리고 잠에서 일어났더니 빙궁이 이런 모습이 되어 있다.
빙궁이 무너진 모습을 보면 분노든 뭐든 간에 알 수 없는 감각이 생겨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그것을 느낄 수가 없다.
왜일까?
또 짧은 시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빙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감정을 느낄 누군가가 빙궁을 몰락시켰다면 그 대상이 누군지 알아야 분노를 느낄 것이 아닌가.
또한 내분으로 빙궁이 스스로 멸문한 것이라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야 감정을 느낄 것이 아닌가.
온갖 감정이 존재했지만, 감정은 향해야 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빙궁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섬서로 가거라.”
섬서로 가서 어느 문파를 찾으라고 했다. 그들은 빙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니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 몇 번인가 그 문파에 가본 기억이 있다.
물론 자신 또래의 친분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장난기 많지만 무학에 있어서만큼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사람. 그 사람은 말없는 자신의 곁에 와서 시시덕거리며 자신의 장난질을 늘어놓기를 좋아했다.
문득 감정이 치솟았다.
그 사람을 다시 보고 싶다.
왜일까?
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빙궁의 빈터를 보며 그런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의지하고 싶어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의지하고 싶어서?
아무래도 섬서로 가보아야 할 것 같다.
그녀가 천천히 어미의 입에서 나왔던 문파의 이름을 곱씹었다.
‘황룡문.’
그리고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사내의 이름도 곱씹었다.
‘자운.’
그녀의 걸음이 섬서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백 년 전 멸문한 북해빙궁의 소궁주, 그녀의 걸음이 중원을 향했다.
* * *
괴걸왕을 이해시키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을 걸렸고,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공우와 막역한 사이가 아니라면 잘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꺼내놓기도 했다.
또한 공우가 당시 만들어가던 무공들에 관한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지금 괴걸왕이 사용한 뇌전의 힘이 담긴 장법은 자운이 직접 실험 대상이 되었던 무공이기도 하다. 당시 화끈하고 찌릿한 감각이 온몸을 휩쓸어 삼 일을 끙긍 앓은 기억도 있다.
공우라는 놈은 미안하답시도 구걸한 밥을 자운에게 먹이려 해 자운이 그릇을 뒤집어 버리기도 했다.
사실 자운 스스로가 생각해 보아도 이백 년 전의 인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자운 스스로도 현재 상황이 납득이 안 되니 타인이야 두말 할 것도 없다.
지금도 괴걸왕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자운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러니까, 당신이 정말 사조께서 말하시던 그분이라는 말… 이오?”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의 말에 괴걸왕이 웃음도 한숨도 아닌 이상한 것을 흘린다.
“허어, 흘흘, 노부는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소.”
자운이 손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지금 내 앞에서 노부 소리가 나오냐? 이제 백 살 좀 넘은게.”
자운의 말에 괴걸왕이 침묵했다. 자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자운의 나이는 지금 괴걸왕의 두 배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반로환동이든 그 비슷한 거든 저 얼굴로 이백이 넘은 나이라니…….
그가 자운을 향해 물었다.
“그럼 저는… 앞으로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겠소?”
자운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글세… 뭘고 불러야 하나.”
자운도 문제고 괴걸왕에게도 문제다. 생각에 잠겨 있던 자운이 곧 해결책을 내놓았다.
“대고수 선배님이라고 불러.”
“흘흘. 거절하오.”
괴걸왕이 단박에 거절했다.
“그럼 개새무적 고수 선생님이라고 불러.”
“흘흘흘흘.”
이번에도 말 대신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는 곧 타협책을 내놓았다.
“사석에서는 선배님이라 부르겠소.”
“공석에서는 네 체면도 있으니 적당히 타협을 보자는 거군.”
자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괴걸왕도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흘흘흘. 나도 무림에서 체면이 있고 하니 공석에서는… 음…….”
“황룡문주, 혹은 천 문주라고 부르면 되겠지.”
“그렇게 하겠소.”
“단, 조건이 있어.”
자운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가 그렇게 웃자 괴걸왕은 괜스레 속이 불안해진다.
“흘흘. 뭐요?”
“공석에서는 반존대나 뭐 대충 네가 알아서 해도 되고, 사석에서는 존대해라.”
자운의 말에 괴걸왕이 눈을 감았다.
“눈 감는다고 말이 안 들리냐?”
“흘흘. 귀도 감을 거요.”
“존댓말 하라고.”
자운의 말에 침묵하는 괴걸왕. 걸왕이 눈을 감고 침묵하고 있자 자운이 손을 뻗었다. 자운의 손이 대번에 괴걸왕의 이마를 빠악 후려친다.
살기와 기운이 전혀 담기지 않은, 순수한 완력만으로 후려친 것이라 괴걸왕도 반응할 수 없었다.
“캐액!”
괴걸왕이 뒤로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이 백이 넘어서 이마를 맞으니 죽을 만큼 기분이 나쁘다.
“이게 뭐하는 짓이오!”
“존댓말 하라고”
“홀홀홀. 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왜. 귀여운 후배 이마 좀 때렸다. 불만 있냐?”
괴걸왕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저건 미친놈이다.’
“끙.”
괴걸왕과 함께 선인봉을 살펴보던 자운이 선인봉에 나 있는 자국을 보며 말했다.
“이거 무슨 검법 같아?”
괴걸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저도 잘 모르겠군… 요. 무언가 묵직한 게 떨어진 흔적 같은데…….”
“아까도 봤다시피 이건 검상으로 생긴 거지. 묵직한 검격으로 이런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검법, 혹시 아는 거 있어?”
개방은 정보력을 놓고 비교하자면 하오문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문파다. 그런 개방의 정보력대로라면 이런 무공이 몇 개 정도는 나올 것이다.
그의 말에 괴걸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개방의 정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그는 이러한 검법에 대한 정보를 몇 개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무림 사상 최악이라 불린 마공도 있었으며, 지금 이름을 날리는 고수가 사용하는 것도 있었다.
“묵직하면서도 넓은 범위를 자랑하는 검법이라면 칠성문(七成門)의 탐랑검(貪狼劍)도 있고, 지금은 사라진 천검곡(千劍谷)의 폭성검(爆聲劍)도 있지요. 삼백 년 전 하남에서 이름을 날리던 성천자(星天子)의 백이은하검로(白二銀河劍路)도 이런 흔적을 만들 수 있겠고…….”
괴걸왕이 몇 가지 무공을 주르륵 내놓았다. 그 무공들은 자운 역시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간간히 자운이 알지 못하는 무공 몇 개가 흘러나와 자세히 묻기는 했다.
하지만 자운의 판단에 그것들로는 이러한 문양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을 계속해서 듣는 와중에도 자운은 선인봉이 새겨진 검상을 살폈다.
아무리 보아도 안면이 있는 무공인 듯했다.
생각이 날 듯 말 듯한데 정확하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유성…….’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 긴 꼬리를 그리는 유성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괴걸왕이 말한 무공이 자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잠깐.”
한참 무공을 떠벌리는 괴걸왕의 입을 자운이 멈추었다.
“흘흘. 왜 그러십니… 까?”
아직까지 존댓말이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괴걸왕이 조금 뜸을 들이기는 했으나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자운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