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 * *
우천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우천은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통증에 가슴을 쥐었다.
"윽."
그런 우천을 향해 자운이 피식거렸다.
"일어났냐?"
우천이 자운을 향해 묻는다.
"비무는, 비무는 어찌 되었습니까?"
"제갈가 꼬맹이 놈, 팔 한 짝 부러뜨리기는 했는데 네가 졌어."
졌다는 말에 우천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사실 자운도 우천을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실전이었으면 분명 우천이 이겼을 것이다. 제갈가의 놈은 자운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농락만 당하다가 마지막에 한 방 먹이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꼴이다.
우습지 않은가?
명문이라는 놈들이 이제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우천에게 패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분해할까.
그것은 따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자운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으며 가슴팍을 움켜쥔 운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못해 한마디 던졌다.
"뭐 그래도 잘했다."
휘익― 휘리릭―
검이 연달아 허공을 갈랐다. 운산이 휘두르는 검. 검이 허공에 연달아 궤적을 그린다. 우천의 비무를 바라본 지금, 운산은 몸이 후끈하게 달아올라 쉬이 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논검비무에서 향상시킨 정신력으로 자신의 앞에 제갈수를 투영시켰다.
과연 자신이 우천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찌했을까?
그리 생각하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자신은 우천과 같은 기교가 없다. 그 점은 알고 있다. 검의 기교를 갈고 닦는 것에 있어서 우천은 그야말로 천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본이 뒤지는 것은 아니었다.
검술의 정교함과 기본은 오히려 운산이 앞섰다. 운산이 천천히 제갈수를 상대했다.
한창 검을 휘두르고, 마침내 그가 검을 멈추었다.
허공중에 검이 멈춘다.
운산의 검이 멈춘 그곳, 그곳은 건장한 성인 남성의 목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검을 멈춘 그가 피곤이 가득한 숨을 뱉었다.
"이겼다."
뒤를 이어 기쁨에 가득 찬 말이 튀어나왔다.
"뭘 이겼다는 말인가요?"
갑자기 들려온 말에 운산이 깜짝 놀랐다. 검을 휘두르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 운산이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차갑고 냉담해 보이는 얼굴, 미소만 있다면 분명 아름다워 보일 얼굴인데 전혀 표정이 없다. 그래서 특이하다.
아름다운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얼굴. 제갈수의 동생인 제갈수련이었다.
"제갈수련 소저셨군요."
운산이 포권을 취해 보였다. 운산의 포권에 제갈수련은 말없이 운산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표정없는 얼굴이 눈앞에 드러나고, 그녀의 얼굴에 운산이 찔끔했다. 지금까지 여자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운산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제갈수련이 한 걸음 다가왔다.
"편하게 수련이라고 불러요."
달콤했으면 좋을 말이건만, 표정과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다.
정교하게 나무로 깎은 인형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느낌. 생소한 느낌에 운산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답했다.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싫으면 말고요."
그리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제갈 소저, 이러면 옷이 더러워집니다."
운산의 말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별이 떠올라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 하늘에 별들이 드러난다.
"괜찮아요. 새로 사면 되요."
여전히 감정없는 표정과 목소리가 이제는 웃기기까지 한다. 운산은 실소와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와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객잔 창문으로 바라보는 자운이 중얼거렸다.
"얼씨구, 저기는 연애하네? 잘한다, 잘해."
운산과 제갈수련이 무어라 이야기를 나눈다. 잘 들리지 않고 딱히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지라 탁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아버렸다.
그 소리에 우천이 자운을 향해 물었다.
"대사형, 왜 그래요?"
자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가슴에 대못이 박혀서……."
자운은……,
혼자다.
"젠장.“
제4장
제갈운과는 객잔을 나서면서 헤어졌다. 목적지가 같은 화산인 만큼 함께 동행을 해도 나쁠 것은 없었지만 어제의 일로인해 그러기는 조금 불편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제갈수련은 객잔을 나서며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무표정하고 무감각한 얼굴로 운산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쯤되면 불편해지는 것은 운산이라 도중에 얼굴을 틀어버렸고, 우천은 제갈수가 객잔을 떠나기 전 마지막에 남긴 말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다.
'다음에는 지지 않을 것입니다.'
앞뒤가 이상했다.
"대사형, 정말 제가 졌습니까?"
자운의 손이 휙 하고 휘둘러져 단번에 그의 머리통을 후려친다.
빠악―
"그럼 네가 왜 기절했겠냐? 응?"
"하지만 제갈 소협이 마지막에……."
제갈수는 우천을 향해 분명 다음에는 지지 않겠다고 했다. 다음에는 지지 않겠다니?
그럼 이번에는 졌다는 말인가?
자운이 아무렇게나 손을 흔들었다. 귀찮다는 듯 말하는 행동, 그리고 별거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팔 한 짝으로 적당히 합의봤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그 일은 언급하지 말라는 듯 자운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화산이었다.
염호명은 죽기 직전 화산으로 가보라고 했다.
왜?
그것이 매화검선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까?
매화검선의 죽음이 관련이 있다면 화산은 황룡문과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황룡문은 매화검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처리해야 할 가치가 없으니까.
아쉽게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왜?
왜 그는 화산으로 가보라고 한 것일까?
자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번 일로 인해서 천하의 무림의 모든 시선이 화산으로 향했다.
또한 무림의 많은 명사들 역시 화산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과 염호명이 말한 것에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자운이 이마를 꾹 눌렀다.
"하아, 머리 아프네."
지금으로써는 손에 쥐고 추측할 거리가 전혀 없다.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말 그대로 추측으로 끝날 뿐, 어느 정도 신뢰성 있는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데 그것을 해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검선이 습격당한 것과 죽은 것이 우연일 거라는 생각은 쉬이 들지 않는다.
검선이 명을 다한 틈을 타서 흑령문이 황룡문을 습격한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뿐더러 무림에 우연은 없었다.
아마도 검선의 죽음이 흑령문 배후의 본래 목적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겸하여 화산으로 무림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서 황룡문을 밀어버리려 한 것이다.
그들이 황룡문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단 화산으로 가보는 수밖에."
그들이 화산에 도착한 것은 점심 무렵이 조금 넘어서였다.
화산의 산문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 앞에 화산의 제자로 보이는 도사 몇이 빠르게 방문객들의 신원을 옮겨 적고 있었다.
그 차례가 통과되어야 비로소 화산으로 입장할 수 있는 것이다.
자운은 배첩을 간단하게 보여준 후 자신들의 차례가 올 때 까지 기다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화산의 모습을 보니 과거 황룡문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이백 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과거 섬서 내에서 화산과 견줄 만한 유일한 문파였지 않은가.
섬서에 있는 두 개의 검문이라 하여 섬서이문(陝西二門)이라고까지 불리기도 했다. 한데 한쪽은 그 위세를 더한 반면, 다른 한쪽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폭삭 망해 버렸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자운의 차례가 돌아왔다.
형식적인 절차를 마치고 화산의 산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화산의 산문 내부에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검선에 대한 조의를 표하기 위해 각 곳에서 모여든 이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화산의 제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운산과 우천이 그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반면에 자운은 전혀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자운이 향하는 곳은 선인봉이었다. 얼마 전 검선이 당한 불미스러운 사태 이후 선인봉은 화산의 금지가 되었다.
그렇기에 훈련된 매화검수 두셋이 선인봉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들의 눈을 속이는 것은 자운에게 있어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매화 가지가 자운의 뺨을 휙휙 스쳤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귓가로 윙윙하고 울리고, 자운의 하체가 산을 타는 그 자세에서 상체는 흐릿하게 흔들렸다.
단번에 눈앞을 막아서는 매화 가지를 피해내고 자운의 몸이 솟구쳤다. 몇 장의 땅이 순식간에 좁혀지고, 자운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선인봉을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곧 자운의 몸이 선인봉의 정상에 도달하고, 몸이 높게 날았다.
선인봉 위를 가볍게 날며 선인봉 전체에 새겨진 균열을 읽어 내린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의 균열이 마치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지금 선인봉을 내려친 힘의 삼 할, 아니, 이 할만 힘이 더 가해졌어도 선인봉은 뭐져 내렸을 것이다.
자운이 휘익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선인봉이 무너지면 화산이 위험해진다. 무너지는 선인봉에 깔려 모든 건물이 박살 날 것이다.
바닥에 내려선 자운이 선인봉의 정상에 간 균열을 손으로 훑었다.
얼핏 보면 둔탁하고 육중한 무언가로 내려쳐서 만든 균열인 듯싶으나 이것은 확실한 검상이다. 자운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창?
그리고는 검을 아무렇게나 휘두른다. 허공에 검영이 얽혀들고, 자운이 검을 내리긋자 검영이 그대로 아래로 향했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선인봉의 한구석에 작은 균열이 생겨난다.
크기는 달랐지만 분명 거미줄 형식의 검상. 선인봉 전체에 넓게 새겨진 것과 동일한 형태였다.
이것으로 확실해지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육중한 둔기가 아니더라도 검으로도 충분히 이러한 형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자운은 만족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하고 움직였다.
"역시 검상만으로는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