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제1장
잠에서 깨어난 자운이 늘어져라 기지개를 폈다. 온몸에서 우두둑 하며 뼈 소리가 나고, 자운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침상을 털고 일어났다.
“으아!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잠이 보약이라는 말,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몇 끼나 안 먹은 거지?”
자운이 처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깔리지는 않았으나 붉은 노을 너머로 어둠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 저녁때. 아침에 돌아왔으니 두 끼를 굶은 것이다.
자운이 자신의 배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아, 두 끼나 굶었다. 배고프다.”
그리고는 코를 벌름거려 냄새를 맡았다.
“밥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밥 준비를 하고 있는가 보구나.”
자운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가 처소를 벗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자, 밥 먹기 전에 그럼 우리 꼬맹이 두 놈이 뭘 하는지나 알아볼까?”
그 시각, 우천과 운산은 논검 비무를 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내공 수련을 하고, 점심때는 검술 수련을 한다. 그리고 저녁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논검 비무를 하며 무공을 훈련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논검 비무는 자운이 하도록 한 것이다. 논검 비무의 의념 수련에 앞서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검술이라는 것이 연습만으로 되는 게 아닌 만큼 실전 경험이 필요하다.
실전이라는 것은 비무와 달라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의념 수련이었는데, 그것은 고도의 집중력과 상대를 자신의 앞으로 불러낼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리 논검 비무로써 기초를 다지는 것이다.
“전 이렇게 공격하겠습니다.”
우천이 황룡문의 초식 하나를 백지 위에 주욱 그었다. 먹선이 생겨나고, 그 먹 선은 그대로 운산을 찔러들어 갔다.
운산이 붓을 받았다.
“난 그럼 이렇게 하지.”
그가 붓을 주르륵 그었다. 방어를 위한 초식이 선행되고, 뒤이어 몸을 틀면서 그대로 먹 선이 우천을 향했다.
방어 후 공격으로 전환한 것. 공세의 갑작스러운 전환에 우천이 붓을 받으며 생각에 빠졌다.
“으음.”
쉬이 이 상황을 빠져나올 방법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공격을 하자니 운산은 언제든 방어로 돌아갈 수 있는 경로를 취했다. 피하자니 변초가 올 것이다.
그렇다고 막아내려고 해도 마땅한 초식이 없다.
우천이 한숨을 쉬며 붓을 내려놓았다.
“하아, 제가 졌습니다.”
그가 붓을 내려놓는 순간, 우천의 붓을 빼앗아 드는 사람이 있었다.
“나라면 이렇게 하지.”
대번에 붓을 종이 위에 휘갈긴다. 한데 그 초식이 엉성하기 그지없다.
방어를 위한 초식을 펼쳤는데 엉성함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치명상은 피하더라도 몸에 상처를 입는 것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대사형!”
운산이 자운을 보고 소리쳤다. 운산의 말에 자운이 웃었다.
우천은 자운이 그린 검로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우천의 말에 운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먹이 묻은 붓으로 우천의 몸에 선을 그어내리기 시작한다.
팔과 다리에 순식간에 생겨나는 먹 선. 그 먹 선을 보고는 자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식간에 이런 칼자국이 생기겠지.”
그렇다. 자운이 지금 그린 것은 칼자국이었다. 그것도 자운이 그린 초식을 펼쳤을 때 생겨나는 칼자국. 그것을 알면서도 이런 초식을 권했다는 말인가?
우천이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자운이 손으로 우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놈아, 논검 비무라고 해서 내가 진짜 비무처럼 하라고 했냐, 실전처럼 하라고 했지? 실전에서는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거나 피할 생각을 하지 마라.”
자운이 종이를 북북 찢었다.
“지금 너희가 한 건 실전이 아니야.”
말 그대로 비무일 뿐이다.
“따라 나와. 내가 실전 비슷한 걸 조금만 보여주지.”
자운이 그들을 이끌고 간 곳은 시장이었다. 시장 특유의 냄새가 물씬 밀려왔다. 색색들이 옷을 차려입고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며 공연을 하는 곳도 있었고, 잡다하게 물건을 파는 곳도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있었으며, 가격 흥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심지어는 재주를 부리는 곰도 있었다. 흥미를 잡아끄는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자운은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평소라면 한 번쯤 물끄러미 바라보다 갈 만한데 그냥 지나친 것이다.
운산과 우천은 자운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어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긴 지 일각. 자운이 걸음을 멈춰 선 곳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자운이 앞장서서 길을 열었고, 우천과 운산이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자운을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자운의 걸음이 뚝 멈췄다.
으르릉―
동물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자운은 그 동물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철창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동물. 자운의 시선이 흔들림없이 둘을 향했다. 무언가 하고 보던 운산이 그것의 정체를 말했다.
“투견… 아닙니까?”
그의 말에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마리의 투견은 서로를 노려보며 위협을 하고 있었다. 하나 둘 다 쉽게 달려들지 않는다. 서로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을 만한 틈을 찾지 못한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둘이 움직이지 않자 주변의 사람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도 잠시, 먼저 움직인 것은 흑견(黑犬)이었다. 흑견이 침을 흘리며 백견(白犬)을 향해 다가갔다.
덩치로 보아 흑견이 조금 더 거대하고 근육이 탄탄했다.
많은 사람들은 흑견의 승리를 점치고 흑견에 돈을 걸었다.
흑견이 다가가자 백견이 조금씩 물러서기 시작한다. 기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한 흑견이 고개를 들고 백견을 향해 질주했다.
크르릉―
대번에 뛰어올라 백견의 목을 노리는 흑견. 백견이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흑견의 이빨을 피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것을 알기라도 했다는 듯 흑견이 곰과 같이 큰 발을 들어 백견을 내려쳤다.
캐엥―
그 발에 맞은 백견이 뒤로 미끄러졌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지지 않겠다는 의지. 그 의지가 백견의 조금 작은 체격에서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흑견의 우세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 사이에서 자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누가 이길 거 같으냐?”
우천과 운산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물음에 둘이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봐도 흑견의 우세다. 당연히 흑견이 이길 것이다.
운산이 말했다.
“덩치나 힘으로 보아 검은 개가 이길 거 같습니다.”
자운이 고개를 돌려 우천을 바라보았다.
“너는?”
“저도 흑견이 이길 거 같은데요?”
그 말에 자운이 씨익 웃었다.
“과연 그럴까?”
“대사형은 백견이 이긴다는 말씀이십니까?”
운산의 말에 자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글세, 그거야 두고 봐야 알 수 있지.”
자운의 눈이 계속해서 흑견과 백견을 쫓았다. 자운의 시선이 다시 투견장을 향하고 답이 없자 운산과 우천도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투견장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흑견의 우세는 확실해져 가고 있었다. 확실히 숨통을 끊어놓을 만한 상처는 없었으나, 조금씩 착실하게 승리의 조건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 사람들의 환성이 더욱 강해졌다.
적으나마 백견에게 돈을 걸었던 사람들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백견을 욕하기 시작했다. 백견이 으르렁거리면서도 도통 힘을 쓰는 것을 보지 못한 탓이다.
얼마나 그렇게 대치 상태가 이어졌을까?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시종일관 물러서고 공격을 피하며 방어만 하던 녀석이 이빨을 흑견의 목에 박아 넣은 것이다.
크라앙―
흑견이 목을 흔들었으나 백견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흑견의 목에서는 이미 피가 꿀렁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흑견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법. 흑견이 계속해서 고개를 흔들며 투견장 내부를 질주하고, 놈이 몸을 쾅 하고 철창에 들이 박았다.
한순간 철창이 출렁하며 흑견의 함과 철창 사이에 끼인 백견이 나가떨어졌다.
캐앵―
다시 거리가 벌어지고, 둘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제 알겠냐?”
자운의 말에 우천과 운산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운이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저 두 마리의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 거냐?”
물론 느끼고 있다. 개치고는 거대한 살기. 그 살기 때문에 침까지 삼키며 손에 땀이 나도록 긴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한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둘을 보며 자운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에휴, 너넨 검은 놈이 이긴다고 했지만, 지금 보면 치명상은 하얀 놈이 먹였지. 이걸 어떻게 생각해?”
“잘 모르겠습니다.”
운산이 그렇게 말했고, 우천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자운이 우천의 머리를 때릴 듯 손을 들었다.
“이게 지금까지 그거 말하려고 생각했냐.”
단번에 자운의 꿀밤이 날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움찔한 우천.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우천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반만 맞았다.”
자운이 다시 개 두 마리를 내려다보았다.
“숨을 죽이며 기회를 노렸지만 놈은 숨지 않았어.”
숨고 패배를 인정했다면 예전에 배를 보이며 복종의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얀 놈은 그러지 않았다.
계속 피하고 도망칠망정 숨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아냐?”
둘은 답을 하지 않았다.
“저 하얀 놈, 저놈은 도망가면서도 저 검은 놈을 죽일 방법을 생각했던 거야. 살기, 살의(殺意)라고 하지.”
운산과 우천이 말이 없자 자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죽일까,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기를 속으로 품었을 거다. 그 살기가, 그 살의가 독이 될 때까지, 칼이 될 때까지, 단번에 치명상으로 몰고 가고 심하면 절명까지 시킬 수 있는 독과 칼이 될 때까지 그걸 품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