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룡난신-25화 (25/175)

# 25

자운은 이백 년 전 전장을 경험한 적이 있다. 처절한 무림의 전장에서 그는 냉혹해졌고, 칼에 자비를 담지 않게 되었다. 황룡문을 위해서라면 지금과 같은 일을 수십 번이고 더 해줄 수 있다.

심장이 뒤틀어지는 고통을 참지 못한 염호명이 덜리는 입술을 열었다.

입술이 열리자 그의 입에서 피가 왈칵왈칵 흘러내린다.

“화, 화산흐로 카, 카라”

그 말을 끝으로 염호명의 고개가 거꾸러졌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것이다.

하지만 자운의 시선은 이미 염호명을 떠나 있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 높게 뜬 달을 바라보았다.

“화산이라…….”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단어는 분명히 알아 들었다.

화산!!

자운이 허리춤의 검을 움켜쥐었다.

만약 누군가가 황룡문을 누르려 한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천이든 만이든 지금 쥐고 있는 이 칼로 베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루어낼 것이다, 천하제일문이라는 스승과 대사형의 꿈을.

검을 쥔 자운의 손 가득 힘이 들어갔다.

‘필요하다면 화산을 뒤집어서라도.’

* * *

아침 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아왔다. 유난히도 길게만 느껴졌던 밤이 가고 해가 뜨며, 햇살이 길게 뻗쳤다.

긴 꼬리를 그리는 햇살이 산속 여기저기로 퍼져 나가고, 그 사이로 약초꾼 만씨가 산을 탔다.

본래 약초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로 난다. 당연히 약초꾼이 다니는 길도 사람들이 잘 다니는 길일 리가 없었다. 그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길이 나 있지 않은 산을 타고 올랐다.

“오늘은 일진이 나쁜 건가.”

산을 타던 만씨가 한숨을 토했다.

주변의 약초꾼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미신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새벽 시간에 약초가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딱히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미신이었다. 하지만 이런 직업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런 미신에도 민감하게 마련이었고, 만씨는 항상 새벽에 일어나 산을 타며 생업을 하였다.

실제로도 그 미신 때문인지 새벽에는 하루에 발견하는 약초의 절반 이상을 채집하고 있다.

망태기의 절반 정도는 새벽에 채우는 것이다.

만씨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망태기를 바라보았다. 고작 두 개, 주먹만 한 풀뿌리가 망태기 속에서 처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만씨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는 능숙하게 주변을 타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이쯤이면 약초가 있을 법한데…….”

본래 가던 길에서 유난히도 약초가 보이지 않자 만씨는 방향을 틀었다. 약초도 캐지지 않으니 오늘은 새로운 노선을 하나 파볼까 했던 것이다.

산속에서 얼마나 몸을 움직였을까.

산행이 익숙한 만씨의 몸에서도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해는 어느새 새벽을 넘어 아침이 끝나가고 있었고, 이제 그만 작업을 끝내고 내려가 오늘 캔 약초를 모두 정리해야 할 것이다.

노선을 바꾸고 나서야 약초를 몇 뿌리 더 캐었다. 평소 작업량에 비하면 반도 되지 않을 양이었으나 값이 나가는 약초가 하나 있었기에 하루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듯했다.

만씨가 허리를 쭈욱 폈다.

“후우. 우리 딸 노리개도 하나 해줘야 하는데.”

얼마 전부터 몸치장에 관심을 가지게 된 딸이 계속 노리개를 사달라고 조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벌어서는 노리개는 당분간 무리일 듯하다.

허리를 핀 만씨의 콧가로 특이한 냄새가 풍긴다.

“이게 무슨 냄새지?”

만씨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쫓는 만씨, 산의 흙냄새에 섞여 비릿한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본래 비릿한 내음이라면 생선에서 나는 것이나 이곳은 산, 생선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만씨는 얼마 전 거래를 하는 의원에게서 들었던 희귀한 약초들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가 쾌재를 부르며 소리쳤다.

“옳거니! 비싼 약재 중 특이한 냄새를 풍기는 게 있다고 했지. 심봤구나!”

특이한 냄새가 나는 약초 중에는 부르는 게 값인 약초들도 있었고, 또한 그런 약초일수록 자기 보호를 위해 역한 냄새를 풍긴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가 하늘을 향해 쾌재를 부르며 계속해서 냄새를 쫓았다. 이걸 찾으면 딸이 원하는 노리개 하나쯤은 사주고도 저녁상에 고기반찬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딸의 환한 미소와 고기반찬을 떠올린 그는 지치는 줄도 모르고 산을 탔다.

한데 비릿한 냄새가 쫓을수록 역하게 변한다.

“킁킁. 도대체 무슨 약초이길래 이렇게 냄새가 역한 거지?”

그가 코를 찡긋거리며 수풀을 들쳤다.

“이거 시체 냄새 같기도 하…….”

수풀을 넘긴 만씨의 몸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가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흐아……. 흐아……!”

눈앞에 벌어진 참상, 그것은 그야말로 지옥도였다.

한편의 지옥이 만씨의 눈앞에 펼쳐지고, 그 끔찍한 광경에 입이 굳고 다리가 얼었다.

공포심이 올라오면 뒷걸음질이라도 쳐야 하는 것인데, 수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럴 공포심마저 얼어버렸다.

비명을 지를 입마저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시체에 눈이 고정되어 한참을 헐떡일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춤거리던 그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조금씩 뒤로 걸어 내려가던 그가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콰당탕-

그가 비탈을 굴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비명을 지르며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 * *

유유히 황룡문으로 돌아온 자운을 맞은 것은 총관이었다.

총관이 자운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자운의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자운이 상처라도 입었는지 살피는 것이다.

자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자운도 알고 있다.

‘얼마든지 알아가 봐라.’

자운이 총관을 보고 고소를 지었다. 총관은 황룡문의 총관 일을 하고는 있으나 하오문의 사람이다. 자운의 무력이 얼마인지 파악해 하오문에 전하려 하는 것, 그럴 줄 알고 자운은 몸에 흙을 묻히고 일부러 옷을 찢었다.

상처 입은 곳은 없으나 옷을 찢어 격전을 겪은 것처럼 만든 것이다.

금전을 녹이는 모습을 확인한 취록은 처음에는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금전을 녹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력이 많은 것이지 무공이 뛰어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공이 무공의 경지와 관련이 있다고 하나 그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총관에게 자운의 정확한 무위를 알아오라 명한 것이다.

그리고 총관은, 자운의 생각대로 이 일을 그대로 하오문에 전할 것이다.

자운이 자신을 살피는 총관을 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자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다는 것을 느낀 총관이 황급하게 고개를 다시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문주님.”

어디까지나 문주 대리지만, 호칭은 문주다.

그의 말에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밤새 쥐새끼처럼 숨어 다녔더니 좀 피곤하네.”

쥐새끼라는 말에 총관이 눈을 반짝였다. 자운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기 때문에, 총관은 자운이 무의식적으로 정보를 흘린 것으로 판단했다.

‘정면으로 충돌한 게 아니라 암습으로 충돌했구나.’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정면충돌도 있었고 암습도 있었지만, 모두 자운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총관 역시 자운의 손바닥 위에 있다.

자운이 피식 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기지개를 폈다.

“무탈하신 모습을 보니 다행입니다.”

자운이 자신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눈 아래로 짙게 드리운 음영, 정말로 자운이 피곤한 듯 보인다.

“총관은 이게 무탈해 보이나. 잠이 오잖아, 잠이.”

그의 말에 총관이 웃었다.

“문주님 같은 고수가 하루 안 잔다고 해서 쓰러질 리가 없지요.”

자운이 손을 흔들었다.

“헛소리 하지 말라 그래. 잠이 보약이라고. 영약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으니까, 난 지금 잠만 자면 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처소로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자운의 처소에서는 벼락이 치는 듯 코 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운의 코 고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지자 총관은 황룡문에서 빠져나가 하오문으로 향했다.

정보를 전해주러 가는 것이다.

기운으로 그것을 느끼고 있던 자운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해라. 나는 나를 숨길수록 너네를 이용해 먹는 기간이 길어지겠지.’

그것이 황룡문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오문은 황룡문의 정보줄, 따로 정보 조직을 만든 후에도 이 줄은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자운이 침상에 머리를 묻었다.

이제 정말 조금…….

‘자야겠다.’

* * *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일 년이 눈으로 뒤덮인 곳, 북풍한설과 같이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사방 천지를 뒤덮고, 오로지 눈만이 가득 쌓인 곳, 중원에서는 그곳을 북해(北海)라 부른다.

과거에는 북해빙궁(北海氷宮)이라는 곳이 있어 성세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예전의 일. 빙궁의 터에는 옛 성터만이 남아 쓸쓸하게 적막감을 만들고 있었다.

퍼석―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터의 깊은 곳, 눈으로 볼 수 없는 지하에서 들려온 소리였으나, 주변이 너무도 적막했기에 그 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퍼석― 퍼석―

계속해서 소리가 이어진다. 빙궁의 지하에서 무언가가 깨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땅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들썩들썩―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려고 하는 것이다.

들썩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졌고, 급기야는 땅이 조금씩 갈라지기에 이르렀다.

쩌저적―

그것은 지진이라고 부르기는 너무도 미약한 갈라짐이었으나, 땅이 갈라진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침내 땅이 갈라지고, 빙궁의 터 한쪽이 그대로 땅속으로 꺼져 내렸다.

땅이 무너지며 그 속에 있던 공간으로 빨려들어 갔다. 얼음 알갱이가 폭음과 함께 일었다.

콰과과광―

성터가 무너져 내리며 만든 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곧 먼지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눈처럼 하얀 나신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중얼거린다.

“여긴…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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