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그는 진심으로 소요자에게 감탄했다. 산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한 채로 싸웠다면 아마도 승리는 소요자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요자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 화산을 지켰다. 화산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진정으로 뛰어난 검사였소.”
오적은 적이었지만 강한 소요자를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가늘게 이어지던 소요자의 숨이 끊어졌다.
“후에 붉은 별이 움직일 때, 당신을 보아 화산을 멸문시키지는 않겠소.”
봉문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것이 오적이 인정한 적수인 소요자에게, 죽은 소요자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배려였다.
제11장
매화검선의 죽음은 강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매화검선, 그가 누구던가. 현 강호의 절대고수를 곱으라면 단연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인물이다. 또한 정파의 기둥이자 동시에 화산의 최고 선배였다.
그런 그가 죽은 것이다.
그것도 타인에 의해서.
화산파의 도인들에 의해 발견된 매화검선의 시체에는 팔과 다리가 없었고, 주변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봉우리의 정상이 반쯤 무너질 정도로 엄청난 대결이 그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흉수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도 없었다. 그가 사용한 무공은 여태껏 그 누구도 사용한 기록이 없는 무공으로서 마치 유성이 떨어진 것과 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매화검선 역시 자신의 절초를 펼친 듯 주변에는 화산파의 검술로 만들어진 자국도 남아 있었다. 확실한 것은 매화검선은 패배하였고, 죽었다는 것이다.
화산은 그 즉시 매화검선의 천도제(天道濟) 준비에 들어갔다. 구파일방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세간의 관심은 매화검선을 쓰러뜨린 인물에게로 이어졌다.
향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마교에서 움직였다는 말도 있었다. 마교의 교주를 비롯한 오호법이라면 매화검선과 함께 무(武)를 논할 만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것은 매화검선이 스스로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변이 파괴된 것은 매화검선이 스스로의 무공을 펼쳐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입마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그 소문은 곧 사그라졌다. 주변에서 매화검선의 것이 아닌 다른 인물의 것으로 보이는 옷 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청의(靑衣) 조각이었기에 사람들은 그 흉수를 청의사신(靑衣死神)이라 불렀다.
청의사신에 관한 소문은 눈덩이 불어나듯 불어났으나 소문만으로는 그의 정체를 전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를 알고 있는 이들은 극히 적었으니 말이다.
매화검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염호명이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터뜨렸다.
“역시 계획대로 잘 되어가는군.”
그런 염호명을 보며 고섬이 묻는다.
“무슨 계획인데 그러시는 겁니까?”
그들이 지금 발을 옮기고 있는 곳은 산길이었다. 흑령문의 고수들과 흑령문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귀호대(鬼虎隊)를 이끌고 황룡문을 치러 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모든 무림의 이목이 화산에 집중되어 있으니, 황룡문같은 작은 문파 하나가 사라지는 것에는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씨익 웃었다.
“글세, 자네는 몰라도 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가 계속해서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 이틀 정도 거리면 상주에 도달할 것이다. 그들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황룡문. 염호명의 눈에서 이글이글 불길이 피어올랐다.
‘놈……!’
거홍도에 이어 진혼권과 전귀까지 쓰러뜨려 흑령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놈. 얼굴을 알지는 못하지만 놈에 대한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이가 뿌득뿌득 갈리는 것이 분노를 숨길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조금만 더 가면 이 분노를 숨기지 않고 표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뼈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이 말아 쥐어지고, 그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 * *
무림 대부분의 눈은 섬서의 화산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모든 눈이 집중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운과 계약 관계에 있는 하오문의 눈은 화산뿐만이 아니라 천하를 주시하고 있었다.
흑령문의 이동에 대한 정보도 하오문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하오문이 구해준 총관이 자운에게 다가갔다.
“흑령문이 상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자운의 눈이 이채를 발한다.
“놈들이?”
총관은 하오문에서 자운에게 붙여준 인물로서, 황룡문뿐만 아니라 자운과 관계된 정보를 모조리 하오문에 가져다주는 역할을 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황룡문에 관계된 정보를 하오문에서 자운에게 넘겨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운은 흑령문이 상주를 향해 다가온다는 정보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운이 허리춤의 검을 움켜쥐었다.
“그럼 놈들이 지금 어디까지 왔지?”
그 말에 총관이 자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산양(山陽) 땅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니 이틀거리 정도 남은 듯합니다.”
총관의 말에 자운이 힐끗 운산과 우천을 바라보았다. 운산과 우천은 서로 무공을 단련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자운 덕분에 우천은 수월하게 운산의 검을 받아 넘겼다.
검술의 정교함이라든지 힘은 얼마 전 검기상인에 접어든 운산 쪽이 더 높았지만, 일전의 일로 인해 검의 기교 자체는 우천이 높아졌기에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팽팽한 승부. 하지만 자운은 저 승부의 승자가 누가 될지 알고 있었다.
승자는 운산이 될 것이다. 아직은 운산 쪽의 실력이 조금 더 나았다.
자운이 둘을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려 총관을 보았다.
“이 사실, 저 둘한테는 말하지 마.”
그의 말에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놈들의 수나 그런 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 알고 있어?”
그의 말에 총관이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서찰을 자운 앞으로 내민다.
자운이 서찰을 가볍게 들어 펼쳤다. 아래에 취록의 수결이 되어 있어 누가 보낸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서찰에 적혀 있는 것은 지금 상주로 다가오는 흑령문의 규모. 자운이 서신을 다 읽고는 다시 접어 총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흑령문주와 총관, 그리고 흑령문의 일곱 고수… 오십 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부대라…….”
수가 좀 많기는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지라 자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흑령문주나 다른 고수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지?”
“흑령문의 고수들은 완숙한 검기상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흑령문주 염호명은 강기지경의 초입에 접어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기? 제법이네?”
자운이 중얼거렸다. 강기는 만 명의 무인 중 두세 명이 들어설까 말까 한 경지다. 한데 그 강기지경에 접어들었으니 무공은 뛰어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운이 총관에게서 등을 휙 돌렸다.
“한 삼 일 정도 나갔다 올 거야. 그동안 황룡문 좀 잘 부탁해.”
자운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전서구 보내도록 하고. 그리고 놈들의 이동 경로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정보 보내주면 좋겠네.”
그 모습이 마치 유람이라도 나가는 양 가볍기 그지없다.
자운은 하오문에서 보내준 정보를 토대로 염호명들이 있는 산에 숨어들었다. 산세가 험준하지는 않지만 다행히도 나무가 울창하여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상황. 자운은 몸을 숨긴 채로 흑령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Te.
수풀을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치웠으며, 티가 나지 않도록 높이 솟은 나뭇가지를 밟고 돌아다닌다.
그리고 놈들이 숨어 이동할 만한 곳을 이리저리 찾아다녔다.
“여기도 아니네. 젠장. 이러면서 무슨 하오문이야.”
하오문에서도 자운에게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어디쯤이라는 단편적인 정보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이, 하오문에는 흑령문을 근거리에서 미행할 만한 고수가 없었다.
그러니 단편적인 정보로밖에 제공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자운이 괜히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얼마나 더 산을 뒤졌을까?
오래지 않아 놈들의 모습이 보인다. 자운이 숨을 죽이고 흑령문 놈들의 이동을 뒤쫓았다. 아직은 낮. 지금 손을 쓰게 된다면 금방 위치가 발각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밤이 되길 기다려야 한다.
자운이 고개를 들어 해를 바라보았다. 씨익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 사신을 보여주지.’
곧 해가 질 것이다.
산속의 어둠은 생각보다 일찍 내려온다. 나무들이 울창하게 엮여 빛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 어둠 속에 자운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자운의 동공으로 모닥불이 지펴져 있는 모습이 보이고, 그 주변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는 무사가 눈에 들어왔다.
자운이 바닥에서 돌멩이를 움켜쥐었다.
“일단은 저 둘.”
자운의 손끝에서 강력한 내공이 휘몰아치고, 내공을 휘감은 돌멩이가 시위에서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갔다.
피잉―
어둠 속에서 소리가 선명하게 울리고, 동시에 두 무사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들이 흘리는 신음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즉사는 아니지만 곧 죽을 것이다.
자운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으로 다시 녹아들었다.
* * *
“커억! 커어어억!”
두 무사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자 흑령문의 무사들이 황급하게 일어났다.
그중에는 염호명도 있었다.
고섬이 무사들에게로 다가가 상처를 살폈고, 곧 주변에서 피에 묻은 돌멩이를 발견해 내었다.
“암습입니다.”
그의 말에 염호명의 눈가가 꿈틀 움직였다.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고섬이 한동안 말이 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말이 안 되지만 눈앞에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염호명이 침음성을 삼켰다. 피가 묻어 번들거리는 돌멩이는 누가 보아도 방금 전 불침번을 서던 무사들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놈은 어둠 속에서 숨어서 다음 목표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염호명이 낮게 이를 갈며 자신의 수하들을 불렀다. 흑령문의 일곱 고수와 총관이 염호명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지금부터 부하들 이끌고 이 주변을 샅샅이 뒤지도록. 분명 우리를 공격한 놈이 주변에 숨어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