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룡난신-20화 (20/175)

# 20

일신의 경지가 검선 여동빈에게 닿을 정도로 검학을 쌓고 도를 이루었다 하여 촌노를 달리 무림에서 부르는 이름이었다.

매화를 다듬는 촌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걸려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촌노가 매화를 다듬는 방향만 구름이 자리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촌노는 매화를 다듬으면서도 화산을 그대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자신의 사문 화산의 모습. 속세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버렸다고는 하나 사문에 대한 것을 털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항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손에서 매화의 죽은 가지가 잘려 나갔다. 틱 하고 부러지는 가지가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실례하겠소.”

그런 소요자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하나 소요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매화 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참 매화를 다듬던 소요자가 굽은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그러시오. 바쁜 것은 없으니 절경을 잠시 둘러보고 있겠소.”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이 다가와 구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절경이구려. 그렇지 않소?”

그가 말을 걸자 소요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묵묵하게 매화를 다듬었다.

이윽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매화 다듬는 것이 모두 끝이 났다. 소요자는 바닥에 떨어진 매화 가지들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쪽에 흙을 파 곱게 묻어 주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요자 나름의 습관이었다.

매화가지 다듬기가 끝이 나자 소요자가 고개를 돌려 객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오신 객이오?”

“글쎄올시다. 천하가 좁다고 하면 좁은 것이고 넓다고 하면 넓은 것이듯 멀리서 온 것인지 가까이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구려.”

객은 청의 장삼을 입고 있었고, 몸에서는 은은한 다향이 풍겼다. 허리춤에 있는 검은 명검으로 보이는 것이 값이 적지 않게 나가는 듯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소요자만이 느낄 수 있는 냄새가 있었다.

‘고수의 냄새.’

객에게서는 이 시대의 검선이라 불리는 소요자마저 긴장하게 만들 냄새가 나고 있었다. 특유의 여유로움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허리에 차고 있는 검 대문인가?

그에게서 느껴지는 고수의 향은 오랜만에 소요자의 가슴을 다시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허, 버렸다 생각했는데 버리지 못했구나.’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무인의 성질, 그래서 매화선(梅花仙)이 아니라 검선(劍仙)이라고 불리는 것일 것이다.

“차 한잔 들겠소?”

소요자가 방금 갓 데운 차를 객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몸에서 다향이 느껴지니 분명 차를 좋아하는 객일 것이라 생각하고 차를 권한 것이다.

소요자의 말에 객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다면 받아야지요.”

소요자는 곧 찻물 가득한 잔을 내밀었고, 객은 두 손으로 찻잔을 받아 천천히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의 찻잔이 반 정도 비워졌을 때, 소요자가 입을 열었다.

허허로운 말투.

“그래, 이 산 깊은 곳까지는 힘들게 왜 오셨소.”

그 말에 객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정말로 자애롭다고 느껴지는 미소.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리 자애로운 것이 아니었다.

“선자불래요, 내자불선이라고 하지요.”

선자불래 내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

온 자는 선하지 않고 선한 자는 오지 않는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 객은 소요자에게 좋은 마음을 먹고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검선은 과연 검선. 그런 말을 듣고도 흔들림이 없다.

부동(不動)의 심(心).

소요자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

그 말에 자애롭기 그지없던 객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객의 얼굴. 객은 곧 그 얼굴로 소요자에게 자신이 온 곳을 말했다.

“붉은 별.”

“적성(赤星)이라……. 적(赤)이겠구려. 붉은 별을 말한 것을 보니 내 목을 꼭 가져가야겠다는 뜻 같은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소이까?”

객이 고개를 흔들었다.

“오적(五赤)이라 하외다.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소.”

오적의 몸에서 기운이 솟구쳤다. 그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구름이 갈라진다.

츠츠츠츠츠츠츳―

구름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거대한 기세가 하늘로 솟구쳤다. 소요자가 자신의 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쉬리릭― 탁

그의 검이 단박에 소요자의 손으로 빨려들어 가고, 소요자의 몸에서도 오적에 지지 않을 정도의 기세가 솟구치기 시작한다.

오적의 기운이 패도적이었다면 소요자의 기운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패도적인 기운과 유한 기운이 연달아 충돌하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똥이 튀었다.

“천하가 어지러워지겠구려.”

“어지러워진 후에야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겠소.”

“글쎄요. 그것을 평화라고 할 수 있을지…….”

먼저 움직인 것은 오적이었다. 오적이 검을 쭈욱 뻗어 소요자의 목을 노린다. 직선적인 공격. 누구나 막을 수 있을 듯한 너무 직선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소요자의 눈에는 보였다. 검을 움직인 순간, 상대의 검이 틀어지며 다시 노려올 것이다. 수십, 수백의 변초, 변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찌르기였다.

소요자의 손에서 매화가 피어났다. 구름 위에 피어난 매화가 검향(劍香)을 뿌리며 검과 검 사이를 노닐었다.

검향이 일며 오적의 검을 밀어내고, 오적의 검에서도 기운이 솟구친다. 그것은 별이었다.

오적의 검은 마치 하늘의 별과 같아 유성의 충격을 만들어냈다.

매화와 유성이 연달아 충돌하고, 소요자는 자신의 검이 크게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과연.”

소요자가 별 무리 없이 자신의 검을 막아내자 오적이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것은 소요자 역시 마찬가지. 얼마나 자세를 가다듬었을까?

오적이 소요자를 향해 말했다.

이번엔 그쪽이 먼저 오시오“

그 말에 소요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화산의 보법인 암향표(暗香飄). 어두운 와중에 매화 향기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소요자의 몸이 매화 향기를 타고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부드러우나 바람과 같이 날래기 그지없어 고요자의 신형을 순식간에 오적의 앞에 당도한다.

그것을 보고 오적이 소리쳤다.

“과연 화산의 암향표!”

암향표에 이어서 펼쳐 진 것 매화삼룡검(梅花三龍劍)이었다.

삼룡검에 초식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영롱한 빛의 매화가 허공중에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어 매화의 화원에 들어온 것 같다.

하지만 오적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다. 화려한 매화 사이에서도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소요자의 검이었다.

오적의 동공에 소요자의 검이 들어오고, 오적이 검을 마주 뻗었다.

유성이 땅에서 하늘로 솟구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매화와 유성이 연달아 충돌을 일으켰다.

매화의 변화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매화와 유성이 충돌한 순간, 매화가 산산이 조각나며 꽃잎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강기(?氣).

매화의 꽃잎을 닮은 강기였다.

강기의 비가 내린다. 소요자가 검을 그어 내리고, 그 검을 따라 수십 다발의 강기가 쏟아졌다.

콰앙―

곧 오적이 서 있던 자리에 폭음이 울리며 땅이 움푹 파여 나갔다. 그 속에 서 있는 오적 역시 낭패를 입은 모양이다. 입으로 울컥울컥 피를 게워내고 있었다.

하지만 소요자 역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강기의 비가 내리는 순간, 우성이 당에서 솟구쳤다.

이제까지의 것들과는 다른 거대한 유성, 그 유성을 막아내기 위해 매화 잎을 끌어당겼다.

그 때문에 오적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의 안위를 도외시한 채 공격을 했으면 이 자리에는 둘 모두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소요자가 구멍이 난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급하게 꽃잎을 모아서인지 모두 방어를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왼쪽 어깨에 검상을 허용했고, 그 때문인지 박살 난 왼쪽 어깨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으음.”

소요자가 신음을 흘렸다. 이 상처가 얼마 만인가.

눈앞에 있는 오적이라는 자는 과연 생사를 걸어야 할 정도였다.

오적 역시 눈앞의 소요자를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실수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소요자가 아니라 오적 자신이 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허공에서 별이 딸려 들어와 그의 검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주변에 겹겹이 강기의 막을 쳤다.

“과연 화산이오.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구려.”

“화산에는 아직도 뛰어난 절기가 많다오.”

오적의 검에 맞추어 소요자의 검도 천천히 허공에 매화를 수놓기 시작했다.

소요자의 검에서 붉은 비단이 뿜어지고, 비단은 허공중에 매화를 만들어간다.

“그렇소? 그렇다면 어디 이것도 한번 받아보시오.”

오적의 검이 거대한 유성을 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신벌 같은 유성. 떨어진다면 선인봉이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요자도 그것을 알고 있다. 선인봉의 위쪽 봉우리가 무너지면 필히 산사태가 일어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래쪽에 있는 화산이 겪게 될 것이다.

막아야 한다.

소요자의 검이 매화를 완성하고, 허공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콰과과과광―

소요자의 바람대로 다행히 산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경 십여 장의 땅이 온통 뒤집어졌으며 형체도 알아 볼 수 없도록 갈라졌다. 오적의 힘이 조금만 강했어도 선인봉의 위가 무너지며 산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오적이 눈앞의 소요자를 내려다보았다.

두 팔과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가고 눈마저 잃었다.

옅은 숨을 몰아쉬고 있으나 곧 죽을 것이다. 오적 역시 멀쩡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그의 가슴팍에는 열 줄기에 이르는 검상이 새겨져 있다. 어느 하나 치명적이지 않은 것은 없었으나 다행히 단번에 숨을 앗아갈 것들은 아니라 오적이 빠르게 혈을 눌러 지혈을 했다.

피는 멎었으나 오랜 시간을 두고 치료하지 않는다면 이 상처들은 오적의 숨을 앗아갈 것이다. 오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족히 반년은 정양해야 할 상처를 입었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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