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자운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금전 하나를 잡았다. 그리고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손에 들어온 금전이 흐물흐물하게 변하더니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고열에 녹아내리는 듯한 모습. 삼매진화를 응용해 내공으로 금을 녹여내는 것이다.
그 모습에 우천과 운산, 그리고 취록은 경악성을 터뜨릴 뻔했다.
도대체 내공으로 금을 녹여 버리려면 얼마나 많은 양의 내공이 필요하단 말인가?
자운은 곧 금전에 넣었던 내력을 거두어들였다. 녹아내리다 만 금전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굴렀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자운이 웃었다. 천하제일문, 문파로서 천하를 논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무력이다. 그 무력이 꼭 천하제일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할 것이다.
취록은 자운의 수준을 그 선을 넘은 것으로 판단했다. 황룡문이 자리를 잡고 예전의 성세를 회복한다면 자운은 황룡문이라는 날개와 함께 정말 용이 되어 천하를 논할 거물이 될 것이다.
취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상주로 파견될 때만 해도 이런 고수와 엮일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데 그런 고수가 정말 눈앞에 있다.
자운의 말에 취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운은 미련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을 상부에 보고해도 상관은 없지만, 하오문 외부로 새어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거야.”
당연히 그럴 거다. 이것은 그야말로 특급 정보다. 특급 정보는 쉬이 유출되지 않는다. 천만금을 쥐어주지 않는 이상은 자운에 대한 정보가 풀리지 않을 것이다.
하오문만이 독점하고 있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자운이 허리춤에 있는 검을 움켜쥐었다. 한순간, 시퍼런 검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갑 속으로 갈무리된다.
찰칵―
“혹시나 새어 나간다면 매일 밤마다 모가지 걱정을 하게 해주지.”
자운이 아직까지 멍하게 있는 취록을 뒤로하고 우천과 운산을 일으켰다.
취록과 마찬가지로 운산과 우천 역시 멍한 표정을 금하지 못했고, 자운은 그들의 머리를 쥐어박는 것으로 그들을 깨웠다.
“일어나. 이제 돌아가게.”
자운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방에서 나섰고, 취록은 그런 자운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부탁한 일 잘해달라고.”
제8장
흑령문주 염호명이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탁자를 타고 그 울림이 뻗어 나갔다. 그의 앞으로 한 사내가 다가와 고개를 숙여 부복했다.
“문주님, 고섬입니다.”
염호명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는 것이 분명 화가 난 것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실패했다니?”
그가 나른하게 말하며 고섬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 고섬이 머뭇거렸으나 곧 입을 열었다. 입을 열지 않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섬이 침을 한차례 꿀꺽 삼켰다.
그리고 숨을 고른 후 말했다.
“거홍도가 죽었다 합니다.”
콰직―
염호명의 손끝이 나무로 만든 탁자를 파고들었다. 지단목으로 마들어 그 강도가 철에 비견될 정도인데 그것을 그냥 두부 파고들 듯 파고든 것이다.
나뭇조각이 옆으로 튀었다. 하지만 고섬은 피하지 않았다.
나뭇조각 중 날카로운 것이 고섬의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의 뺨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진다.
“막요삼이 말인가?”
고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요삼이 그렇게 쉽게 죽을 인물이던가?”
“본 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섬의 말에 막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여자 좋아하고 도박이라면 눈알이 뒤집어지는 놈이었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한 놈이었지.”
“…….”
“그런데 죽었어?”
염호명의 말에 고섬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고섬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염호명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누구에게 죽었나?”
“알 수 없습니다.”
염호진이 탁자의 한구석을 쾅 내려쳤다. 단번에 탁자의 다리가 부서지고 기울어지며 무너졌다. 그 위에 있는 갖가지 물건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려 부서졌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나?”
“그날 도박장에 있던 놈들에게 물었으나, 그 동네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고 합니다.”
“계속해 봐.”
“도박장주는 어떻게 된 건지 입에 게거품을 물고 미쳐 있었습니다. 팔은 완전히 부러진 상태더군요.”
“막요삼은 어떻게 죽었지?”
“일방적으로 당한 듯합니다. 마치 가지고 놀듯이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는데 격전으로 새겨진 상처는 아닌 듯했습니다.”
그 말에 염호진의 눈이 치켜떠졌다.
“막요삼을 가지고 놀아?”
그 정도라면 염호진보다 조금 아래거나 비슷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정도의 고수가 상주라는 벽촌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예. 그래도 흉수에 관해서 한 가지는 알아낼 수 있을 듯 합니다.”
염호진의 눈에 이채가 어리었다.
“얼마 전 흑우파와 황충이 모두 황룡문의 손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날도 흑우파에서 운영하던 불법적인 도박장을 황룡문에서 정리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황룡문이라면 염호진이 금맥을 가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문파다. 그가 알기로 분명 황룡문에는 그만한 저력이 없었다.
“호오, 황룡문에 그만한 힘이 있었나?”
“지금 파악 중에 있습니다. 곧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염호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정보를 얻어와. 그리고 거홍도의 죽음이 그놈들과 관련이 있으면…….”
고섬이 말을 받았다.
“진혼권(鎭魂拳)과 전귀(戰鬼)를 움직이겠습니다.”
염호명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섬이 나가고 나자 염호명이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구석. 염호명이 그쪽을 바라보며 열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말했다.
“이제 그만 나오지 그래.”
염호명의 말에 어둠이 한차례 흔들리고, 그 어둠 너머에서 붉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걸어나왔다.
“오랜만이군, 적발라(赤魃癩).”
염호명이 그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도 붉은 머리카락을 흔들린다.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와봤지.”
그 말에 염호명의 얼굴이 무너졌다. 단번에 일그러지는 염호명의 얼굴. 그가 허리춤의 도를 움켜쥐었다.
“이 자리에서 죽고 싶나?”
“네가? 나를? 웃기고 있군.”
적발라가 그를 향해 웃으며 역시 유엽도를 움켜쥐었다.
“비록 네가 삼십단(三十丹)이라고는 하지만 말석. 내가 성(星)에서 그보다 한 계급 아래인 백홍(百紅)이라곤 하지만 백홍 중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너와 나의 실력 차이는 크지 않다는 말이지.”
염호명의 몸에서 기세가 강하게 피어올랐다. 그와 마찬가지로 적발라의 몸에서 역시 기운이 끓어오른다.
세찬 기파가 방 안을 휘감았다.
“그럼 여기서 누가 더 강한지 겨루어볼까?”
적발라가 붉은 머리칼 사이로 흰 이가 다 보이도록 미소 지었다. 차갑기 그지없는 미소. 염호명은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 승리의 가능성을 냉정하게 점쳐 보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놈은 자신보다 반 수 위였다.
염호명이 흥미를 잃었다는 듯 도에서 손을 떼며 다른 손을 흔들었다.
“그만두도록 하지. 그보다 여기는 왜 온 것이지?”
“말했잖아. 네가 실패했다고 해서 알아보러 왔다고.”
“성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별말이 없었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하라고 하더군.”
“뭐지?”
“황룡무상십이강(黃龍無上十二强), 그건 확실하게 지워야 한다고 하더군.”
적발라의 말에 염호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이 황룡문에 손을 대는 이유는 고작 금맥 따위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흑령문을 내세워 금맥을 노리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들이 노리는 것은 황룡문의 절기라 할 수 있는 황룡무상십이강이었다.
“다 망해 버린 황룡문에 그 절기를 사용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군. 성에서는 걱정이 너무 심해.”
그가 혀끝을 가볍게 찼다.
“쯧.”
“그렇지. 거기다 그냥 다 밀어버리면 쉬울 텐데… 그렇게 된다면 화산파의 주목을 받게 되겠지.”
그 일을 피해야 한다. 아직 성의 모든 준비가 끝나지 않은 상황. 한데 구파일방 중 하나인 화산의 이목을 끌어서야 좋을 것이 없었다.
적발라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다시 몸을 옮겼다.
“뭐, 어쨌든 내 도움이 필요없다니 혼자서 잘해보게. 당분간은 이 주변에 있을 것이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부르고.”
적발라의 말에 염호명이 이죽거렸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적발라의 웃음소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황룡문은 제법 제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하오문에서 보내준 일꾼들이 황룡문의 모습을 나름대로 복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너진 담벼락이 새로 복구 되는 모습을 보며 자운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네.”
조금씩이나마 황룡문은 예전의 성세를 되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사부와 대사형의 꿈이었던 천하제일문을 만들 생각이다.
복구되는 황룡문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운산과 우천의 무공 역시 발전하고 있었다. 아직 고수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 배는 강해진 모습이다. 그것은 자운의 체계적인 관리 하에 수련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이제 이들이 성장하면 고수가 될 것이고, 황룡문을 지키는 기둥이 될 것이다.
점점 검이 매섭게 변하는 둘을 보며 자운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경험해야 할 것이 있지.”
조금은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인이라면 언제고 겪어야 할 것들이며 평생 자유로울 수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이걸 극복하면 너넨 무인이 될 수 있을 거고,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두 번 다시 무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죽어버릴 수도 있지.”
자운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그 단계를 어디서 할 것인지는 정해두었다. 자운이 우천과 운산을 향해 걸어갔다.
“어디를 가는 겁니까?”
운산이 우천과 함께 자운의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그들은 지금 상주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세가 험준하지는 않았으나 숲이 울창하여 녹음이 우거진 산. 싱그러운 산의 냄새와 흙냄새가 그들의 코끝을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