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자신보다 족히 열 살 이상은 어려 보이는 자운의 말투에 다월은 기분이 팍 상하는 것을 느꼈으나 여기는 기루다. 최대한 손님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장사를 하다보면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난다. 여러 가지 인간 군상. 한데 이 정도에 화를 냈다면 이 기루의 총관 자리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해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어디로 모실까요?”
그녀가 자운을 향해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말에 자운이 머리를 잠시 긁적였다.
“이게 맞나? 사 층으로 가고 싶은데?”
자운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총관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총관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자운은 한순간 변한 총관의 기색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곧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자운에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객잔에는 사 층은 없고 삼 층까지만 있습니다.”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보고 왔기에 이미 알고 있다. 역시 삼 층까지밖에 없다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운이 사 층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전혀 다른 이유였다.
“그래? 그럼 삼 층 제일 구석진 방으로 안내해 줘.”
자운의 말에 다시 총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으나 애써 표정을 숨기며 총관은 자운을 안내했다.
“그럼 원하시는 대로 삼 층에서 가장 풍경이 좋은 방으로…….”
자운이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삼 층 제일 구석진 방. 내가 원하는 건 그 방이야.”
자운이 말 한 대로 그들은 삼 층에서 가장 구석진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으로 들어간 자운은 기루에서 온갖 음식들을 시켰다.
우천과 운산이 만류했으나 그들의 말을 들을 자운이 아니었다. 술을 비롯하여 갖가지 음식이 상 위에 자리하고, 자운이 입을 떡 벌렸다.
“자, 먹자!”
자운이 가장 먼저 오리 다리를 쭈욱 잡아 찢었고, 운산과 우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운을 향해 물었다.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자운이 피식 웃으며 오리 다리를 우적 씹었다.
“말했잖아. 돈 쓸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곳이라고.”
자운의 말에 운산과 우천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과연 이곳 어디에 돈을 쓸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그저 기루일 뿐인데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젊고 매력적인 기녀 셋과 조금 늙기는 했으나 중년의 매력이 다른 젊은 기녀들 못지않은 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자운이 그 모습을 보고는 물고 있던 오리 다리를 한쪽으로 치워 버리고는 손뼉을 짝 쳤다.
“옳거니!”
“기녀까지 불렀습니까?”
운산의 말에 자운이 손뼉을 계속 치며 말했다.
“안 될 게 뭐야. 쓸 때 팍팍 쓰자고. 팍팍! 야, 이리 와바.”
자운이 기녀를 부르자 기녀는 자운의 옆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다른 기녀들 역시 자운의 옆에 앉았고, 중년의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 사이에 앉았다.
“취록이라고 합니다. 소녀가 먼저 노래를 올리겠습니다.”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운의 옆에 있던 기녀가 자운을 향해 고기를 집어주고, 자운은 중년 여인의 노래를 반주에 맞추어 들으며 어깨춤을 덩실거렸다.
“어허, 좋구나!”
흥이 오르는 듯 자운이 손가락으로 상을 때렸다.
탁탁탁―
그 모습은 그야말로 난봉꾼. 자운은 저렇게 잘 즐기는 데 비해서 운산과 우천은 그야 말로 숙맥이었다. 지금까지 여자와 말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데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오는 기녀들을 만나니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들을 보고 자운이 중얼거렸다.
“에라이, 고자 같은 놈들.”
자운은 흥에 취한 듯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이윽고 시킨 음식이 누구 뱃속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을 때, 자운이 탕 소리가 나게 상을 때렸다.
“하아!”
그의 입에서 진한 주향이 뿜어진다. 주향이 뿜어지는 것은 입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에서 진한 주향이 뿜어지고, 방이 주향으로 가득 찼다. 내공으로 취기를 몰아내었다.
자운이 취기를 몰아내자 취록이 눈치를 주어 기녀들을 물렸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자운의 눈빛이 이전과는 달라졌다.
기녀들이 나가자 자운이 천천히 취록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일을 시작해야지?”
그의 말에 취록의 기세가 싹 바뀐다. 이제까지의 취록의 기세가 그저 평범한 기녀였다면, 지금 취록의 기세는 운산과 우천이 깜짝 놀랄 정도로 담대했다.
“십 년 전에 바꾼 암어를 사용하시기에 누구인지 와봤더니 황룡문 분들이 오셨더군요.”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관이 말한 것은 하오문에서 쓰는 암어였다. 물론 그게 십 년 전에 바뀐 암어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으레 하오문은 몇 가지 암어를 지정해 두고 십 년을 주기로 그 암어를 바꾸어가며 사용한다. 자운이 알고 있던 이백 년 전의 암어가 마침 십 년 전에 사용되는 것이었다.
“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왔어. 여기 하오문 맞지?”
자운의 물음에 취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 여자의 이름과 외모 모두 가짜일 것이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하오문인 줄 알고 그 암어를 사용한 것 아닌가요?”
자운이 아무렇게나 손을 흔들었다.
“아, 확인 차 물어본 거야.”
“그렇군요. 그렇다면 요즘 이름을 높이고 계신 황룡문의 고수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녀가 매력적으로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중년 미부의 외모를 하고 있으니 어찌 그 미소가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자운은 그런 여색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취록을 향해 물었다.
“그 고수가 여기 온 이유가 뭐겠어?”
자운의 말에 한순간 취록의 기세가 변하고, 주변의 공기가 물 먹은 솜처럼 추욱 늘어졌다. 취록에게서 싸늘한 분위기가 돌았다.
가끔 있다. 힘으로 하오문을 굴복시키려 한 사례가 말이다. 하지만 그 어느 문파도 그것에 성공한 적은 없다.
취록의 싸늘해진 눈빛에 자운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빙긋빙긋 웃었다.
“농담이니까 그렇게 싸늘한 표정은 지어 보이지 마, 록. 하오문에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
“부탁할 일이요?”
주로 하오문에는 정보를 관련해서 묻고 부탁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일 것이라고 취록은 생각했다.
“어. 사람을 좀 구해줬으면 해.”
“어떤 사람을 말인가요?”
“황룡문의 총관이 될 사람, 그리고 기타 등등 잡일을 할 일꾼들. 총관은 나름대로 깨끗한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잡일꾼들은 하오문의 사람이라도 상관없어.”
자운이 피식 웃었다. 자운의 말에 취록은 무언가 깊게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자운을 향해 물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군요. 그렇다면 그 대금은 돈으로 지불 하실 생각인가요?”
그녀의 말에 자운이 보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바람이 일어 보따리가 화악 열렸다.
“이 중 어느 정도 주면 되겠지?”
“돈은 그렇게 많이 필요 없어요. 기껏해야 사람을 구하는 일이니. 대신 정보를 주세요.”
정보라는 말에 자운이 갸웃했다.
“하오문이 나에게 정보를 달라니, 웃을 일이군. 그래, 무슨 정보가 필요하지?”
자운이 웃었다.
“당신. 당신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지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말에 자운의 표정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변했다. 하지만 곧 그 능글맞은 미소를 되찾았다.
“하오문의 사람들을 잡일꾼이 아니라 총관으로 보내도 좋아. 황룡문에 해만 안 된다면 말이지.”
그것은 도발이었다.
“직접 알아보라는 의미시군요.”
취록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묘하게 색기가 느껴지는 행동. 그런 행동을 보였으나 자운의 마음은 전혀 요동치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풀린 것은 운산과 우천 쪽이었다.
취록 역시 자운을 노리고 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 쉬워 보이는 운산과 우천을 노리고 한 것이리라.
자운이 손바닥을 들어 상을 때렸다.
터엉―
상을 타고 내공의 울림이 찌르르 퍼져 나갔다. 그 울림이 마치 불문의 외침이라도 된 양 운산과 우천의 정신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애들 데리고 그러지 말고, 이야기나 계속하자고.”
자운의 한 수에 취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우리가 직접 알아보도록 하지요. 대신 대금은 따로 받겠어요.”
자운이 고개를 흔든다.
“손해 보는 장사군. 나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값어치가 없는 건가?”
“당신이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는 스스로 증명해 보도록 하세요.”
그 말에 자운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천하제일문.”
그 말이 한순간 취록뿐만이 아니라 운산과 우천 역시 움찔했다. 갑자기 여기서 천하제일문이 왜 나온다는 말인가?
“황룡문을 천하제일로 만들 거다. 너네는 그 정보를 관리하는거지.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취록이 웃었다.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하시는군요. 천하제일이라……. 이번에는 농이 과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자운이 차가운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기운이 일고, 일어난 기운은 천장을 향해 쏘아졌다.
쿵― 쿵―
자운의 뒤편으로 흑의인 둘이 떨어져 내렸다. 암중에서 취록을 보호하던 인물이다. 숨소리 하나 쉬이 흘리지 않도록 훈련된 일류들이거늘, 자운의 손에 너무도 쉽게 제압당한 것이다.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자운이 이번에는 보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촤르륵―
자운의 내공이 향하자 금전이 섞이는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촤르르르륵―
금전이 자운의 손끝을 따라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고, 자운과 취록의 앞에 주르륵 쏟아졌다.
금전들이 둘의 앞에서 번쩍거리고, 허공섭물의 신기를 목격한 운산과 우천은 입을 쩍 벌리고 자운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취록 역시 마찬가지. 상주에서 비견될 수준이 없을 고수라고는 예측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아직 천하를 논하기는 조금 어렵다.
“아직도 부족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