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룡난신-1화 (1/175)

# 1

서장

어둠이 안개처럼 퍼져있는 곳, 암혈(暗穴).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뿌리 사이로 얼마간의 빛이 비집고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 빛은 암혈을 밝히기에는 너무도 미약했다. 간신히 사물을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빛.

그리고 그 암혈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사내 하나. 눈을 감고 있어 깊이를 측량할 수는 없었으나 콧날이 오뚝하고 턱선이 굵은 것이 사내다웠다.

또한 눈썹은 짙어 그의 사내다움을 한층 진하게 해준다. 하나 사내다움을 반감시키는 것이 있다면 백색으로 죽어버린 그의 피부일 것이다.

혈기가 돌지 않는 것인지, 너무 오랫동안 빛을 쬐지 못하여 피부가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피부색은 그의 사내다움을 조금 반감시켰다.

언뜻 보면 긴 머리와 함께 여성처럼 보이는 모습. 여성의형과 남성스러움이 한 사내의 몸에서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츠츠츠츠츠―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 소리는 사내의 아랫배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풀썩―

사내의 배가 한순간 허공으로 높게 뛰어올랐다 내려왔다. 그리고 그 현상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이윽고 배뿐만이 아니라 가슴 역시 널을 뛰기 시작한다.

배가 올라오면 가슴이 내려가고, 가슴이 올라오면 배가 내려간다.

가슴과 배가 연달아 허공으로 뛰어오르고, 사내의 몸 역시 계속해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이 사지백해를 누비고, 거의 뛰지 않는 그의 심장을 깨웠다.

심장에서 일어난 피는 온몸을 순회하며 그의 혈색을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한다.

백짓장 같은 그의 온몸에 피가 돌기 시작하자 조금씩 혈색이 돌아왔다.

물론 여전히 백옥 같은 피부는 마찬가지였으나 백짓장은 아니라 할 수 있을 정도. 온몸으로 기와 피가 순환하고, 마침내 그것들이 온몸의 육본(肉本:세포)을 일깨운다.

감각이 살아나고, 사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번쩍―

한순간 밝기를 측량할 수 없는 안광이 사내의 눈에서 뿜어졌다. 그리고 단번에 거의 눈 속으로 다시 갈무리된다.

사내가 눈을 뜨자 몸은 더 이상 널을 뛰지 않았다. 마치 주인의 복종하에 들어간 것처럼 조용하고, 사내는 눈을 굴려 사방을 조용히 살폈다.

그리고는 팔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킨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의 키는 꽤 컸다. 육 척 장신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였다. 암혈 밖의 다른 사내들에 비교하면 컸으면 컸지 절대로 작은 체형은 아니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가 그의 손등을 간질였다.

사내는 길어 내린 머리를 바라보고는 자신의 의복에 묻은 때를 한차례 탁탁 털어낸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때가 낀 듯 옷에 스며든 때는 쉽게 빠져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먼지를 털었으나 역시 빠지지 않기는 마찬가지. 한참 의복을 털던 그가 행동을 멈추고 암혈 한구석에 놓여 있는 검을 집었다.

나무로 만든 검갑에 조용히 납검되어 있는 검. 사내가 검병을 가볍게 만졌다.

검병에서도 돌가루와 먼지가 후두두 떨어져 내리고, 운두 끝에 달려있던 수실은 낡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덜렁거렸다.

사내가 검을 뽑아 들었다.

기억에 의존하면 분명 맑은 검명을 울리며 뽑혀 나와야 할 검. 하지만 쇠를 긁어내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나며 검이 억지로 뽑혀나왔다.

끼이이이익―

뽑아낸 검에는 녹이 한가득 슬어 있었고, 사내는 그 녹을 보고는 표정을 찌푸렸다.

“젠장.”

사내는 검집을 들어 검날을 툭툭 때렸다. 그러자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붉은 녹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검면에 음각된 문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꿈틀거리는 용의 형상. 용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내가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씨익 지어 보이고는 주변을 휙휙 살폈다.

그리고는 뒷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오래 잤나?”

제1장

아래로는 사천(四川)과 호북(湖北)이 있으며, 좌우로는 각기 감숙(甘肅)과 산서(山西), 하남(河南)이 위치한 곳 섬서(陝西). 그곳으로 향하는 자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길게 기른 머리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지저분하게 산발되어 허리에 걸려 있고, 머리칼 아래쪽 허리에는 검갑이 통째로 덜렁덜렁 달려 있다. 또한 옷은 허름할 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구멍이 나 있어 그야말로 누더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 그 끝에는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문파가 위치하고 있었다.

자운이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황룡문(黃龍門).”

무려 이백 년을 이어온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파, 그리고 당대의 천주오존(天柱五尊)이 문주로 있는 문파다.

천주오존, 하늘의 기둥과도 같은 다섯 명의 절대고수를 이르는 말로서 그중 일인인 황룡검존이 바로 황룡문의 문주다.

과거 섬서에서 일어나 섬서무림을 핍박했던 마화당을 폐퇴시킨 주역이기도 하며, 그로써 이름을 드높인 황룡검존과 황룡문. 자운이 황룡검존의 당당한 모습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사부님…….”

그렇다. 놀랍게도 이 거지 꼴을 하고 있는 자운의 스승이 황룡검존이었던 것이다.

황룡검존 함선소. 그는 모두 여섯의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 세 번째 제자가 바로 자운이었다.

“내공은 충분히 쌓았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도 되겠지.”

그 때문에 폐관에 들었던 것이다.

무공을 이해하고 몸으로 익히는 재능은 천고에 다시없을 기재, 그가 바로 자운이었다.

자운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재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내공이 부족했다. 아니, 이 빌어먹을 몸뚱이 때문에 내공이 쌓이는 게 지독하게도 느렸지.”

천형. 그래서 폐관에 들었고, 귀식대법을 이용해 새로운 심법을 만들었다. 온몸을 가사 상태로 만들고, 그 의지를 모두 단전으로 집중해 내공을 쌓았다. 본디 내공을 주천하는 것은 의지에서 일어나는 바, 온몸을 움직이던 무의식의 의지를 단전으로 옮기자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의 몸은 줄곧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고, 자운의 내공 역시 만족할 만큼 쌓였다.

‘그보다 이 구석에 있는 건 뭐지?’

내공이 늘어났음에 만족해하며 다시 의지로 내공을 주천시켜 보던 자운은 단전의 구석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무언가 단전에 꽉 자리를 잡고 있는데 해로운 기운은 아니다. 분명 내공과 같은 성질의 것임은 분명한데, 내공과 같이 의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몸에 딱히 해가 될 것이 없어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지만, 자기 몸속에 있는 것인 만큼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뭐, 이건 나중에 시간을 내서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고, 이제 황룡문이 보일 때가 되었는데?’

위풍도 당당하고, 그 모습마저 대문파의 형(形)을 하고 있는 황룡문의 모습. 외원의 담장은 좌우로 각기 백 장에 닿을 정도로 뻗어 있고, 정문은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아 그 기둥을 황룡이 휘감고 있다.

정문의 현판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황룡문이라 적혀 있다.

자운이 마침내 고개를 들고 희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황룡문의 현판을 바라보았다.

그가 크게 소리친다.

“황룡문!”

그리고는 그가 이상하다는 듯 현판을 바라보았다.

“근데 원래 우리 문파가 이렇게 생겼던가?”

백여 장에 이르는 좌우로 뻗은 벽. 황룡이 휘감은 기둥과 용사비등한 필치로 그려진 현판. 자운이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황룡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설픈 글씨로 쓰여 있는 현판을 읽었다.

“황(黃). 룡(龍). 문(門). 이상하다, 분명 여기가 맞는데?”

자운이 고개를 흘깃흘깃 움직이자 벽의 끝이 눈에 보인다. 좌우로 뻗은 백여 장의 벽이 이렇게 쉽게 끝을 보일 리가 없다.

짧아진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솟구치는 두 개의 황룡. 황룡은 더 이상 황룡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황룡의 어금니는 박살이 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고, 비늘만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황룡이 누군가에게 잡아 뜯긴 듯 온 곳이 움푹움푹 파여 있다.

용사비등한 글씨로 적힌 황룡문이라는 글씨는 오간 데 없고 평범한 글씨의 현판이 자운의 눈에 들어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의문을 가졌으나 외부에서는 알 길이 없다. 자운은 손을 들어 황룡문의 문을 밀었다.

목문의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녹 가루를 떨어뜨린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것인지 경첩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과했다. 귀를 거스르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자운은 황룡문 내부로 들어갔다.

황룡문에 한 걸음을 들여놓는 순간, 자운의 걸음이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것 마냥 멈추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문파 꼴이 왜 이래?”

자운이 입구에 못 박혀 선 채로 황룡문의 내부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낡아 무너질 듯한 건물들. 먼지가 꽤 오랜 세월 쌓인 듯 색이 바랜 지붕의 어느 나라도 자운의 기억 속의 모습과 일치 하는 것은 없었다.

“내가 잘못 찾아온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현판을 다시 읽어보았지만 분명한 황룡문이다.

자운이 황룡문 내부를 다시 한 번 둘러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억 속에 있는 창룡전(蒼龍殿)을 찾기 위함이다. 창룡전이란 황룡문의 문주가 기거하는 곳으로서 황룡문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백 보쯤 걸음을 옮겼을까?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창룡전은 한참을 더 가야 보이는데, 고작 백 보 만에 창룡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누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건물이 창룡전이었나?”

그의 기억 속 창룡전은 삼백 개가 되는 계단을 올라가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결코 백 보 정도 걷는다고 눈앞에 도달할 수 있는 건물이 아니라는 말. 하지만 분명 쓰여 있는 글귀는 창룡전이었다.

“내 기억 속에 이 건물은 분명…….”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창룡전이 아니었다. 창룡전에 비하자면 훨씬 보잘것없는 건물. 자운이 낡은 목문을 밀었다.

목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낡기는 했으나 누군가 청소를 한 듯 깨끗하다. 목문을 열고 들어가자 잘 정돈된 창룡전의 내부가 드러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