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2화. 자유
*
한참 뒤 한립이 고개를 들었다.
“병령 선배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체내의 도조 법칙을 흩어 버릴 수 있게 도움을 주십시오. 장천병을 포기하겠습니다.”
“네 체내의 시간법칙이 너무 충만하니 바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병령의 목소리에 언뜻 희색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녹색 빛이 반짝이고 장천병이 한립 앞으로 날아올라 부풀어 올랐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소매를 저어 은색 빛의 문에서 남궁완을 불러냈다.
“완이, 그리고 금동 내 할 일 있으니 멀리 떨어져 있어야겠소.”
한립은 침착하게 말했다.
금동은 움찔했으나 긴말하지 않고 남궁완을 데리고 물러섰다.
화지공간에 있던 남궁완도 바깥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립이 무언가 엄청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예감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그를 믿고 물러났다.
수결을 맺은 한립이 장천병에 손을 얹고 방대한 시간법칙의 힘을 병 안으로 흘려보냈다.
밝은 초록빛을 뿜어 암녹색 빛덩이로 변한 장천병은 바닥이 없는 심해처럼 시간법칙을 마구 빨아들였다.
그걸 감응한 한립은 더욱 많은 시간법칙을 방출해 장천병의 빛을 한층 짙게 만들었다.
그러자 병 속의 구름이 출렁이고 굵직한 암녹색 빛이 병 입구를 통해 전방 허공으로 튀어나왔다.
콰르릉!
흔들린 허공에 금색 시공간 통로가 나타나 한립과 장천병을 집어삼켰다.
금동이 놀라 몸을 피했다.
“남궁 수사, 한 수사의 능력에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꼭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걱정하지 않아요. 부군은 꼭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예요. 우리 같이 기다려요.”
금동의 걱정에 남궁완은 미소 지었다.
그녀의 차분한 얼굴을 본 금동은 탄복했다.
시공간 통로 속 한립은 모든 것을 찢어 버릴 것 같은 공간의 힘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장천병은 찬란하게 녹색 빛을 내뿜어 공간의 힘을 배척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시공간초월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너의 시간법칙이 장천병의 시공간초월 신통을 격발시켰다. 이제 관건은 장천병의 힘을 조종해 네 본원 도조법칙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야. 긴장을 풀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마지막 금빛 덩어리가 한립의 손바닥을 벗어나자, 그의 몸에서 극심하게 흔들리던 금빛이 가라앉았다.
기운이 안정을 되찾고 그는 대라 최고봉으로 수행이 떨어졌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병령 선배님.”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이 장천병에서 손을 뗐다.
병령은 대답이 없었다.
그때, 장천병이 진동하며 금빛과 암녹색 빛으로 미친 듯이 번뜩였다.
안색이 달라진 한립은 서둘러 뒤로 물러났고, 금색 빛의 고리로 주변의 시공간의 힘을 막았다.
퍼어엉!
이미 예상했던 대로 장천병이 터지며 무수히 많은 암녹색 빛의 알갱이가 흩날렸다.
그 빛의 알갱이들은 흩어지지 않고 빠르게 뭉쳐 여덟 살 정도의 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아이로 변했다.
맑은 눈과 수려한 외모를 지닌 아이는 사내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하하하! 이 얼마 만에 빌어먹을 병에서 탈출한단 말인가! 난 자유다!”
녹발 아이는 생김새와 달리 박장대소를 했다.
“병령 선배님이시지요? 장천병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드립니다.”
한립은 평온하게 축하 인사를 했다.
이럴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장천병 병령인 선배님이 오랜 세월 수련을 해왔다면 무엇을 노리는지 알만하지요. 게다가 전 연신술을 익혀 의식 감응에 민감한 편이고요. 선배님의 의도를 알아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기는 병령을 향해 한립이 미소 지었다.
“쯧쯧, 연신술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윤회 전주가 천재이기는 한 것 같구나. 내게 다른 뜻이 있는 줄 알면서도 도움을 구했단 말이냐?”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하나 제게 악의는 없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인데 도움을 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게다가 제가 대라의 경지로 떨어졌다 하나 시간법칙에 대한 이해도는 그대로라 누구에게 농락당할 실력은 아닙니다.”
“하하하, 많이 컸구나! 그래, 그래야 한립이지. 허나 대라 최고봉으로 돌아갔어도 시간법칙을 움직일 때는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네 말대로 난 네게 악의가 없다. 오직 고마움뿐이지. 도조의 힘을 버리고 나를 장천병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병령이 크게 웃으며 한립을 향해 공수를 해보였다.
“서로 상부상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선배님은 어떻게 지내실 생각입니까?”
“병 속에서만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앉아 있다 보니 진선계를 돌아다니고 싶다. 기회가 되면 진선계 바깥까지도!”
한립의 질문에 병령이 신이나 떠들었다.
“진선계 바깥이요? 유명계와 회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 수사, 안목이 그리 협소해서야……. 설마 진선계, 회계, 유명계가 정말 세계의 전부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진선계의 선역들은 끝없이 펼쳐진 만황계역 내에서 떨어져 나왔으니 만황계역의 면적은 진선계보다 클 겁니다. 그러나 만황계역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지 정말 모르겠군요.”
“시야가 좁구만. 진선계, 회계 아니면 유명계도 전부 태초의 혼돈공간에서 태어난 것이야. 장천병도 그렇고. 장천병의 원시 기억에 따르면 혼돈공간은 무궁무진해서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진선계 같은 계면이 있는지 모른다네. 뭐 그게 다는 아니겠지. 어때, 한 수사도 나와 같이 세상의 끝을 향해 탐험을 떠나 보겠나?”
병령이 평소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진지하게 물었다.
“선배님의 높은 뜻은 감탄스럽지만 저는 막 큰 고난을 이겨내고 마음이 피로합니다. 저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요. 선배님과는 함께 하지 못하겠습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각자 갈 길이 있는 거니까.”
병령의 얼굴에 약간 아쉬움이 묻어났다.
“병령 선배님, 장천병도 없는데 이 시공간통로에서 어떻게 벗어나면 좋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장천병 병령인데, 장천병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리가 있나. 그보다 한 수사는 뭔가 걸리는 일이 있어서 장천병을 포기하기까지 고민이 길었을 거야.”
병령의 말을 들은 한립의 머릿속에 원요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을 접고 히죽 웃은 병령은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아쉬움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일 겁니다.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는지요?”
가볍게 숨을 내쉰 한립은 병령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너희 사람들의 감정이란 정말 복잡하지. 죽어봐야 그저 윤회로 돌아갈 뿐인데도 서로에게 집착을 버리지 못해. 네가 그간 나를 도와 여러 일을 해준 것을 봐서 원을 이루게 해주마. 다만 네 일에 나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야.”
병령의 말이 끝나고 녹색빛 속에서 손가락 크기의 투명한 병이 나타났다. 장천병과 모양과 기운이 거의 똑같았다.
“장천병의 마지막 남은 힘이다. 일회용 장천병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하거라. 어디든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야.”
병령이 투명한 병을 휙 던져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립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네 시간법칙의 조화면 정확한 시간대를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겠지. 남은 힘이 그리 많지 않으니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빨리빨리 움직여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됐네, 한 수사에게 진 빚도 갚았고. 여기서 헤어지지. 뭐 세상이 넓다고 해도 다시 만날 날이 있지 않겠어?”
병령은 손을 저어 보이고 흐릿하게 먼 곳으로 사라졌다.
한립이 작별 인사를 하려 했으나 병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야에서 벗어났다.
공수를 하려던 한립이 어색하게 코끝을 긁적였다.
잠시 후, 손에 든 투명 병을 본 그는 수결을 맺었다.
병에서 퍼지는 녹색 빛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시간파동을 지니고 있었다.
수결을 맺은 한립의 손짓에 병에서 확, 빛이 번져 그를 감싸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반 각 정도를 이동한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 여기쯤이겠어.”
그가 손을 저어 암녹색 빛으로 시공간통로를 갈랐다.
촤악!
다음 순간, 몸이 붕 뜬 것처럼 가벼워진 그는 어느 사막 위에 떠있었다.
쿠쿠쿵!
인근 허공이 한립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 만규공적술을 펼쳐 전신의 기운과 용솟음치는 법칙의 힘을 가둔 그는 의식을 퍼트렸다.
“제길, 공간의 힘이 부족해. 여긴 영계가 아니구나!”
병령의 도움 없이 투명한 병을 완벽하게 제어하기 힘들어 그가 가려던 곳에서 약간 벗어난 계면에 와있었다.
노란 모래가 가득한 이 낯선 계면은 어디란 말인가.
한립은 오랜만에 조급함을 느끼며 금빛 뇌전을 일으켜 사라졌다.
사막에 세워진 거대 건축물에 등장한 그는 머리에 길게 뿔이 달리고 비늘이 덮인 이종족 수사들을 찾아냈다.
그의 등장에 놀란 이종족 수사들은 곧장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은밀히 다닐 시간이 없었기에 얼른 그중에서 가장 강한 이종족을 끌어당겨 추혼술을 펼쳤다.
“황사계(黃紗界)였구나. 다행히 영계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야.”
마음이 놓인 그는 이종족 수사를 놓아주고 뇌전을 번득여 사라졌다.
남은 이종족 수사들은 자신들이 눈을 뜨고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한립에게 붙들렸다 풀려난 이종족 수사는 죽음의 문턱까지 온 느낌이었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 * *
영계 뇌명대륙 모처.
허공에 번개가 치고 한립이 나타났다.
곧 그의 강대한 의식이 영계 전체를 감싸고 다시 한번 천둥소리가 일었다.
* * *
무애해 깊은 곳의 어느 섬.
이삼십 리에 불과한 섬 주위로 파도가 철썩철썩 치고 있었다.
섬 위로 아름다운 오색구름이 떠서 짙은 살의를 품고 부단히 오색 뇌전을 번득였다.
그 도겁 구름 아래 하얀 장포를 입은 원요가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열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수결을 맺는 아름다운 그녀의 표정이 심각했다.
주위에 72자루의 찬란한 비검이 떠서 푸른 연꽃 모양을 이루고 있었고, 몇 개의 강력한 보물도 보였다.
섬 밖 허공에서 몇 명의 아리따운 여인들이 원요를 지켜보았다. 한립이 이곳에 있었다면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라 여겼을 것이다.
바로 그의 반려 남궁완, 연려, 빙봉과 은월 등이었다.
다들 수행이 대승기에 올랐지만 용모의 변화는 없었다.
오색구름이 꿈틀거리더니 거무튀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원요, 넌 해낼 수 있어! 힘내야 해!”
연려가 두 손을 꼭 쥐고 간절히 염원했다.
남궁완은 무시무시한 구름을 보고 걱정하는 기색이 스쳤지만 긴장된 얼굴로 원요가 있는 방향만을 바라보았다.
빙봉과 은월도 걱정스러웠으나 원요의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도록 속으로만 묵묵히 기원했다.
무언가를 감지한 원요가 수결을 맺는 속도를 높이며 푸른 검진과 보물들에 힘을 실었다.
콰릉!
천둥소리가 울리고 검은 구멍에서 불덩이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섬의 온도가 삽시간에 올라가 지면이 붉은 용암처럼 변하고 인근 바다의 바닷물이 증발해 뿌연 안개를 만들었다.
원요는 표정은 차분했지만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검기로 이루어진 푸른 연꽃이 빙글빙글 돌며 불덩이들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비승의 겁을 버티는 원요는 얼굴이 창백해져 가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푸른 검진을 자세히 보면 비검들에 잔 균열이 많이 생겨 오래지 않아 부서질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보물들도 상황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오색구름이 불덩이 비를 멈추었다.
뜨거운 열기와 수증기가 날아가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