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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241화 (1,998/2,000)

2241화. 선계 호령

*

백운도조는 살아남은 열댓 명의 천정 수사들을 보며 한동안 처량함을 느꼈다.

천정에 들어와 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고혹금의 말을 믿고 이원구, 진여연 등과 달리 충성을 다했다.

천정을 다스리는 일에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몰랐다.

그런데 위풍당당하던 진선계 최고의 세력인 천정이 하루아침에 진선계 사람 모두가 경시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제 천정의 핵심 인물들도 여기 모여 있는 사람이 전부였다.

이들도 그와 다른 천정 도조 둘이 최선을 다해 보호했기에 살아남은 것이고, 그 두 도조는 이미 삼천도신대진에 흡수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삼천도신대진이 도조를 흡수하는 속도가 다른 평범한 수사들에 비해 빠른 탓이었다.

아마 도조가 세상의 삼천대도와 가장 근접한 존재여서가 아니었을까?

“마주 대인께서는…….”

백의 뚱보 여인이 물었다.

“윤회 전주는 어디 계십니까?”

이원구도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윤회 전주와 마주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립은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 담담히 말했다.

마역 사람들에게 마주가 어찌 죽었는지 진상을 밝히지는 않았다.

이원구는 놀라 미간을 좁히고 무언가 생각에 잠겼고, 진여연과 적융 노조도 표정이 달라졌다.

백의 뚱보 여인 등 마역 사람들은 마주의 죽음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리 슬퍼하지는 않았다.

대신 석파공, 석경연 그리고 대라 후기 황자의 눈에 권력에 대한 열망이 빛나고 있었다.

“천지 창생을 위해 돌아가신 부황의 공로는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아직 백운 도조 등 위험인물이 남아 있으니, 한 선배님과 만황계역 동지들은 우리와 함께 천정의 잔당들을 뿌리 뽑읍시다!”

잘생긴 황자가 눈을 굴리더니 돌연 주먹을 불끈 쥐고 나섰다.

“맞습니다! 피의 대가는 피로 치러야 합니다! 천정을 가루로 만들고 말겠어요!”

다른 마역 사람들도 호응했다.

백택과 민머리 거한도 끌리는 얼굴이었지만 경거망동하지 않고 한립을 살폈다.

여기서 누구의 말이 가장 힘이 있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백운 도조가 안색이 급변해 손을 저었다.

순간, 하얀 구름이 둥실 떠올라 천정의 십여 수사들을 감싸고 번개처럼 달아났다.

“어딜 내빼려고!”

마역 간시 사내의 어둑한 노란 빛이 그 뒤를 쫓았다.

매혹적인 여인과 그는 부부의 연을 맺지는 못했지만 서로 오랜 세월 의지하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그녀가 삼천도신대진 안에서 죽었으니 천정 사람들을 뼈에 사무치게 증오하는 것도 당연했다.

촤악!

백운 도조의 머리 위로 하늘을 뒤덮을 것 같은 마른 뼈다귀 손이 나타나 진득한 노란빛과 썩은 내를 풍겼고, 노란 영역이 천정 무리를 뒤덮었다.

백운 도조가 무언가 방어를 하려 할 때 금빛이 횡으로 날아들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마른 뼈다귀 손은 금빛에 튕겨 나갔고 노란 영역도 펑, 터졌다.

금빛 속에서 나타난 것은 한립이었다.

그걸 보고 가장 놀란 건 백운 도조였다.

“한 수사, 뭐 하자는 겁니까?”

얼굴이 굳은 간시 사내가 물었다.

“진선계는 이번 고난으로 원기가 상해 오랜 세월 힘을 비축해야 할 겁니다. 고혹금이 이미 죽었으니 개인적인 은원은 접어두고 세력들 간에 더는 충돌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우리 같은 도조들은 더더욱 그렇고요.”

한립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파문도 일지 않는 고요한 목소리에 고혹금 못지않은, 아니 그를 넘어서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의 말소리에 허공이 덜덜 떨려 그 진동이 진선계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때 진선계 각지에 퍼져있던 수사들은 반항할 수 없는 위압감이 하늘에서 떨어지자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 자리의 모여 있는 수사들도 격렬히 몸을 떨며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고혹금도 죽었고, 우리 만황과 천정의 원한은 이것으로 청산하겠습니다. 천정이 우리 영역을 침입하지 않으면 우리도 괜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거예요.”

백택과 민머리 사내가 즉시 입장을 밝혔다.

이원구, 적융, 진여연 그리고 마역의 뚱보 여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간시 사내가 한립을 보는 눈에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어렸다.

“할 말이 더 있습니까?”

한 손으로 뒷짐을 쥔 한립은 폭발적인 위압감으로 간시 사내를 둘러쌌다.

발밑 허공이 찢어지고 전신을 덜덜 떨던 그는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한 수사, 단목 수사는 하란 수사의 죽음으로 상심해 그런 겁니다!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넘어가 주세요. 우리 모두 당신의 말에 따를 겁니다.”

뚱보 여인이 서둘러 나섰다.

한립은 그런 여인을 보고 간시 사내를 억누르는 압력을 거두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바로 일어서지 못하는 간시 사내는 한립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제 너도 이해했겠지?”

한립은 평온히 고개를 돌려 마역의 잘생긴 황자를 쳐다보았다. 그 황자는 안색이 창백해져 뒷걸음질 쳤다.

“마주와 생전의 친분을 생각해서, 그리고 처음인 것을 감안해서 이번만은 넘어가 주겠다. 내 비록 살생을 즐기지는 않으나, 다시 한번 사람들을 선동해 분란을 일으키면 이렇게 될 것이야!”

한립이 가볍게 소매를 펄럭여 사람들 주변으로 수십 개의 거대한 금빛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흡입력과 파괴력을 지녀 수십만 리 공간이 종이처럼 구겨지고 공간의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가운에 꼼짝없이 갇힌 사람들은 폭풍우 속에 돛단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것처럼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이원구, 진여연 같은 도조들도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들이 경악하고 있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수십 개의 소용돌이가 하나로 합쳐져 사람들을 향해 입을 벌린 것이다.

깜짝 놀란 이원구 등이 법칙의 힘으로 저항하려 할 때, 방대한 시간법칙이 먼저 모두를 둘러싸 육신은 물론 법칙의 힘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하늘을 뒤덮고 떨어지던 금색 소용돌이는 퐁, 거품처럼 터져 흩어졌다.

모두를 구금하던 시간법칙이 가시고 하늘은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어 모든 것이 꿈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금색 소용돌이가 사방에서 내뿜던 시간법칙의 무서움은 모두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 느껴본 천도에 가장 가까운 본연의 힘이었다!

한립의 신통은 고혹금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원구 등 도조도 그들이 뜻을 거스르면 세상에서 먼지 찌꺼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을 알고 한립에게 경외심을 드러냈다.

“각자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세요.”

한립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백의 뚱보는 그를 향해 깊이 예를 올린 다음, 겁에 질린 마역 수사들을 이끌고 제일 먼저 자리를 떴다.

간시 사내도 아무 말 없이 마역 무리를 따라갔다.

“존명!”

백택과 민머리 사내도 한립에게 예를 취하고 만황계역 생존자들을 이끌고 떠났다.

류낙아는 한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다가가 그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와의 거리는 백 장에 불과했지만 마치 거대한 해양이 가로막고 있는 듯 멀게만 느껴졌다.

‘오라버니, 기다려요. 나 열심히 노력해서 언젠가 당당히 오라버니 앞에 설 거예요.’

류낙아는 백택 등을 따라 떠나기 전 다짐했다.

백운 도조가 수하들을 이끌고 한립에게 다가갔다.

“한 수사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백운이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다른 천정 수사들도 함께했다.

“큰 혼란이 지났는데 또 살육전이 시작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을 뿐, 당신들을 도운 게 아닙니다.”

한립은 담담히 말했다.

“그리 얘기하셔도 한 수사의 은혜는 마음속 깊이 새겨둘 겁니다. 앞으로 시키실 일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오늘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할 겁니다.”

백운 도조는 진심으로 말하고 천정 수사들과 같이 날아갔다.

“당신들은 왜 안 가고 있는 겁니까? 아직 해야 할 일이라도 남은 겁니까?”

한립은 한쪽의 이원구, 적융, 진여연을 보고 말했다.

“한 수사는 진선계를 구해 천하창생에 더없이 큰 공덕을 쌓았습니다. ……고혹금이 죽어 천정의 지존 자리가 비었는데, 한 수사께서 맡으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저희 셋이 힘을 모아 수사를 보좌하겠습니다.”

다른 둘과 시선을 교환한 이원구가 말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자신이 백운 도조를 구한 게 그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어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권력을 좇는 사람이 아니니 괜한 오해는 마세요.”

손을 젓는 그를 보고 이원구 등이 멍하니 서 있었다.

“진선계의 수많은 도조가 죽어 여러 선역이 한동안 혼란스러울 겁니다. 세 분은 본원 도조이니 각자의 종문으로 돌아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세요.”

한립의 말에 이원구 등도 자신들의 어깨에 실린 무게를 느끼며 그곳을 떠났다.

인사를 하고 막 날아오른 이원구는 왠지 모를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한립이 멀리서 그를 향해 공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멈칫하면서도 공수를 해 답례를 하고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한 수사, 왜 이렇게 급하게 모두를 쫓아 보낸 거예요?”

금동이 허공에 홀로 남은 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립은 말없이 금동을 데리고 고공으로 치솟아 천외역에 이르렀다. 천외역 깊은 곳에 멈추고 나서야 그는 고통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에요?”

금동이 급히 물었다.

한립의 머리 위에서 쿠르릉, 진동이 울리고 금빛이 그를 감싸는데 꼭 그를 녹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진동이 멎고 금빛이 가시자 한립은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천도 침식이 시작된 거군요.”

금동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고혹금과의 일전으로 법칙의 힘을 과도하게 써서 아마 다음번에 누군가와 싸워야 한다면 천도와의 융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립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어째서 이렇게 빨리…….”

놀란 금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도 도조이고 다른 이들과 여러 차례 싸워봤지만 천도 침식의 정도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해결 방법은요?”

금동이 의혹은 떨쳐두고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러나 한립은 답할 말이 없었다.

이제 막 도조에 이르러 고혹금처럼 천도 침식의 문제를 오래 연구한 것도 아닌데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녀석아, 천도 침식에서 벗어날 방법을 내가 하나 알고 있다.”

의식 속에서 병령이 돌연 말을 걸어왔다.

“병령 선배님?”

“도조가 되어 차츰차츰 천도에 침식당하는 것은 되돌릴 수도 막을 수도 없지. 고혹금이 만들어낸 도신인이라는 술법도 천도 침식의 속도를 줄이는 것에 불과하고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못되었다.”

“그렇다면 선배님은 영원히 천도 침식을 막는 방법을 아신다는 겁니까?”

“장천병이 있으니, 네 운이 좋은 게지. 혼돈 속에서 태어나 수많은 법칙의 힘을 품은 보물이 아니냐? 정말 천도 침식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체내의 도조본원법칙을 병 속에 주입하거라. 그러면 수행이 대라로 떨어지겠지만 자연스럽게 천도 침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혼돈법칙을 흡수한 장천병에 네 시간법칙까지 담으면 아마 병의 한계를 초월하게 될 게야.”

“한계를 초월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한립은 급히 물었다.

“병이 한계를 초월하면? 그냥 사라지는 거지……. 다시 말해 이 방법을 쓰면 넌 영원히 장천병을 잃게 된다. 잘 생각해 결정하거라.”

병령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충고했다.

전음으로 병령과 대화를 나누던 한립은 우두커니 서서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천정의 일인자인 고혹금을 죽이고 그 대신 시간도조가 되어 그가 평생을 쫓던 대도는 이룬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원하기만 하면 진선계의 명실상부한 일인자로 남아 진선계는 물론 수많은 하계를 손에 쥐고 흔들 수도 있었다.

세상과 수명을 함께하는 것, 그가 소년 시절 수도계에 발을 들이며 꿈꿔온 몽상이 아닌가?

그 뒤로 얼마나 오랜 세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모두를 경계하고 수행을 위해 노력하며,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던가.

이런 생각들 뒤로 골황 그리고 고혹금 등이 천도에 잡아 먹혀 죽어가던 광경이 머릿속에 휙휙 스쳐 지나갔다.

어린 시절 세운 목표가 그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금동은 한립과 병령이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줄은 몰랐으나, 심각한 그의 표정을 보고 옆에서 방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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