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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240화 (1,997/2,000)
  • 2240화. 떠나다

    *

    윤회가 정상으로 돌아가고 모든 이들이 안정을 찾았지만 단 한 사람만 예외였다.

    고혹금의 혼백은 혼돈의 몸을 떠나 있었다.

    이제야 그는 세 사람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 겁에 질렸다. 어떻게든 몸으로 돌아가려 허우적거리는 그를 금빛이 먼저 가로막았다.

    한립이 만들어낸 금색 용들에 달과 별, 산과 강이 융합되어 흉흉한 기세를 품고 떨어져 내렸다.

    날카로운 검빛보다 먼저 시간법칙이 퍼져 그를 정지 상태로 만들었다.

    이어 천살진옥공을 발동하고 통천검진으로 힘을 모은 대오행멸절권의 힘이 검빛에 실려 공간을 부수면서 고혹금의 몸에 꽂혔다.

    폭음이나 진동도 없이 그저 어둑한 빛이 조용히 모든 것을 멸하고 중토선역을 횡으로 가르는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냈다.

    고혹금의 혼백이 먼저 부서지고 혼돈의 힘을 응결한 몸은 차츰차츰 흩어져갔다.

    세상 만물이 색과 소리를 잃은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이런 순간이 수십 초간 이어지다가 암녹색 빛이 혼돈의 몸에서 빠져나와 어둠을 밝혔다.

    콰콰콰콰…….

    뒤이어 연달아 폭음이 계속되었다.

    검빛이 떨어진 곳에 고혹금은 가루가 되어 있었고, 검빛이 시작된 곳에는 한립이 서 있었다.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는 창백한 얼굴로 눈코입귀에서 금빛 피를 줄줄 흘렸고 왼쪽 어깨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곧이어 검은 연기가 사라지자 왼쪽 어깨 아래쪽이 천도의 침식으로 사라진 것이 보였다.

    하나 남은 손으로 금빛 피를 훔쳐낸 그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 은색 빛의 문이 나타나 남궁완이 빠져나왔다.

    전방의 분해된 허공과 하늘과 땅을 가르고 난 거대한 균열을 보고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부군…….”

    정신을 차린 남궁완이 얼른 한립을 부축했다.

    한립은 기뻐하는 기색 없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고혹금을 죽였소…….”

    “정말요? 정말 다행이에요!”

    좋아하던 남궁완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그 사람은…….”

    “윤회 전주는, 고혹금을 죽이기 위해 막대한 윤회의 힘으로 고혹금의 혼백을 끄집어내고 천도에 융합되어 사라졌소.”

    그녀의 의혹 어린 시선에 한립이 탄식했다.

    눈빛이 흔들리며 남궁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팟.

    그때 그녀의 미간에서 흐릿한 허상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한립은 그게 아직 남아있던 실낱같은 감구진의 잔혼임을 알아보았다. 아주 미약해서 바람만 불어도 사라질 것 같았다.

    허공을 떠돌던 잔해 속에서도 갑자기 암홍색 빛이 반짝여 똑같이 잔혼 한줄기가 날아들었다.

    놀랍게도 육도윤회반의 한 귀퉁이가 윤회 전주의 잔혼을 품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두 잔혼은 서로를 찾아 감싸 안았다.

    재회한 그들은 함께 고개를 돌려 한립과 남궁완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나를 대신해 구진을 돌봐 준다면,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

    한립의 의식 속에 윤회 전주의 목소리 같은 게 흘러들었다.

    그가 대답하기 전에 두 잔영이 서서히 고공으로 올라가다 흐릿하게 사라졌다.

    ‘그러겠습니다.’

    한립은 마음속으로 묵묵히 답했다.

    “저들에겐 이게 가장 좋은 결말이었겠죠?”

    남궁완이 한립의 어깨에 기대며 슬피 물었다. 이 말에 한립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미간을 좁힌 한립이 마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석 수사,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사이에 어렵게 얻은 새 기회를 중히 여기시지요.”

    남궁완도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돌려, 마주가 어느새 장천병을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수사가 착각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난 고혹금의 생각에 반대해서 힘을 합쳐 싸운 게 아니에요. 내가 먼저 그렇게 해야 했는데 한발 늦었기에 고혹금을 막은 겁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간 마주가 담담히 말했다.

    그를 쳐다보던 한립이 남궁완에게 말했다.

    “먼저 돌아가 있으면 가겠소.”

    “조심해야 해요.”

    남궁완은 그를 믿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은색 문이 열리고 남궁완이 화지동천으로 돌아갔다.

    “강자가 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온갖 고난을 헤쳐 온 이유는 스스로가 하늘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세상의 꼭대기에 올라보니, 천도라는 것이 머리 위에서 숨도 쉴 수 없게 억누르고 있어요. 수사는 이미 왼팔을 천도에 잠식당했습니다. 하늘을 뒤집고 싶지 않으십니까?”

    마주가 그를 방해하지 않고 하늘을 가리켰다.

    “하고 싶은 대로만 하다 보면 자신을 망치는 법이지요. 천도 법칙 아래 어떤 강자라 해도 마음대로 날뛰지 못하기에, 세상이 망가져 혼돈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와 달, 만물이 공존할 수 있는 겁니다.”

    “하하, 한 수사가 세상의 약자를 비호하는 쪽일 줄은 몰랐습니다?”

    “꼭 싸워야겠습니까?”

    마주가 웃자 한립도 마주 웃으며 물었다.

    “꼭 싸워야 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은 반드시 죽어줘야겠습니다. 중상을 입은 지금 죽여 놓지 않으면, 내 앞으로 불안해서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웃고 있던 마주의 얼굴이 점점 싸늘해져 갔다.

    말을 하며 슬쩍 물러난 그가 공간파문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한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간파동을 일으켜 만 리 허공의 시간 흐름을 멈추고, 그 사이로 미세하게 드러난 틈을 향해 검을 찔러갔다.

    파칙!

    금색 뇌전이 틈으로 파고들어 쾅! 하고 폭발을 일으켰다.

    “이런, 부상이 정말 가볍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때 한립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빛이 강대한 공간법칙을 품고 겹겹이 둘러싸 한립을 그 자리에 고정시켰다.

    “죽어라!”

    마주가 마기를 품은 다섯 개의 손가락을 들어 한립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고혹금을 베어낸 일격에 거의 모든 법칙의 힘과 선령력을 써버린 한립은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 앞에 거대한 금색 딱정벌레가 나타나 머리로 마주를 받아버렸다.

    꽈앙!

    마주가 엄청난 힘에 날아가고, 치명적인 일격을 대신 받아낸 금동은 허공을 찢어 한립을 가둔 공간법칙의 힘을 뜯어냈다.

    “서금선……. 도조!”

    몸을 가눈 마주가 놀라 금동을 보았다.

    한립이 서금선을 곁에 두는 것은 알았지만 그 영충이 도조에 이르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앞서 격전에서도 서금선은 나타나지 않았고, 윤회 전주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마주도 막대한 힘을 소모했고 부상을 입어 한립과 금동이 힘을 합쳐 싸우면 승산이 없었다.

    무의식중에 손에 쥔 병을 내려다본 마주는 눈을 반짝였다.

    작은 병 입구에서 은빛이 치솟아 무수히 많은 실로 변해 그의 손바닥으로 흘러들었다.

    “으하하!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그걸 보고 있던 한립은 놀란 기색도 없이 소매 속에서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작은 병 안에 들어가 장천병을 연화시키지는 못했어도 세상 누구보다 견고한 연계를 맺고 돌아왔다.

    마주가 자의로 공간법칙의 힘을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한립의 조종하에 병이 강제로 힘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주의 웃음소리가 빠르게 멈추었다.

    그도 막대한 공간법칙 힘 속에 혼돈법칙이 스며들어 몸속에 박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와서 막으려고 해도 늦어버렸다.

    “한립, 당신…….”

    그가 말을 마치기 전에 팔과 다리가 퉁퉁 부풀어 올라 혼돈의 빛을 남기고 터졌다.

    터져나간 살점과 핏물 속에서 미세한 은빛이 여덟 마리의 말이 이끄는 작은 마차를 이루고 혼백 소인을 태워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당신은 도망치지 못합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제가 배웅을 하지요.”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시간파동으로 마차를 감싸 멈추게 하고 한걸음에 그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마차와 마주 혼백을 불러들인 그는 무표정하게 그것들을 비틀어 형체도 없이 없애버렸다.

    혼란으로 가득 찬 주변을 살피고는 마음이 복잡했지만 작은 병을 불러들여 익숙한 촉감을 느끼다 보니 마음이 차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 순간, 암녹색 병에서 홀연히 금빛이 일어나 시간법칙의 힘을 그의 몸에 주입했다.

    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는 것처럼 선규 하나하나가 시간법칙의 힘으로 촉촉하게 차오르자 피로감이 가시고 그의 눈이 맑아졌다.

    혼돈법칙의 영향이 가셔서 혼란스러워졌던 천도가 정상 궤도로 돌아가고 세상도 원래의 기운을 되찾고 있었다.

    그저 그가 만들어낸 거대한 허공균열만 봉합되지 않았다.

    이곳은 시공간이 멈춰있고 윤회는 간섭하지 못해 영원히 모두의 머리 위에 남은 흉터가 될 것 같았다.

    중토선역도 대부분 영토가 사라지고, 남은 구역들은 분산되어 실락 계면들처럼 변했다.

    그러나 천지영기가 짙고 천도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백만 년만 있으면 소형 대륙을 응결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선역과 하계의 계면들을 뒤흔들었던 소란이 가라앉았다.

    “재난이 지난 것인가?”

    죽다 살아난 여러 계면의 생령들은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자 격세지감을 느끼며 이런 생각에 잠겼다.

    세상이 창조되고 억만 창생과 함께 멸망할 위험에 처한 것이 처음은 아닐지 몰랐다.

    그저 세월이 흘러 천지와 생령들은 모든 것을 잊었다.

    세상이 정말 멸망하지만 않는다면 누군가는 살아남아 역사는 계속된다.

    재난 속에서 오랜 균형이 깨지고 새로운 균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멸망의 난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 * *

    구유명계, 황천대택 깊은 곳.

    감구진이 아득한 윤회강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옅은 바람소리가 들리고 암홍색 무언가가 그녀 앞에 떨어져 감구진을 몇 걸음 물러서게 했다.

    빛 속에 떠있는 육도윤회반을 보는 감구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그 위에 연하게 드러난 표식은 평범한 사내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 윤회반의 표식을 손끝으로 훑은 감구진은 차차 결연한 표정으로 변했다.

    “아버지, 어머니 안심하세요. 제가 윤회법칙의 도조가 되어, 아버지 어머니를 구할 방법을 찾을 거예요.”

    * * *

    유리잔처럼 산산 조각난 중토선역 고공에 한립이 고요히 떠있었다.

    금동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 옆에 섰다.

    혼돈 소용돌이가 있던 찢어진 허공에서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몰골이 말이 아닌 모습으로 튀어나와 그와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가장 앞에 선 8명은 이원구, 적융, 진여연, 백운도조, 마역의 백의 뚱보 여인, 간시 사내, 만황계역의 백택과 대머리 사내였다.

    여덟 도조 뒤로 수십명의 수사들이 세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 천정, 마역, 만황 세 구역의 수사들이었는데, 회계 쪽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창오진군 등 3명의 도조도 보이지 않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류낙아, 리기마 등이 백택과 민머리 사내 뒤에 서 있었다.

    백의 뚱보 여인과 간시 사내 뒤에는 열댓 명의 마역 수사들, 3황자 석파공, 5공주 석경연 그리고 대라 후기의 잘생긴 황자가 보였다.

    다들 몸이 성한 구석이 없는 것이 된통 고생한 게 틀림없었다.

    한립은 그들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진작 그들이 살아 있는 것을 감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천병이 혼돈 소용돌이를 취할 때 공간 폭풍에 휩쓸려 사라졌다가 탈출한 것에 불과했다.

    이원구 등은 허공에 떠있는 한립과 금동을 보고, 특히 근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드러낸 한립을 보고 놀라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한 수사, 전투 결과는 어찌된 것입니까?”

    그나마 한립과 친분이 있는 백택이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모두 끝났습니다. 고혹금이 죽고 삼천도신대진은 붕괴되어 이번 재난은 지나갔습니다.”

    한립은 엄숙히 선포했다.

    그 말에 백택 등 만황계역과 마역 사람들은 안심하거나 환호성을 내질렀다. 천정 사람들도 다양한 표정을 지었는데 좋아하는 이도, 허탈해하는 이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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