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238화 (1,995/2,000)

2238화. 대도귀일(大道歸一)

*

“삼천대도가 장천병 안에 담겨 있었을 줄이야…….”

한립은 작은 병 안의 세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양한 색깔의 빛들은 정지해 있는 게 아니라 각각 규칙성을 가지고 유유히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한참을 날아가던 한립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 삼천대도를 어떻게 연화시킨단 말인가?’

그런데 몇 개의 빛덩이들이 특별한 박자를 가지고 깜빡거리며 마치 그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 빛이 반짝이는 곳으로 다가간 한립은 그것들이 각각 금속, 나무, 물, 불 등 오행법칙과 뇌전법칙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공간 중심으로 갈수록 분포된 법칙 빛덩이의 수는 줄었지만 함유된 법칙의 힘은 짙어졌다.

가장 중심부에는 거대한 혼돈구름이 떠있었고, 그 주위로 금색, 은색, 암홍색의 거대 광채 덩어리가 보였다.

혼돈구름이 내뿜는 기운은 바깥의 혼돈 소용돌이와 같았고 그 주위의 세 가지 광채 덩어리는 시간, 공간, 윤회법칙이었다.

그중 가장 친근한 시간법칙에 다가서자 시간법칙의 힘이 실처럼 풀려나와 그의 의식 속으로 흘러들었다.

미약한 존재였던 한립의 의식이 충만해지면서 풍경도 달라졌다.

혼돈법칙에서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퍼져 나와 삼천대도가 이룬 빛덩이들을 연결하고 거대한 그물을 만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시간법칙과 연결된 한립도 그 그물의 일부가 되어 전신에서 빛을 반짝였다.

외부 세계, 혼돈 소용돌이의 빛이 융성해지면서 육도윤회반을 점점 밀어냈다.

“석 수사.”

윤회 전주는 전력을 다해 윤회반을 조종하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마주가 진작 수결을 맺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고혹금 측면 허공에 공간의 문이 생겨 윤회 전주와 마주의 공격을 끌어들였다.

“으하하. 하하하!”

고혹금은 현란한 빛에 잠식되어서 미치광이처럼 웃어대고 있었다.

“우리의 공격을 이용해 혼돈법칙 흡수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혼돈도조가 되는 데 성공하면 혼돈 소용돌이를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윤회 전주가 미간을 찌푸리고 육도윤회반으로 혼돈 소용돌이에서 뻗어 나오는 혼돈 빛기둥을 흐트러트렸다.

‘저건 무슨…….’

그러다 마주가 힐끗 한립을 보고는 놀란 기색이 스쳤다.

그는 얼른 수결을 변화시켜 공간 결계를 쳐서 가부좌를 틀고 허공에 뜬 한립을 격리했다.

그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기이한 빛을 고혹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 * *

같은 시각, 병 속 공간.

한립의 의식은 거대한 하얀 빛 덩이가 되어 낮게 중얼거렸다.

“천도가 시작되고 억만 생령과 수많은 법칙의 근원이 되어 삼천대도를 이루었기에 무엇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순 없다. 음이 없으면 양도 없는 것처럼 천지 만물과 온갖 법칙도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게 바로 천도이다.”

삼천 법칙은 오행의 속성을 지니고 각자 본원의 법칙으로 회귀해 결국에는 혼돈법칙으로 융합되었다.

천둥소리가 들리고 혼돈법칙의 구름이 암녹색으로 변해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한립이 눈을 뜨고 일어났다.

한립의 전신에서 일어난 파동이 마주가 펼쳐 놓은 결계를 산산조각내고, 그는 두 눈이 오색 광채로 뒤덮인 채 두 손으로 장천병을 하늘을 향해 받쳐 들었다.

장천병이 고공에 둥실 뜨자 한립은 고풍스러운 수결을 맺으며 입을 열었다.

“대도귀일(大道歸一), 수섭만물(收攝萬物)!”

순간 작은 병에서 이상한 광채가 빈번하게 반짝거리고 표면의 문양들이 빛을 내면서 암녹색 구름 덩어리들이 튀어나와 수십만 리를 이루는 암녹색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꿈틀거리는 소용돌이 속에서 부단히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마주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전세를 역전할 기회가 온 겁니다.”

희색이 스친 윤회 전주가 밝게 웃었다.

콰릉!

암녹색 소용돌이에서 채찍처럼 기다란 뇌전이 퍼져나가 주변을 찢었다.

아주 멀리서 마주 떠있는 커다란 혼돈 소용돌이가 감응을 하듯 중앙에서 빛을 반짝였고, 그 가운데 박힌 고혹금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혼돈법칙과 연결된 그는 새로 나타난 암녹색 소용돌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고혹금이 두 손을 깍지를 끼고 전방으로 힘차게 뻗었다.

돌연 돌풍이 불며 혼돈 소용돌이 속에서 혼돈 빛기둥이 만발해 암녹색 소용돌이로 향했다.

“그래, 와라!”

그걸 본 한립이 노호성을 터트리고 두 손에서 금빛을 방출해 작은 병으로 흡수시켰다.

병 입구의 암녹색 소용돌이가 하늘을 삼키려는 괴수처럼 커져 먼저 빛기둥들을 향해 다가갔다.

둘 사이의 충돌에 예상했던 굉음이나 충격은 전해지지 않았다.

빛기둥들이 암녹색 소용돌이를 두부 자르듯 부드럽게 파고들다 회전하는 소용돌이에 의해 꺾여 둘둘 휘감기고 말았다.

거대한 힘에 꼬인 밧줄처럼 변한 빛기둥들이 두 소용돌이를 잇는 다리가 된 것이다.

다리가 연결되자 양쪽 소용돌이에서 천둥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혼돈 소용돌이는 중토선역을 거의 다 집어삼키고 다른 선역의 천지영기까지 끌어들이고 있어요.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장천병으로 감당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윤회 전주는 암녹색 소용돌이가 혼돈 소용돌이와 겨루며 힘이 달리는 것을 보고 걱정을 드러냈다.

“두 분께서 도움을 주셔야겠습니다!”

고공에서 한립이 소리쳤다.

윤회 전주와 마주가 시선을 마주치고 망설임 없이 각자의 신통으로 장천병에 윤회, 공간법칙을 쏟아부었다.

금색, 은색, 암홍색 빛의 거대한 빛기둥이 한립, 마주, 윤회 전주의 몸에서 솟아올라 장천병으로 흘러들었다.

주술문자를 반짝거리며 몸집을 키운 병은 웬만한 탑 크기로 커졌고, 병 입구에서 무언가 흐릿한 인영이 나타나 병을 고공으로 이끌었다.

“병령 선배님…….”

한립이 그 흐릿한 인영을 보고 중얼거렸다.

병령의 인도에 법칙의 힘들이 변한 빛 덩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 다채롭게 융합되더니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 익숙한 모순된 기운을 내뿜었다.

한립은 그 모순된 기운을 알고 있었다.

천도가 함유한 광명정대하지만 잔인하고 냉담한 기운이었다.

세상천지 만물을 품되 그들을 전혀 가련히 여기지 않고 유유히 흘러가는 천도의 기운!

다채로운 색깔의 띠가 병령을 따라 다채색 용처럼 암녹색 구름으로 접어들어 혼돈 소용돌이를 향해 뻗어 나갔다.

고혹금은 그걸 뻔히 보면서도 막지 않았다.

오만해서가 아니라 두 소용돌이가 격전을 펼치고 있어 그도 진법을 전력으로 운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혼돈의 힘을 너무 얕보는 것 아니냐? 겨우 장천병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어리석은 것들!”

고혹금이 그들을 비웃고는 소매를 펄럭였다.

꿈틀거리는 혼돈 소용돌이에 모호하게 거대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려 했다.

윤회 전주가 그 얼굴을 보고 긴장해 소리를 높였다.

“고혹금이 혼돈과 하나가 되려 합니다. 저 얼굴이 완성되면 모든 게 끝이에요!”

그 소리에 마주가 더는 힘을 남겨두지 않고 전신의 마기를 미친 듯이 일으켜 머리에 굽은 뿔이 두 개 난 마물로 변신했다.

마물의 한걸음에 거대한 은색 파문이 일어 수천만 리를 퍼져나가다 사라졌다.

그때 진선계 각지에서 공간이 격렬히 흔들리며 공간법칙 도조의 탄생을 환영했다.

한립에 이어 대라 최고봉에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배회하던 마주도 한 걸음을 더 나아간 것이다.

실질적으로 그와 윤회 전주는 도조가 될 수 있는 모든 자격을 갖추었지만 고혹금을 경계하고 또 천도 침식이 염려되어 스스로를 대라 최고봉에 가둬두었었다.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이제는 그런 것을 걱정할 수가 없었다.

눈빛에 열기가 어린 마주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고혹금 주변 허공이 무형의 공간압력에 쪼그라들어 그와 혼돈 소용돌이를 단절시키려 했다.

쾅!

고혹금의 육체가 터지면서 회색 먼지가 날렸다. 하지만 잿빛 속에서 그의 몸은 뭉쳐 회복되었다.

“합도(合道)가 끝나가고 있다! 너희가 무슨 짓을 해도 헛수고일 것이다!”

고혹금이 신나게 웃어 젖혔다.

그 순간 눈을 감고 장천병 조종에 집중하던 한립이 씩 웃음 지었다.

“헛수고? 그럴 리가!”

거대한 혼돈 소용돌이 속에 눈부신 다채색 광채가 떠올라 수천만 장 크기의 용으로 변해 소용돌이 안을 헤엄쳤다.

용머리 위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당당한 신영은 병령이었다.

마음껏 소용돌이 속을 배회하던 용이 혼돈 소용돌이 중앙을 관통해 장천병 입구로 방향을 틀었다.

다채색 용을 따라 혼돈 소용돌이가 거대한 깔때기가 된 것처럼 혼돈구름을 미친 듯이 장천병 안으로 흘려보냈다.

“아, 아니야. 안 돼!”

깜짝 놀란 고혹금이 괴성을 내질렀다.

양손으로 신속히 수결을 맺어도 혼돈 소용돌이가 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소용돌이에 몸이 묶인 그도 점차 병 입구와 가까워졌다.

촤아악!

격노한 그가 혼돈 소용돌이 속에서 방대한 빛기둥을 일으켜 자신과 소용돌이를 갈라냈다.

그렇게 혼돈 소용돌이가 장천병으로 흡수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혼돈 소용돌이를 흡수한 장천병은 다양한 빛깔로 반짝였고 투명해진 병 안에서 회색 소용돌이가 움직이는 게 다 보였다.

거대한 크기를 유지한 장천병이 좌우로 흔들리며 진동하고 있었다.

“병령 선배님, 장천병이 이러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의식으로 물었다.

“설명하고 있을 시간 없다. 난 장천병을 도와 혼돈의 힘을 제압해야 해!”

병령은 초조한 목소리로 답했고, 한립도 더는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도 장천병을 연화시키려 해보았지만 결국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 안에 품은 천도에 가까운 힘은 수행이 높고 강하다고 해서 장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변수. 변수! 변수……. 내 네 놈을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혼돈 안개 속에서 고혹금이 이를 갈며 소리를 내질렀다.

찌르는 듯한 살기가 실체화되어 혼돈의 힘을 드러냈다.

“그렇게 날 죽이고 싶다면 어디 그래 보시던가요.”

뒷짐을 진 한립은 미소 지었다.

“방심하지 말거라. 저 녀석은 혼돈 도조가 되기 직전의 상태라 천도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야. 상대는 전력을 다해 싸울 수 있지만 우리 쪽은 천도 침식을 걱정하며 싸워야 한단 뜻이다.”

윤회 전주가 전음을 보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방 허공이 무너져 내리고 고혹금이 회색 안개에 녹아들어 촉수와 같은 혼돈 안개를 퍼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혼돈 소용돌이가 법칙의 힘을 받지 못하자 고혹금이 폭주하는 것 같습니다. 천지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 허공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지요.”

놀란 마주의 물음에 윤회 전주가 답했다.

“석 수사, 일단 이곳을 봉쇄해서 더는 힘을 흡수하지 못하게 해주셔야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마주는 전력을 다해 법칙의 힘을 발동했다.

등 뒤로 은색 날개를 펼친 그의 주위로 수천만 리에 달하는 은빛 장막이 만들어졌다.

두 날개가 접혔을 때는 일대의 공간이 외부와 격리된 후였다.

“철저히 봉쇄해 두었습니다만, 공간격리를 유지하려면 전투에서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겁니다.”

“석 수사는 공간봉쇄만 신경 써 주세요.”

한립이 답하고 윤회 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주는 신영이 허상화되어 공간결계 속으로 녹아들었다.

결계 동서남북에 사람 형태의 조각상이 하나씩 떠올랐는데 각각이 마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결계 하부와 상부에는 거대한 은색 진법이 떠올라 은빛 깃털 문양을 반짝였다.

이때 안개가 흩어지고 모습을 드러낸 고혹금은 이전의 신선 같던 풍모는 사라지고 머리는 산발하고 의복은 찢어져 주화입마에 든 광인처럼 보였다.

천도에 집어 삼켜져 손상을 입은 두 다리를 회복해 맨발로 선 그는 두 눈에 짙은 살의와 혼돈의 흐름을 품고 한립을 노려보았다.

섬뜩해진 한립은 72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을 불러내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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