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6화. 도천대겁(道天大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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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망가진 몸을 수축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늘을 가득 채우던 혼돈신뢰가 빠르게 흩어졌다.
육도윤회반은 여전히 하늘에 떠있었지만 표면에 몇 줄기 금이 가 있고 암홍색 빛은 암담해져 있었다.
그 뒤로 빛이 번쩍이고 윤회 전주가 창백한 얼굴로 날아올랐다.
혼돈신뢰에 저항하느라 기운을 크게 소모한 것이 분명한 윤회 전주는 고개를 돌려보고 안색이 더 가라앉았다.
마주가 몸을 숨기고 있던 고치가 사라지고 산산 조각난 유골이 한 구 둥실 떠있었는데, 바로 마주의 것이었다.
다른 쪽의 한립은 마주보다는 나았지만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으하하! 혼돈신뢰의 맛이 어떠냐! 널 도우러 온 이들이 끝장났는데 혼자서라도 계속 복수를 할 생각이냐?”
고혹금이 흡족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혼돈신뢰의 위력은 대단하지만 끝까지 가보지 않고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차갑게 웃은 윤회 전주가 돌연 뒤로 물러서며 입을 크게 벌려 암홍색 빛덩이를 내뱉었다.
수십 개의 암홍색 실을 품은 빛덩이가 육도윤회반에 녹아들었다.
웅웅웅웅!
거대한 힘이 무주의 잔해와 허약해진 한립을 육도윤회반 쪽으로 끌어들였다.
검은빛을 반짝인 육도윤회반이 검은 구멍 6개를 만들어내 마주의 잔해를 집어삼켰다.
윤회 전주가 열 손가락을 춤추듯 움직이자 윤회반은 눈부신 암홍색 빛을 번득였다.
그걸 본 고혹금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오세요!”
수결을 멈춘 윤회 전주가 허공을 내리쳤다. 윤회반의 다른 구멍에서 번득 마주가 날아올랐다.
온몸의 상처가 회복된 마주는 놀랍게도 살아 있었다. 마주 스스로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사회생(起死回生)!”
고혹금이 동공을 수축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전주!”
마주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고 윤회 전주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윤회법칙으로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되돌리기는 했지만 그 대신 수사의 혼백이 환생할 기회를 한 번 잃었으니까요.”
고개를 저은 윤회 전주는 한립을 향해서도 술법을 펼치려 했다.
“엇!”
그러던 그가 놀라 손짓을 멈추었다.
허공에 둥실 뜬 한립은 호흡이 거의 멈춰져 있었고, 겨우 남아 있던 시간법칙은 서서히 흩어지며 오감을 잃어갔다.
‘이렇게 죽는 것인가?’
의식이 흐릿해지던 한립은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전혀 두렵지는 않았다. 반대로 화신 억만 개가 생겨 세계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느릿하게 변해 원기의 파동이며 빛의 움직임이 느릿느릿 그의 시야에 잡혔다.
눈은 보이지 않는데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감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무(無)로 돌아가 세상으로 녹아드는 중이란 말인가?’
‘수도를 하며 살아온 일생 동안 한순간도 긴장을 풀거나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건만, 결국에는 이번 고난을 피하지 못하는 구나…….’
‘그렇다면 진작 목숨을 잃은 다른 수사들에 비해 그저 헛되이 세월만 낭비한 셈이 아닌가.’
‘완이, 미안하오…….’
‘다음 생에는……. 속세의 범부로 태어나 불로장생과 수행을 논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선인도 부러울 것이 없겠구나.’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면서 그 안에 약간의 슬픔과 처량함이 깃들었다.
그때 주변으로 힘없이 퍼져나가던 금빛, 그러니까 시간의 힘들이 속도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의 몸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세상 모든 것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금빛들은 다섯 줄기의 홍수로 변해 그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더없이 익숙한 대오행환세결의 다섯 가지 시간법칙이었다.
잃었다가 다시 얻게 된 시간법칙은 그의 몸 안을 더욱 충만하게 채우고, 사라졌던 오감을 순식간에 회복시켰고, 다섯 줄기 시간법칙의 힘이 한립의 체내를 미친 듯이 돌며 전신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어 대오행환세결 구결이 그의 의식세계에 흘러들어 마치 그가 알지 못하는 공법처럼 낯설면서도 더 깊이 있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립이 몸이 가장 가벼워졌다고 느낄 때 쿵, 하고 금빛이 번지며 거대한 금색 문이 열려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시간법칙이 끊임없이 흘러들어 그가 담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금빛은 더욱 많이 흘러넘쳐 백골로 주입되고 있었고, 천지원기들도 벌떼처럼 그의 몸으로 달라붙고 있었다.
망가진 몸에 새살이 돋아 부상을 회복하고, 금빛이 모락모락 일어나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기운을 발산했다.
중토선역의 모든 천지영기가 그의 몸속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의 시간 유속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윤회 전주, 마주 그리고 고혹금은 한립의 변화에 안색이 급변했다.
그들의 시점에서 보면 죽어가던 한립이 느닷없이 더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윤회 전주와 마주는 격동했다.
한립의 변화는 괴이했지만 그 기운은 익숙했다.
도조에 진입하는 징조였다.
“고혹금이 있는데, 어떻게 한 수사가 시간도조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기쁨이 지난 후 마주는 의문을 품었다.
“고혹금은 천도를 깨려고 혼돈의 힘을 받아들여 스스로 시간도조의 지위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니 한 수사가 순조롭게 그 자리로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아마 고혹금도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모든 것이 하늘의 뜻 아니겠습니까.”
윤회 전주가 잠시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이에 마주가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고혹금은 한립을 보며 흉흉하게 눈을 번쩍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뜻대로는 안 될 겁니다.”
윤회 전주와 마주가 당장 고혹금과 한립 사이에 나타났다.
이에 고혹금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혼돈 소용돌이와 융합 중이라 실력은 크게 늘었지만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없다는 점이 불편했다.
동시에 맑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대량의 먹구름이 몰려들어 어떤 거산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중압감을 만들어냈다.
“도천대겁(道天大劫)!”
윤회 전주와 마주는 걱정과 동시에 희색을 드러냈다.
도천대겁은 도조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이겨내야 할 천지대겁으로 까딱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과정이었지만, 도천대겁의 도래로 한립 주변에 자연적으로 금제가 형성되어 외부인은 절대 침입할 수 없게 되었다.
고혹금이라 하더라도 그곳으로 접근하면 천겁의 공격을 받게 될 터였다.
“시간법칙은 지존법칙 중 하나이다. 도천대겁의 위력이 다른 법칙을 월등히 넘어서지. 본존도 오랜 준비를 해 구사일생으로 견뎌낸 것인데 네 놈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서늘하게 말하는 고혹금은 미친 사람 같던 조금 전과 달리 냉정을 찾은 듯 보였다.
다음 순간 하늘 위를 새까맣게 채운 먹구름 속에서 섬뜩한 살의가 전해졌다.
슈슉!
먹구름이 회전해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고 정확히 한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그걸 본 한립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죽다 살아나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경에 변화가 생겼는지 모든 일에 더욱 담담해진 것 같았다.
소용돌이 속에서 칠흑 같은 뇌전이 힘껏 쏟아져 내리고, 소용돌이 중앙은 새까맣게 뻥 뚫려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때 한립은 막중한 위압감에 눌려 부르르 몸을 떨면서도 균형을 잡고 서 있었다.
소용돌이 깊은 곳에서 잿빛이 번쩍인 후 수많은 회색 구름이 쏟아져 나와 그를 둘러쌌다.
이전에 해 도인이 도조에 이를 때 겪었던 도천대겁에서 본 적이 있는 회색 구름이었는데, 그때 보았던 수량의 열 배가 넘었다.
한립이 미소 지었다.
해 도인이 도겁하는 걸 볼 때는 회색 구름이 나타나자마자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했었는데 오늘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윽한 검은빛이 반짝이는 속에 회색 구름이 드디어 진면목을 드러냈다. 그것은 세밀한 회색 뇌전빛이 뭉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런 미세한 뇌전빛은 위력도 강했으나 사람의 심마를 발동시키는 괴이한 역량을 품고 있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회색 구름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곧이어 금빛이 만발하며 주먹 끝에서 태양이 솟아올라 회색 구름에 구멍을 뻥뻥 뚫었다.
흩어진 뇌전의 힘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삼시를 깔끔하게 베어낸 뒤 심경이 굳어진 한립은 심마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한립이 쉽게 대겁을 맞이하는 모습에 윤회 전주와 마주가 기뻐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고혹금은 냉소를 흘렸다.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공의 먹구름이 출렁이며 핏빛으로 변해 뇌전들이 핏빛 연꽃을 만들어냈다.
“홍련신뢰(紅蓮神雷)!”
한립이 눈썹을 꿈틀했다.
홍련신뢰는 36개 천뢰 중에서도 위력이 강해서 천도신뢰 이상의 무시무시한 힘을 지녔다.
이 뇌전으로 몸은 부서지지 않을지 몰라도, 혼백이 사라질 수 있어 멸혼신뢰(滅魂神雷)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가 길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홍련신뢰들이 산만한 붉은 연꽃을 이루고 떨어졌다.
이에 한립은 겁먹은 기색 없이 입을 벌려 금색 빛덩이로 웅장한 방패를 만들었다.
네모난 방패에는 수많은 문양과 탑 무늬들이 들어가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느낌을 주었다.
진언문에서 전수받은 불후금운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태우법순(太宇法盾)이라는 방어 신통이었다.
꽈릉!
홍련신뢰가 태우법순에 내리꽂혔다.
방패는 끼기긱 하는 소리를 내며 주술문자와 무늬가 흐릿해졌지만 부서지지 않고 한립의 머리 위를 지켰다.
방패를 부수지 못한 홍련신뢰가 진동하더니 반투명한 붉은 연꽃 허상을 분리해내서 방패를 지나 한립에게로 다가왔다.
한립은 놀라지도 않고 수결을 맺은 손으로 미간을 가리켜 수정빛 표식을 불러냈다.
수정빛 파동이 표식에서 흘러나와 그의 몸을 감쌌다.
쿵!
붉은 연꽃 허상은 수정빛 파동에 막혀 일각을 웅웅거리다 스스로 흩어졌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세 사람이 뭐라 말하기 전에 하늘의 먹구름이 금색 구름으로 바뀌었다.
금색 뇌전 용들이 우렁차게 포효하면서 극히 강렬한 시간법칙을 방출했다. 그 포악한 기세는 고혹금이 펼친 뇌전 형태의 시간법칙과 유사했다.
“광음뇌전(光陰雷電)!”
눈꼬리를 끌어올린 한립이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주위로 다섯 가지 시간 물건인 진언보륜, 환진사루, 광음정병, 단시횃불, 동을신목이 떠올랐다.
다시 응결된 시간 물건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넘쳤다.
쿠르릉!
한립이 무언가를 준비하기도 전에 금색 뇌전들이 떨어졌다.
그러나 도조의 경지를 한 발 앞둔 한립도 대응이 빨라 두 팔을 하늘로 뻗어 올렸다.
금빛을 크게 터트리며 급속도로 회전하는 태우법순에서 수많은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불경 소리 같은 것을 냈다.
쾅!
경천동지할 소리와 함께 노란 뇌전이 방패로 떨어졌다.
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태우법순이 갈라져 조각들이 날렸지만 한립에게 충분한 시간을 벌어준 셈이었다.
엄청난 광채를 발한 진언보륜 등이 빠르게 돌아 거대한 금색 소용돌이로 한립을 보호했고, 수많은 금색 뇌전들이 소용돌이를 뒤흔들면서 반대로 소용돌이의 흡입력에 끌릴 듯 말 듯 저항했다.
소용돌이 중심에 있는 한립은 안정적인 자세로 부단히 수결을 맺고 있었다.
이때 금색 소용돌이가 콰르르 회전하며 광음뇌전과 대치해 주변으로 튕겨 나간 금빛과 뇌전빛에 허공이 진동했다.
멀리 윤회 전주와 마주도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먼 곳으로 밀려났다.
반 각이나 이어지던 진동이 그치고 금색 뇌전이 약해지면서 드디어 사라졌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한립은 의복은 엉망이 되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그때, 고공의 구름에 급속도로 금빛이 걷히고 처음의 먹색 구름으로 변하였다.
그 속에서 보랏빛 한 줄기가 떨어져 재빨리 한립을 휘릭 돌고 그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넝마가 된 의복을 갈아입은 한립의 몸에서 돌연 굵직한 금색 수정빛이 솟아올랐고, 그 안의 있던 수많은 수정실은 하늘에서 내려온 보라색 빛줄기와 연결되었다.
솨아아.
금색 수정빛이 더욱 밝아지면서 하늘을 노니는 용처럼 활기차게 변해 세상을 좌지우지할 것 같은 시간법칙의 힘을 발산했다.
허공이 연달아 쿵쿵거리면서 진동하고, 왜곡되고, 부서졌다.
윤회 전주와 마주는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더는 멀어지지 않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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