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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234화 (1,991/2,000)

2234화. 혼돈

*

진법이 저승으로 통하는 문을 연 것처럼 핏빛 공간에서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괴성이 들려왔다.

그 구멍에서 수많은 핏빛 인영들이 빠져나오려 겹겹이 쌓여 기어올라 왔지만 시종일관 입구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 핏빛 구멍에서 발생한 힘이 고혹금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중이었다.

“흥!”

고혹금은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들어, 머리 위 혼돈 소용돌이에서 나선형의 잿빛을 그 구멍 속으로 쏟아부었다.

핏빛 구멍의 흡입력이 간섭을 받았고, 수많은 핏빛 인영들이 나선형 잿빛에 갈려 혼돈 소용돌이로 거꾸로 빨려 들어갔다.

확장을 멈췄던 혼돈 소용돌이가 커지고 있었다.

윤회 전주는 얼굴을 굳히고 급히 손을 놀려 핏빛 구멍을 닫아버렸다. 마주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제야 두려운 마음이 들었나 봅니다.”

가볍게 웃음 지은 고혹금이 손바닥에 금빛을 응결해 몸을 감싼 수정 사슬들을 끊어냈다.

세월이 흘러 삭은 나무토막처럼 사슬들이 먼지가 되었다.

“삼천도신대진이 품은 법칙은 혼돈법칙입니다. 세상을 창조하는 법칙이기도 하니 혼돈법칙은 삼대 지존법칙보다도 앞선다고 할 수 있지요. 천도와 수많은 법칙이 결국 혼돈 중에 탄생한 것 아닙니까? 그런 걸 공간법칙의 힘으로 막아보겠다? 그게 될 것 같습니까?”

고혹금이 웃으며 떠드는 소리에 마주가 난색을 표했다.

다음 순간 세 사람의 머리 위에서 혼돈 소용돌이가 천둥소리를 토해냈다.

소용돌이 속에서 회색 안개가 퍼져 81개의 봉천주를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막을 수는 없어요.”

쿠쿠쿵.

거대한 혼돈 소용돌이가 커지면서 공간을 부수고 잿빛으로 물들였다.

천궁대륙의 천지영기 흐름이 혼란스러워져 무수한 세월 동안 유지되던 모든 규칙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진작 형편없이 부서진 요지승경이 천궁대륙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다가 지면으로 떨어지기 전에 분해되었다.

이원구 등 생존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대륙으로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두 발이 대륙에 닿기 전에 청궁대륙 곳곳의 산맥이 갈라지며 화산이 분출되고 바다에서는 해일이 일고 있었다.

대륙 안의 누가 봐도 세상의 종말이 분명했다.

“세상이 끝나는 광경을 잘들 구경하세요…….”

고혹금이 광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한숨을 내쉰 마주는 윤회 전주 쪽을 바라보았다.

얼굴빛이 좋지 않고 눈빛에 고민이 많아도 아직 완전히 포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 * *

천외역.

급속도로 날아가다 멈춘 한립이 입을 벌렸다.

“이 기운은…….”

금동도 아래쪽에서 무언가를 감지하고 중얼거렸다.

한립 머리의 통증이 잦아들면서 윤회 전주와 마주, 고혹금이 싸우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리고 고혹금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찬 낯선 감정이 밀려들었다. 이 감정은 윤회 전주의 것이었다.

윤회 전주의 감정이 그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처럼, 그의 생각도 윤회 전주에게 전달되었다.

두 사람은 순간 마음이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에 멈칫한 한립은 금색 뇌전빛을 전방 허공에 쏘아 보내고는 금동을 끌고 사라졌다.

* * *

그 시각, 천궁대륙 상공.

윤회 전주와 마주는 고혹금을 상대로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금색, 은색, 암홍색의 거대 영역이 격렬히 교차하고 공간통로, 시간통로, 윤회통로가 열려 수많은 계역에서 힘을 끌어와 영역을 강화했다.

강렬한 충돌 이후 셋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몸을 바로 한 마주는 바로 두 손으로 허공을 쥐어 공간영역에서 수십 명의 은색 거인들을 불러내 고혹금의 금색 영역에 달라붙게 했다.

마주와 똑같이 생긴 거인들은 폭발적인 공간의 힘을 퍼트렸다.

“터져라!”

수결을 맺은 마주가 손을 펼치자 수십 명의 거인들이 날카롭게 울며 터져 버섯 모양의 은색 구름을 일으켰다.

푸확!

금색 영역이 벌어져 커다란 구멍이 생긴 사이, 윤회 전주가 귀신처럼 그 앞에 나타나 주먹을 뻗었다.

그의 뒤에는 육도윤회반이 떠있었다.

육도윤회반 표면에는 복잡한 문양들이 가득했고, 여섯 개의 모서리에는 각 종족의 허상들이 반짝였다.

인족, 요족, 마족, 귀족, 회계인들 등등 세상 모든 생령들이 모인 것 같았다.

쾌속으로 회전하는 육도윤회반이 고혹금의 금색 영역으로 쇄도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힘은 이전에 골황을 한 번에 격살했을 때보다도 몇 배는 강했다.

안 그래도 한 줄기 균열이 생긴 금색 영역이 육도윤회반에 의해 도자기처럼 깨졌다.

전신에 암홍색 문양을 일으킨 윤회 전주의 얼굴이 전신의 피를 빼앗긴 것처럼 해쓱해졌다.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주문을 외며 수결을 맺은 손을 앞으로 뻗었고, 굵직한 암홍색 빛이 손을 빠져나가 윤회반으로 흡수되었다.

빛이 밝아진 윤회반은 금색 영역 대부분을 무너트렸고, 이제 고혹금 앞까지 도달해있었다.

이에 고혹금은 금색 천 같은 것을 몸속에서 불러냈다.

무궁무진한 시간법칙의 힘을 방출하는 금색 천은 2품 선기 이상, 1품 선기에 가까운 강력한 보물이었다.

금빛 은하수를 품은 천이 펼쳐져 9개의 방대한 보호막을 이루고 육도윤회반 앞을 막았다.

펑! 펑! 펑…….

천이 찢기는 소리가 들리고, 금빛 불길이 일 듯 보호막이 한 겹씩 사라졌다. 아홉 겹의 보호막은 결국 사라져 금색 천으로 돌아갔지만 산산조각이 난 뒤였다.

대신 육도윤회반의 속도도 처음만 못했다.

양손으로 수결을 맺은 고혹금이 수많은 잔영들을 만들어냈고, 찢어진 금색 천은 활활 타올라 주변의 영역으로 떨어졌다.

영역 안의 금빛에 불이 옮겨붙은 듯 반짝이는 은빛 은하수가 나타나 육도윤회반, 윤회 전주 그리고 그 뒤의 마주까지 휩쓸었다.

은하수 안에서 무궁무진한 시간의 힘이 몰려 나와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마주는 탄성도 내뱉지 못하고 은하수에 집어 삼켜졌고, 육도윤회반도 부들부들 떨렸다.

동공을 수축한 윤회 전주는 두 손을 빠르게 움직여 수결을 맺고 윤회반에 올라탔다.

그러자 윗면의 주술문자가 빛나며 육도윤회반은 안정을 되찾고 고혹금을 향해 떨어졌다.

촤악!

돌연 고혹금의 몸이 금빛 덩어리로 변해 유유히 흩어졌다.

움찔한 윤회 전주가 수결을 풀고 육도윤회반이 허공을 스쳐 멈추었을 때 돌연 주위의 금빛 은하수가 회전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 같은 엄청난 힘에 육도윤회반이 불안하게 휩쓸려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윤회 전주는 급히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주술문자에서 눈부신 광채를 내뿜은 육도윤회반이 급속도로 회전해 방대한 윤회법칙의 힘으로 금색 소용돌이의 힘에 저항했다.

촤르릉!

하지만 그때 금색 소용돌이 인근에서 수많은 금색 사슬들이 튀어나와 육도윤회반을 감았다.

시간법칙을 방출하는 사슬들은 시간법칙 구금술의 일종인 듯했다. 육도윤회반에 탄 윤회 전주도 사슬에 감겨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 금색 소용돌이 위에서 고혹금이 나타나 손가락을 굽혔다.

그의 손끝에서 튀어나온 금색 화살 허상은 뇌전을 품고 있었는데, 뇌전법칙이 아닌 정순한 시간법칙의 힘이었다.

금색 화살 허상의 속도는 놀라워서 벌써 윤회 전주의 머리를 꿰뚫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앞의 화살 허상을 보는 윤회 전주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파칙!

금색 영역 상공에 금색 뇌검이 뚫고 나와 진정한 뇌전 법칙의 힘을 발휘했다.

뇌검 아래 번득 나타난 사내는 한립이었다.

그는 상황을 파악할 것도 없이 주먹을 휘둘러 대오행멸절권인 금색 주먹 허상을 내뿜었다.

금색 주먹 허상은 갈지(之)자 형 궤적을 그리며 윤회 전주의 앞을 막고 금색 화살 허상을 쳐냈다.

퍽!

그러자 금색 화살 허상이 터져 하늘 가득 금빛이 넘쳐흘렀다.

“넌!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이냐? 그래, 내 직접 변수를 없애야겠다.”

고혹금은 한립의 등장에 눈빛이 어두워지며 무언가를 하려고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때 한립 뒤로 금빛이 번쩍여 급속도로 회전하는 고리가 나타나더니, 잔형을 남기며 사라져 윤회 전주 옆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서 단시횃불의 화염인 금색 불길이 분출되어 화염 검을 이루고, 윤회 전주를 감고 있던 사슬을 잘라냈다.

챙!

금색 사슬 우리가 두 동강이 나자 윤회 전주가 빠져나오며 한립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맙다.”

고혹금이 그걸 보고 동공을 수축했다.

자신의 영역 안에서 한립이 자유롭게 날뛰며 쇄천뢰(鎖天牢)까지 부순 것이다.

그는 한립과 윤회 전주를 쫓지 않고 주변 영역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금색 소용돌이가 사라지고 금색 영역으로 흡수되니, 육도윤회반에 훼손되었던 영역이 회복되며 백배로 넓어져 금빛 해양이 차올랐다.

고혹금의 영역은 한립의 것처럼 딱딱하게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부드럽게 흘러 제대로 망가트리기가 어려웠다.

막대한 압력이 파도와 같이 밀려들었고, 이에 따라 시간법칙이 흘러들어 두 사람을 침식시키려 했다.

미간을 찌푸린 한립이 자신의 시간영역을 펼쳤다.

순간, 실체화된 영역 안에서 거대한 강산이 나타나 주변 금색 영역의 침식을 막고 확산되었다.

고혹금의 시간영역은 미친 듯이 빛을 번쩍였지만 한립의 영역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한립의 영역이 차지한 면적은 고혹금의 것에 100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지켜보던 윤회 전주가 이채를 띠고 한립에게 전음을 보냈다.

“마주가 금빛 은하수에 휩쓸려 사라졌다. 고혹금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의 힘이 꼭 필요하니 구해야 한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이 눈동자를 금빛으로 채우고 주위를 훑다 손을 뻗었다.

금색 빛줄기가 뻗어 나가 금색 은하수 어딘가로 흘러들었다.

촤앗!

누군가 금색 빛줄기에 이끌려 나오는데 바로 마주였다.

의복이 갈기갈기 찢긴 마주는 한립을 발견하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어 마주를 구한 한립은 구유마동을 이용해 고혹금의 종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역으로 스며든 고혹금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전혀 기운이 감지되지 않았다.

“고혹금은 시간을 끌려 하고 있다.”

윤회 전주가 갈수록 커지는 혼돈 소용돌이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한립은 속으로 움찔했다.

윤회 전주와 가까이 붙어 있다 보니 마음이 통하는 느낌도 커져서 상대의 생각을 훤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상대가 말로 뜻을 표하기 전에 이미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는 하지만 영역에 숨어 나오지 않는 자를 어쩐단 말입니까?”

마주가 말했다.

“한 수사는 미라의 대오행환세결을 익혔습니다. 이제 3대 지존법칙이 한곳에 모인 셈이니 고혹금의 영역을 뚫을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수사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더 이상 윤회법칙을 남용하다가는 고혹금을 이기더라도 천도에 융합 당하고 말겠어요.”

“천도에 융합되더라도 이 세상과 같이 소멸하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어찌 물러날 수 있겠습니까!”

마주의 걱정에 윤회 전주가 확고히 답했다.

암홍색 영역을 일으킨 그는 한립이 장악한 시간영역과 접촉했다.

콰르르…….

두 영역이 부들부들 떨면서 성대한 빛을 일으켰다. 이전에도 본 적이 있는 광경이었다.

감구진의 영역과 자신의 영역이 닿았을 때 이런 공명 현상을 겪었었다.

그저 지금 두 영역의 공명 정도는 감구진 때보다 훨씬 강했다.

한립의 금색 영역 안에서 산봉우리들은 원기를 보충한 것처럼 천장 산봉우리는 만장 거산으로, 백리에 이르던 강은 천리의 거대 강으로 변해 시간 파동이 10배는 더 강렬해졌다.

윤회 전주의 영역도 강해졌지만 그는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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