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3화. 예측불허의 천도
*
“끈질긴 것들…….”
고혹금이 두 손을 펼쳤다.
혼돈 소용돌이에서 흘러나오는 회색빛이 굵직해지면서 오색 보호막을 수축했다.
마치 어두운 밤에 홀로 떠있는 반딧불이 같았다.
“윽, 이러다 큰일 나겠습니다…….”
몽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고 이원구는 속으로 탄식했다.
오색 병은 오랜 세월 은밀히 준비한 대응책이었는데, 고혹금에 저항하기에는 무리였던 것 같았다.
다행히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팟.
고공, 고혹금 뒤로 공간파문이 일고 거대한 은색 빛의 문이 열렸다.
그걸 감지한 고혹금이 미간을 좁히고 한 손을 거두어 뒤쪽을 쳤다.
손바닥에서 일어난 금빛이 9마리 금색 교룡으로 변해 빛의 문을 향해 돌진했다.
은색 빛의 문 속에서 암홍색 빛이 홍수처럼 흘러나와 9마리 금색 교룡들과 충돌했다.
쿠쾅!
은색 빛의 문이 터지고 검은 구멍만 남아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고혹금 앞뒤로 누군가 주먹을 쥐고 다가왔다.
고혹금은 피할 수 없어 금빛을 만발해 양쪽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쿵!
금빛이 작렬해 둥그런 고리를 이루고 앞뒤에서 기습을 가하던 두 사람을 백만 리 뒤로 밀어냈다.
곧이어 금색 고리가 흩어지고 나타난 고혹금은 가슴을 헐떡이며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당신들…….”
고혹금은 진법을 유지하기 위해 한 손은 수결을 맺은 채로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이원구 등이 약해진 압박감에 급히 고개를 들어 갑작스레 등장한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다름 아닌 고혹금에 의해 살해당한 마주와 윤회 전주였다.
한 겹의 빛을 두른 그들은 진법의 침식을 받지 않아 법칙의 힘이 유실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게 그리 놀랍지도 않은 얼굴이군요.”
윤회 전주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세상에 지존법칙이 셋입니다. 당신 둘은 그중 두 가지 법칙에서 최강자이고요. 솔직히 그렇게 가버렸으면 실망했을 겁니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어떻게 그렇게 그럴듯한 가짜 육신을 구했느냐는 것인데…….”
고혹금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내 아우 석공해가 괴뢰법칙으로는 세상천지 다시 없을 천재입니다. 그가 최선을 다해 우리 둘의 법칙의 힘을 괴뢰에 융합시켰기에 고 수사의 눈도 속일 수 있었던 거예요.”
마주가 웃으며 답을 주었다.
“그랬군요. 형제간에 반목해 진작 죽인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게 연기였어요. 이날을 위해 고생을 좀 했겠습니다.”
* * *
마역.
웅장하던 야양성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었다.
해 도인이 이끄는 반군과 마주의 정통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참혹하기까지 해서 누구도 그게 서로 짜고 벌인 연극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사실, 전쟁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고 서로 죽고 죽이다 같이 망하기 직전에 누군가 나서 전한 소식에 휴전한 것뿐이었지만.
그 중재인이 바로 윤회 전주였고, 전한 소식은 고혹금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음모였다.
마궁 깊은 곳의 밀실 안, 창백한 얼굴의 해 도인이 허약한 기운을 품고 앉아 있었다.
왼쪽 어깨부터 배까지가 허공에 먹히기라도 한 것처럼 통째로 사라져 괴뢰 법칙을 과도하게 사용해 천도 침식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옆에서 석천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해 도인이 윤회 전주와 마주의 몸에서 법칙을 추출해 두 괴뢰에 주입할 때까지만 해도 천도 침식이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었다.
잠시 후, 길게 숨을 토해낸 해 도인이 눈을 떴다.
“너무 걱정 말거라. 이전에 만들어 준 괴뢰들이 소멸해서 그 여파 때문에 이리된 것이다.”
급히 다가오는 석천공을 보고 해 도인이 신중하게 입을 뗐다.
“숙부, 저쪽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몇 마디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구나…….”
해 도인이 고개를 젓고 있는데 허공에 괴이한 파동이 나타나 두 사람의 몸에서 법칙의 힘을 실처럼 뽑아갔다.
“헉, 이건!”
석천공이 흠칫 놀라 고공을 쳐다보았다.
“고혹금이 진법을 발동하고 말았구나.”
해 도인의 표정도 더욱 어두워졌다.
* * *
역외허공.
한립은 금동을 데리고 천외강풍을 맞으며 쾌속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원래는 아직 닫히지 않은 ‘창문’을 통해 어느 선역으로 내려가 전송진을 써서 중토선역 인근으로 가려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중토선역으로 통하는 전송진들이 전부 먹통이 되었다.
그래서 악면이 그들을 데리고 이동했던 것처럼 역외공간을 지나 중토선역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돌연 법칙의 힘이 실처럼 풀려 유실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일이…….”
급히 멈춘 금동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침음하던 한립은 천천히 대답했다.
“천정 쪽에 변고가 생겼나 보구나.”
말을 하며 선령력으로 법칙의 힘을 봉쇄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곧바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본 그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어쩌죠? 이렇게 다 흘러나가 버리면 천정에 도착하기도 전에…….”
금동이 걱정스럽게 말하는데 한립의 옷깃에서 녹색 빛이 흘러나왔다.
한립도 그걸 알고 품에서 장천병을 꺼내 들었다.
나뭇잎 모양의 문양이 겹겹이 나와 그를 감싸니 금색 실들이 더는 빠져나가지 않았다.
“멈췄어요!”
얼굴이 밝아진 금동을 보고 한립은 자신을 둘러싼 광선으로 금동까지 품었다.
“장천병이 기괴한 현상을 막아줄 수 있나보구나. 허나 일시적인지 영구적인지 모르니 서둘러야겠다.”
* * *
중토선역, 기천대륙.
보천종의 용기봉은 오늘도 적막했다.
산 정상의 고목은 밤새 내린 폭우에 흠뻑 젖어 있었고, 팔각형의 검은 제단 위에는 노쇠한 반쪽 얼굴만 남은 진단 도조가 검은 소용돌이에 둘러싸여 하얗게 변한 눈을 깜빡거렸다.
“수많은 점괘를 보았건만, 내가 이리 갈 줄은 몰랐구나.”
힘없는 목소리가 스산하게 산 정상을 울렸다.
이미 멀어 버린 눈을 습관적으로 깜빡이면서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쫓던 진단 도조는 무언가를 고심했다.
“무얼 더 걱정하는지. 이제껏 살았으면서 얼마 남지 않은 명줄에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 딱 절반의 점괘를 볼 힘이 남았으니…….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 게 낫겠지.”
진단 도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제연의 결과는 이제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았고, 고혹금의 미래가 어떨지 알고 싶었다.
미약한 주문 소리가 퍼지고 하얗게 변한 눈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 수정빛으로 변해 허공을 때렸다.
왜곡된 허공이 수정빛을 흡수해 검은 소용돌이와 그 사이에 다리를 놓고 있었다.
예언 법칙의 최정상에 섰던 노인이 생을 마감할 때가 온 것이다.
검은 소용돌이가 진단 도조의 남은 머리를 감싸 모든 게 사라지기 직전 그가 입을 달싹였다.
“이럴 줄이야…….”
용기봉 고목에 불길이 일어 검은 연기를 만들고 사라져갔다.
* * *
요지승경.
마주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81개의 검은 송곳을 허공으로 쏘아 보냈다.
각각의 송곳이 거대한 기둥이 되어 혼돈 소용돌이를 둘러싸고 공간 진법을 이루었다.
공간 진법 주변에 공간균열이 갈라져 그 안쪽과 바깥을 차단하고 독립 공간을 만들려 했다.
오래전 마족이 마역을 개척할 때 썼던 방법이었다.
물론 그때는 마주 홀로 한 것이 아니라 모든 마족들이 힘을 모았었다.
홀로 81개의 봉천주(封天柱)로 마역을 개척할 때만큼의 힘을 발휘하지는 못해도 백만 리 정도만 봉쇄할 수 있으면 성공이었다.
“마주의 솜씨는 인정하지만, 손이 좀 작은 것 같습니다.”
고혹금이 마주의 의도를 알고 비웃었다.
그의 손에서 고풍스러운 주술문자가 날아올라 찬란한 빛을 방출하는 거대한 빛기둥으로 변해 봉천주 중 하나를 향해 날아갔다.
“뜻대로 되게 놔둘 것 같습니까!”
윤회 전주가 그 봉천주 앞에 나타나 수결을 맺어 고리 형태의 암홍색 장막을 펼쳤다.
각기 다른 색깔의 여섯 개의 빛덩이를 반짝이는 고리가 시간도조의 빛기둥을 가운데 품었다.
“윤회……. 인멸(湮滅)!”
윤회 전주는 수결을 맺은 손을 빛의 고리에 가져다 댔다.
그의 몸에서 암홍색 빛이 하늘을 찌를 듯 흘러나와 고리 속으로 들어갔고, 금색 빛기둥을 흡수한 금색 고리 중앙에 주술문자들이 떠올랐다.
이에 금색 고리가 백배로 굵어지며 중심에 거대한 암홍색 빛구슬을 응결해 고혹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암홍색 빛기둥 주변의 핏빛 안개는 윤회 전주가 수백만 년 동안 모은 윤회인과의 힘이 담겨 있었다.
고혹금은 벌써 모든 공격을 멈추는 시간 장벽을 펼쳐 놓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핏빛 안개는 거침없이 그 안을 통과했다.
의외라는 기색이 스친 고혹금이 서둘러 소매를 펄럭여 핏빛 안개를 흩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흩어지는 듯 보이던 핏빛 안개는 돌연 화살처럼 뭉쳐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고, 고혹금은 핏빛 안개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급격히 몸에 힘이 풀린 그는 진법을 유지하던 손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쓴 겁니까?”
고혹금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시간의 존재를 거스르는 윤회인과의 힘을 모아두었습니다……. 게다가 당신의 지휘 아래 천정이 저지른 악행에서 탄생한 인과이니 당연히 돌려드려야지요.”
윤회 전주가 웃으며 답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전주도 천진한 구석이 있습니다.”
비웃음을 흘린 고혹금이 금빛을 일으켰다.
금빛 광선이 물고기처럼 공간을 헤엄쳐 광음의 강에 혼백이 씻기듯 인과 업보를 씻어냈다.
윤회 전주는 조급해하는 기색 없이 수결을 맺어 고혹금 아래쪽에 또 다른 빛의 진법을 불러냈다.
마주도 동시에 술법을 진행하고 있었다.
촤르릉!
81개의 봉천주에서 검은 수정 사슬들이 튀어나와 고혹금을 속박하고 공간을 응결해 광음의 강이 흐르는 것을 막았다.
“수사가 나설 차례입니다!”
마주가 큰소리로 외쳤다.
고혹금 뒤에서 천마도조 은명이 불쑥 나타나 몸을 길게 늘이고 고혹금을 감쌌다.
“지존, 당신의 혼백은 내가 거두겠습니다…….”
검은 그림자 같은 은명의 얼굴이 고혹금과 한 뼘 거리를 두고 음산하게 웃음 지었다.
시간도조의 극악무도한 수단을 두 눈으로 확인한 터라, 윤회 전주와 마주의 제안을 수락해 그들이 고혹금을 붙잡아 둔 사이 혼백을 집어삼키기로 약속했다.
고혹금의 혼백만 집어삼킬 수 있다면 그의 수행이 얼마나 폭증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윤회 전주와 마주 따위도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3대 지존법칙의 정상에 선 인물들을 모두 제 손으로 없앤다니 이렇게 흥분되는 일이 또 있을까!
고혹금의 몸을 둘둘 만 그가 그대로 미간으로 파고들려 했다.
일단 의식세계로만 들어가면 고혹금은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댕-
종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돌연 고혹금의 미간에서 금색 의식 파동이 흘러나와 은명을 막았다.
은명은 온몸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마, 말도 안 돼…….”
기겁한 은명이 고혹금에게서 벗어나려는데 속수무책으로 붙들려 있는 줄 알았던 고혹금이 손을 들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나를 이리 얕봐서는 곤란하지요.”
느긋하게 말하는 고혹금의 손바닥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법칙의 힘이 흘러나와 맷돌처럼 은명의 신형을 갈아 흩날려 버렸다.
동시에 그를 둘러싼 핏빛 안개도 떨어져 나가 연기로 변했다.
그걸 본 윤회 전주가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핏방울을 떨구었다.
웅!
이에 반응해 고혹금 아래 펼쳐 둔 진법이 하늘 높이 빛을 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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