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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226화 (1,983/2,000)

2226화. 저주

*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한립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구멍이 숭숭 뚫린 왼팔을 들어보니 묵직하기 그지없었다.

“약한 척 마세요. 이 정도 상처에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힘들지는 않습니다. 아직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즐기시지요.”

맹연이 비웃는 소리가 뒤따랐다.

“아, 오해하셨군요. 저도 눈속임을 할 일이 있어서요.”

피식 웃음 지은 한립이 오른손을 횡으로 그었다.

쉭쉭!

두 줄기 금빛 검기가 뇌전을 터트리지 않고 사라져 허수아비 사내의 뒤통수와 목덜미를 노렸다.

그 속도가 엄청났지만, 허수아비 사내 뒤로 자삼과 동리호가 나타나 비검을 한 자루씩 막아냈다.

“역시나. 내가 중상을 입었는데 달려드는 사람이 없다 했더니 다들 수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일단 저주로 사람을 죽이는 술법을 발동하는 본체는 움직일 수 없나 봅니다. 이거 궁금해지는군요. 진법 바깥에서 저주를 펼쳤으면 될 일을 왜 굳이 들어왔을까…….”

“십방만선진은 진법 내외의 모든 것을 차단하는 강력한 결계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들을 지금까지 가둬두지도 못했을 거고요.”

한립의 이번 질문에는 맹연이 바로 답을 주었다.

“그랬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한립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맹연 등 세 사람 주위의 청죽봉운검 72자루가 금빛을 발광하며 나타나 쏘아져 나갔다.

자삼과 동리호는 맹연을 중간에 놓고 앞뒤에서 보호했다.

한 명은 보라색 화염 장막을, 다른 한 사람은 황금색 장막을 펼쳐 원형의 보호막을 이루었다.

72자루의 청죽봉운검이 공명하면서 원형 보호막을 물 샐 틈 없이 갈랐다.

“맹연 수사,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저자를 죽이세요!”

동리호가 짜증스레 소리쳤다.

‘그게 되면 네 놈이 나서서 죽이면 될 것이지!’

허수아비로 변한 맹연도 열불이 났지만 술법을 펼치느라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다음 순간, 한립은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피를 토했다.

심장에 무언가 박힌 것 같았다.

이번 공격에 이마에 땀이 뚝뚝 흐르고 오랜만에 과도한 출혈로 몸이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근육과 뼈뿐 아니라 선령력과 성신지력도 저주에 봉인이 되었는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조금씩 허수아비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는데…….”

한립이 의식을 움직였다.

72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이 연환 공격을 그치고 검령동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진법을 펼쳤다.

하늘에 뇌전 천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맹연, 어서요! 뭔가를 눈치챈 것 같습니다.”

자삼이 재촉했다.

‘재촉 좀 그만하라고. 단전에 하나만 더 꽂아 넣으면 꼼짝하지 못할 테니까.’

맹연은 속으로 불만을 삼켰다.

저주법칙은 천도를 거스르는 법칙 중 하나로 술법을 펼치는 게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중간에 착오가 생기면 쉽게 천도의 침식을 당하게 되었다.

그 사이 허수아비 인간의 단전 쪽에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침(長針)이 서서히 밀고 들어갔다.

한립도 같은 자리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콰르릉!

그때 하늘에 검령동자들이 펼쳐 놓은 통천검진에서 천문이 열려 수백 마리 금색 용들이 거대한 뇌전 검을 이루고 맹연을 향해 낙하했다.

고개를 든 동리호는 뇌전 검이 정확히 그와 자삼 사이를 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대로는 막을 수 없겠어…….”

소리를 높인 그는 뜻밖에도 방어막을 거두고 직접 튀어 올라 손바닥에 떠오른 여러 산봉우리 허상들로 금빛 뇌전 검을 막으려 했다.

명성이 자자한 웅장한 거산들의 힘이 중첩된 일격이었다.

쿠쿠쿵.

산봉우리 허상들이 금빛 뇌전 검을 막은 순간, 동리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조금 전 검진은 허장성세(虛張聲勢)였고, 실질적인 위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주먹과 부딪친 순간 뇌전 검은 스스로 흩어져 버렸다.

자삼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흩어져 내려오는 검빛을 막으려 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이미 한 자루의 충죽봉운검이 그 검빛에 몸을 숨기고 맹연 지척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허수아비의 투명 장침이 단전을 꿰뚫을 때까지 딱 손가락 한 마디의 거리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촤지지직.

요란한 뇌전빛이 청죽봉운검에서 튀어나오고, 수십 만 리 바깥에 있던 한립이 순식간에 그곳으로 이동해 장검을 쥐고 힘차게 휘둘렀다.

촤앗!

허수아비 인간의 머리가 높게 치솟아 대량의 암금색(暗金色) 핏물이 튀어 올랐다.

번득 사라져 공중에서 머리를 받은 한립은 손바닥에서 뇌전을 일으켜 금빛 뇌전 우리에다 머리를 가두었다.

동리호와 자삼이 구하려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차갑게 웃음 짓는 한립의 손 안에서 허수아비 머리가 원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참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 잃은 몸통도 더는 허수아비 꼴이 아니었고, 한립과 똑같이 왼팔과 복부에 네 개의 구멍이 뚫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맹연 수사라고 했나요? 저주 법칙의 위력이 제법입니다만, 부상을 부상으로 교환하다니 술법을 펼치는 대가가 막중합니다. 어쩐지 소리 없이 머리를 터트려 버렸어도 되었을 텐데 시간을 끈다 했습니다.”

한립이 웃음 짓는 사이 드디어 그의 상처가 회복되었다.

그의 손에 잡힌 가련한 머리통은 전혀 웃음이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고작 부상을 부상으로 교환한다고 여겼으면 저주법칙을 너무 얕잡아 본 겁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으면 부상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을 거예요. 이번에는 내가 패배했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만.”

맹연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속으로 억울하고 화가 났다.

‘정말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되었는데, 저 동리호 바보 같은 것 때문에.’

“법칙이 특이해 평소였다면 살려두고 연구를 해보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군요. 그냥 보내드려야 겠습니다.”

한립은 차갑게 말했다.

괴이한 저주 법칙에 호기심이 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미지의 술법을 펼치는 상대를 살려두었다가 화근이 될 수 있었다.

“한립! 널 저주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맹연이 참아 두었던 말을 쏟아내려 했다.

“마음대로.”

* * *

한편, 그 시각 요지승경안.

마주 등이 은명과 진여연에게 가로막혀 있는 동안, 사색 보호막 속의 윤회전주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암홍색 빛을 빠르게 깜빡거린 그가 두 주먹을 바깥쪽으로 펼쳤다.

웅장한 윤회법칙의 힘이 주변의 보호막을 강타하면서 이원구 등이 부들부들 몸을 떨게 만들었다.

고혹금이 그걸 보고 무표정하게 수결을 맺었다.

금색 거대손이 사색 보호막에 녹아들어 손바닥 모양의 주술문자로 변해 하나의 색을 더했다.

힘을 모아 타인을 구금할 수 있는 이 신통은 삼십삼천쇄공진(三十三天鎖功陣)이란 이름을 지닌, 상고시대부터 천정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능력이었다.

오직 도조들만이 모여서 펼칠 수 있는 신비로운 신통은 각기 다른 법칙의 힘을 하나로 녹여 공간을 봉쇄할 수 있었다.

더 많은 법칙의 힘이 녹아들수록 삼십삼천쇄공진의 위력은 커져서, 서른세 가지 각기 다른 법칙을 융합할 수 있으며, 진선계 전체를 봉쇄할 수 있다고도 했다.

보호막에 금색 인장 무늬가 반짝반짝 퍼져나가자, 윤회전주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어졌고 전신의 암홍색 빛도 멈춘 것 같았다.

이원구 등 네 명은 그래도 긴장을 풀지 않고 전력을 다해 수결을 맺었다.

다섯 가지 법칙이 융합된 삼십삼천쇄공진을 통제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고혹금이 수결을 맺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금빛으로 된 보호막 속 윤회전주를 스쳤다가 불러들였다.

그러자 금빛 속에 은색 부적 하나가 딸려와 그의 손에 떨어졌다.

은색 주술문자가 복잡하게 그려진 사이로 ‘정(定)’ 자가 쓰여 공간파동을 발산했다.

멀리서 마주가 그걸 보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공간정위부(空間定位符). 석공어가 첩첩이 쌓인 천정의 금제를 뚫고 어떻게 공간통로를 만들었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군요. 당신이 보제연에 참석한 진정한 이유도 이것 때문일 테고요. 자신의 실력을 너무 대단하게 여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홀로 천정까지 찾아왔으니 돌아갈 생각은 마세요.”

고혹금은 윤회전주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네 명의 도조에게 제압당한 윤회전주는 당연히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네 분께서 윤회전주를 데려가 봉인해 주셔야 겠습니다.”

손에 든 부적을 비틀어 가루로 만든 고혹금이 이원구 등 네 명의 도조에게 말했다.

이원구가 알겠다고 답하고, 네 명이 함께 술법을 펼쳐 오색 보호막을 끌고 뒤쪽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천정 수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천정의 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윤회전주가 드디어 잡힌 것이다.

전주가 잡혔으니 나머지 윤회전 세력은 이제 걱정거리가 못되었다.

눈앞의 마역과 만황진령은 윤회전주와 손을 잡고 천정까지 쳐들어 왔으니 그들의 앞날이 어떨지도 뻔했다.

한쪽에서 창오진군 등 세 명의 도조가 그걸 보고 암암리에 고개를 저었다.

“공간정위부로 다른 세력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고 하나, 홀로 보제연에 나타나다니 소문이 무성하던 윤회전주도 별 것 아니었구나.”

창오진군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눈빛이 흔들렸다.

윤회전주가 잡혔으니 이번 전투는 천정의 승산이 더욱 커졌다.

이제는 어느 쪽으로든 줄을 설 때가 된 것이다.

나머지 두 명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고혹금이 민감하게 요지승경내 사람들의 심리 변화를 파악하고 미소를 지으며 마주 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변이 발생한 건 이때였다!

펑! 펑!

돌연 들려온 굉음과 같이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고, 성난 파도처럼 밀려든 괴력에 고혹금이 비틀거렸다.

즉시 균형을 잡은 그가 휙 몸을 돌려 동공을 수축했다.

낫 같은 까만 발톱을 길게 기른 집채만 한 짐승의 발이 고혹금의 머리를 노리고 매섭게 날아들었다.

지옥에서 천만 년 이상 원념을 품은 듯 사악한 기운이 가득한 검은 발톱이 맹위를 떨쳤다.

그 뒤로 구금되어 있어야할 윤회전주가 보였다.

더 뒤쪽으로는 백운도조와 난쟁이 노인이 몸이 두 동강 나서 호수를 피로 물들이며 떨어져 있었다.

죽은 것은 아니지만 잠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 나머지 두 도조인 이원구와 적융이 보이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린 고혹금이 입고 있고 있던 장포도 선기였던지, 소매 속에서 불러낸 금빛 바람을 보호막 삼아 앞을 막았다.

촤악!

괴이한 소리와 함께 금색 보호막을 뒤흔들며 절반쯤 파고든 검은 발톱이 드디어 멈춰섰다.

바로 이때, 고혹금 뒤에서 새빨간 태양이 나타나 그의 등을 노렸다.

활활 타오르는 작열하는 태양에는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문양이 고온을 뿜으며 떠다녔다.

붉은 빛을 만발하는 태양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것이 같은 색깔로 물들어갔다.

쿵!

불길이 휩쓴 요지승경은 금방 불바다가 되었다.

그 뒤로 적융 노조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고혹금 주변에서 휘휘 소리가 들리고, 수천수만 가닥의 금색 빛의 실이 떠올라 방대한 금속 법칙 파동을 내뿜었다.

불바다를 가르며 날아든 금색 빛의 실들은 고혹금을 공격했다.

그 금실들 안에 이원구가 있었다.

얼굴을 굳힌 고혹금이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 붉은 불덩이와 금빛 실들이 그를 뒤덮었다.

“지존!”

떨어져 나뒹굴던 백운도조와 난쟁이 노인이 놀라 소리쳤다.

마역과 만황진령 대군을 막아서고 있던 도조들도 크게 놀랐지만, 너무 순식간에 일이 터져 아직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이원구와 적융이 윤회전에 붙었단 말인가!”

창오진인 등 세 명도 연달아 벌어진 일에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 불길과 금빛이 고혹금의 신체를 감쌌다.

그러나 예상했던 엄청난 폭발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고, 붉은 불덩이든 금색 실이든 그 자리에 멈춰 전부 고정되었다.

공기의 흐름까지 멈춰버린 광경은 괴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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