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4화. 칼은 뽑혔고, 활은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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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쥐면 그 틀을 또 깨고 싶은 게 본성인가 봅니다. 으하하하……. 드디어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는 겁니까? 안타깝게도 난 당신이 하늘과 경쟁해 승리를 쟁취하기까지 기다려 줄 수가 없겠습니다!”
윤회 전주가 느닷없이 광소를 터트리자 이변이 발생했다.
요지승경 좌우의 허공이 극심하게 흔들리면서 은색 파문들이 끓는 물처럼 바글바글 일어났다.
천정 도조들이 펼쳐 놓은 강력한 금제 보호막이 강대한 파문과 겨루고 있었다.
벼락처럼 요지승경 안으로 스며든 거대한 힘에 수행이 약한 이들은 중상을 입었고 연회장 안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바로 그때, 요지승경 좌우 은색 파문 앞을 대량의 하얀 구름이 막아서고 백운 도조가 나타났다.
중상을 입고 죽다 살아난 연회장 변두리의 수사들이 서둘러 중앙으로 몰려들었다.
정명호 곁의 이원구 등 도조들은 놀라 고혹금과 윤회 전주를 살폈다.
상석에 앉은 고혹금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흥미가 없다는 듯 무표정했고, 윤회 전주는 말없이 앉아 지금 벌어지는 일이 그와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 같은 모습에 이원구와 적융도조가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진여연은 다문 입술 끝에 흐리게 미소가 맺혔고, 은명 도조는 시종일관 눈을 감고 운기조식이라도 하는 듯 반응이 없었다.
다른 도조들도 고혹금의 표정을 살피고 각양각색의 표정을 한 채 뒤로 물러섰다.
백운도조도 눈을 빛냈으나 손놀림은 더 빨랐다.
그의 손짓에 수많은 하얀 구름이 허공에서 튀어나와 은색 파문을 둘러싸고 억제했다.
하지만 은색 파문의 빛이 갑자기 성대하게 불어나 산을 무너트리는 파도처럼 흘러넘쳤다.
촤악!
요지승경 양측의 하얀 구름이 찢어지며 금제도 썩은 나무처럼 부서졌다. 허공의 백운도조는 충격에 열댓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많은 이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백운도조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몸을 가누자마자 다시 나서려 했다.
그 전에 요지승경 양쪽의 은빛이 번뜩이면서 두 개의 공간통로가 뚫렸다.
수많은 인영이 그 안에서 날아들어 새까맣게 하늘을 채웠다. 바로 흑자색 장포 차림의 마역 대군이었다!
그 맨 앞에선 가느다란 눈썹에 각진 얼굴을 지닌 유생 모양의 사내는 마주(魔主) 석공어였다.
검은 문양이 가득한 보라색 갑옷을 입은 석공어는 등 뒤로 핏빛 피풍의를 펄럭이며 엄청난 위압감을 방출했다.
그 옆으로 네 사람이 서 있었다.
왼쪽의 사내는 지푸라기 같은 누런 장발을 기르고 바짝 말라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그 옆의 여인은 풍만한 몸에 매혹적인 얼굴로 동작 하나하나에서 사람을 유혹하는 기운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석공어 오른쪽의 두 사람 중 하얀 치마를 입은 키 큰 여인은 마주보다도 머리 두 개는 더 컸고 목에는 겹겹이 주름진 살이 가득 껴있었다.
다른 한 명은 노란 장삼을 걸친 젊은 사내로 허리춤에 평범한 검은 장검을 차고 용모도 평범했으나 두 눈이 뻥 뚫린 구멍처럼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이 황삼(黃衫) 사내를 설명하기 가장 적당한 단어는 사망(死亡)이라는 글자였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수행을 지닌 네 명의 수사들은 전부 도조들이었고, 그 뒤로 선 기도가 남다른 사오십 명의 수사들은 모두 대라경의 수행을 지녔다.
그 뒤로 우르르 몰려나온 마족 대군도 전부 금선 이상으로 마역의 정예병들이 전부 모인 것 같았다.
요지승경 다른 쪽에는 야생의 기운이 가득한 인물들이 넘쳐났는데, 바로 만황계역의 진령 종족들이었다.
가장 앞에 선 이들 중 두 명은 백택과 악면이었고, 마지막 대머리 중년인은 얼굴에 희희낙락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대머리 중년인은 문양도 없고 주술문자도 없는 오래된 청동 갑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절세의 패도적인 기운이 백택, 악면에 뒤지지 않았다.
그들 뒤로 선 삼사십 명의 대라경 수사들에는 만황팔족의 족장들로 리기마, 흰둥이, 류낙아, 호삼 등이 섞여 있었다.
뒤따르는 만황대군은 만황 각 종족의 주력 부대라 사기가 드높았다.
요지승경은 양쪽에서 쏟아져 나온 마족과 요족 대군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 * *
그 시각.
미지의 계역, 십방만선진 안.
한립이 소매를 펄럭여 72자루의 청죽봉운검으로 날아드는 네 명의 수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치 두 마리의 황금 뇌전 용이 그의 소매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뇌전이 지나는 곳마다 뇌전 파동이 퍼져나갔다.
전방에 있는 네 명의 적 중 한 명이 나머지 셋의 앞을 가로막으며 두 주먹을 뻗었다. 그의 열 손가락이 날카로운 검처럼 허공을 갈라 금빛으로 반장 산봉우리들을 세웠다.
금빛이 응결한 거대 산맥이 두 마리 황금용들을 통과시키지 않고 산 중턱에 깊은 자국을 남기면서 옆으로 밀어냈다.
공격에 실패한 황금용들은 멀리 돌아 72명의 금색 뇌전 옷을 입은 검령동자로 변해 주위에 떠올랐다.
팔짱을 끼고 네 사람을 포위한 검령동자들은 급히 공격하지도 진법을 펼치지도 않았다.
“네 분이 모두 동시에 나서주시고, 이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립이 뒷짐을 지고 허공답보를 하며 나타났다.
* * *
한편, 요지승경 안 백운도조도 양쪽의 요족과 마족의 대군을 보고는 얼굴의 핏기를 가라앉히고 동작을 멈췄다.
이어서 쉭! 쉭! 하는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이 나섰다.
새하얀 의복을 걸친 백발의 중년인은 한 덩이 얼음처럼 냉기를 풀풀 날렸고, 키가 오 척이 되지 않는 난쟁이 노인은 얼굴은 발갛고 코는 달군 쇠처럼 붉어서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반된 기운을 지닌 도조인 두 사람이 백운도조와 나란히 서서 고혹금 등의 앞을 막아섰다.
“마족! 만황계역의 진령들까지! 저들이 어떻게…….”
요지승경에 모인 이들은 선계에서 일류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다들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깨닫고 고혹금 등의 곁으로 모였다.
창오진군은 붉은빛으로 몽파, 여몽한 등까지 감싸 천정의 여러 도조들 곁으로 이동했다.
푸른 빛이 반짝이고 창오진군 옆으로 나타난 무리 중에는 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수염을 지닌 도조 사내도 있었다.
“풍 수사.”
눈을 빛낸 창오진군이 우람한 청발 사내를 향해 공수를 했다.
“창오 수사.”
우람한 사내도 그를 향해 웃으며 마주 인사를 했다.
보제연에서 일어난 변고에 평소 교분이 깊지 않던 두 도조가 얼떨결에 한데 모인 것이다.
그리고 붉은 장포 차림의 노인도 그들 곁으로 떨어졌다. 대머리에 마르고 음산한 눈빛을 지닌 또 다른 도조였다.
“풍 수사, 창오 수사, 상황이 혼란스러워 저도 잠시 여기서 지켜볼까 하는데 실례는 아니겠지요?”
홍포 노인이 미소 지었다.
“견 수사께서 함께 있어 주시면 저희야 좋지요.”
우람한 사내와 시선을 교환한 창오진군이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견사음이란 이름의 홍포 사내는 유명한 산수 출신 도조로 장기간 소형 선역에 자리 잡고 종문을 만들거나 제자를 받지도 않고 살아갔다.
하지만 실력만은 강해서 여러 가지 소문이 도는 이였다.
견사음의 합류로 그들의 전력이 올라가면 어떤 풍파가 불어 닥쳐도 무사히 넘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 보제연에 모인 대부분의 도조들은 직접 오지 않고 후배들을 보내 진정한 도조급은 천정칠군을 제외하면 창오진군을 비롯한 이들 셋이 전부였다.
그들 세 사람이 한곳에 모이자 적잖은 수사들이 그들과 함께했다.
* * *
그 시각 십방만선진 안, 잔잔히 미소가 어린 한립의 표정은 전혀 결계에 갇혀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걸 본 자삼, 맹연 등은 긴장하며 도조가 아닌 상대를 앞에 두고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앞서 언쟁이 있었지만 일단 함께 결계 안으로 들어왔으니 그들은 공동의 적에 맞서야 했다.
자삼이 말없이 좌우로 시선을 주자 각각 동리호, 주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좌우로 퍼져 한립을 가운데 두고 포위했다.
맹안은 슬쩍 뒤쪽으로 빠져 자삼 덕분에 신형이 가려져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속으로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었다.
청죽봉운검을 막아낸 것으로 보아 동리호는 흙 속성 힘의 하위 법칙인 산의 법칙을 익히고, 힘과 방어술을 위주로 수련을 한 듯했다.
자의 여인과 추레한 노파가 정면으로 나선 것을 보면 강력한 공격형 법칙을 익혔을 테고, 뒤로 빠진 이는 분명 한 방을 노리고 있을 터였다.
어떤 종류의 필살기를 숨기고 있던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게 저렇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자들이었다.
한립이 생각을 정리할 때 전방에서 보랏빛 불바다가 아무 징조도 없이 나타났다.
“자염(紫焰)……. 불 속성 법칙의 힘.”
한립은 뒤쪽으로 급속히 물러섰다.
동시에 뒤쪽에서 금색 고리가 나타나 금빛을 폭발적으로 일으켜 주위로 광선을 쏘아 보냈다.
그를 쫓던 보라색 화염은 진언보륜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와 속도가 급격히 느려졌다.
한립은 공격을 떨칠 수 있었지만 화염과 맞닿은 시간법칙을 함유한 금색 광선들은 빠르게 녹아내렸다.
그때, 보라색 화염 속에서 불길을 두른 누군가가 자염 장검을 들고 쇄도했다.
진작 방비를 하고 있던 한립은 허리까지 끌어당긴 주먹을 검 끝을 향해 내질렀다.
쿠앙!
폭음과 수많은 보라색 불똥들이 공작의 날개처럼 화려하게 펼쳐졌다.
한립이 주먹을 거두기 전에 머리 위로 금빛이 반짝이고 거대한 산봉우리가 뚝 떨어져 내렸다.
금색 산봉우리의 정상에는 진한 노란 구름이 흙 속성 법칙의 힘을 품고 있어 중압감이 상당했다.
고개를 들어 산봉우리 아래 새겨진 ‘웅진오악(雄鎭五岳)’이라는 거대 글자를 본 한립은 다른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금빛이 콸콸 흘러나와 거대한 손바닥 허상을 이루고, 산봉우리는 밑바닥을 쳐서 웅진오악이라는 네 글자를 뭉개고 대신 손바닥 자국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산봉우리는 떨어지는 기세가 약해졌을 뿐, 멈추지 않고 묵직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팔을 뻗어 뜻밖에도 맨손으로 산봉우리를 받쳤다.
순간적으로 몸을 떤 그가 다리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섰다.
“다시!”
고공에서 누군가 소리치고 금빛이 수직으로 하강했다.
금빛 속의 동리호는 눈부신 빛을 방출하면서 손가락을 붓 삼아 자신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그려 넣고 있었다.
손바닥에 ‘수양산(首陽山)’이라는 글자가 완성되고, 글자의 획이 하나의 문양처럼 연결되어 금빛 속에 콩알만 하게 줄어든 산봉우리와 쌀알만 한 산봉우리를 만들어냈다.
쿵!
금빛이 떨어져 이전보다 더 큰 산봉우리로 변해 원래 있던 산봉우리를 내리눌렀다.
쿠쿠쿠…….
거대한 힘의 파장이 퍼져나가고, 산봉우리를 맨손으로 받치고 있던 한립은 팔이 굽어 산봉우리 바닥이 머리에 닿을 지경이었다.
다른 팔을 거두려 했지만 자삼의 자염선검이 힘을 모아 그를 향해 찔러 들어 오니 그쪽도 막는 수밖에 없었다.
한립 홀로 주먹과 손바닥으로 동시에 두 명의 도조를 막고 있었다.
같은 시각.
반산대륙, 황산대륙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 오악봉(五岳峰)이 뜬금없이 전대미문의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산의 법칙 도조인 동리호는 원하기만 하면 연결된 선역의 어느 지맥에서든 산맥과 산봉우리를 끌어와 사용할 수 있었다.
그저 십방만선진도 영향을 받겠지만 한립처럼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진짜 산을 가져다 쓸 수는 없어도 위력이 강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팔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한립을 보고 동리호는 손바닥에 신원봉(神源峰)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 검은빛 속에 콩알 크기의 산봉우리 허상을 불러냈다.
이어서 또 쿵! 소리가 들려왔다.
금빛을 품은 만장 산봉우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수양산을 짓눌렀다.
엄청난 무게와 힘에 한립도 이제는 어깨와 팔로 세 산이 응결된 도조법칙의 힘이 담긴 산악진의(山岳眞意)를 견뎠다.
산봉우리들에 비해 한립은 모래알처럼 작아 보였는데, 그의 입가에는 시종일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슬쩍 틀어 아직까지 나서지 않고 기괴한 수결을 맺고 있는 추레한 노파를 보았다.
아직 이유는 모르겠으나 뒤로 물러나 있는 인물을 제외하고 가장 경계심이 드는 게 이 노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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