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3화. 은원(恩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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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도과를 받았으면 다들 어려워 말고 맛을 보세요.”
고혹금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보제도과를 들어 한입을 깨물었다.
다들 분분히 도과를 입으로 가져가 깨무니 찬란한 빛과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앞줄에 앉은 백발의 노파 몽파 역시 과일을 먹는 척 입에 가져가 남들과 똑같은 찬란한 빛을 냈으나 실은 그것을 삼키지 않고 소리 없이 감춰두었다.
그 뒤에 선 여몽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느 날 운이 좋아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보제도과를 주고 싶었다.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고…….
보제도과를 들어 자세히 살핀 윤회 전주가 피식 웃고는 소매 속에 넣어 두었다.
시간도조가 그걸 보고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지만 불쾌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연못 곳곳에서 맑은 종소리가 들려오고, 호숫가에 바람이 불어 오래된 홰나무가 흩날렸다.
광장의 수사들은 느끼는 바가 있는지 얼른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했다.
보제도과의 빛이 가시기 전에 수사들의 몸에서 광채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연회장 전체에 형언할 수 없이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하, 효과가 없지는 않구나…….”
눈썹을 끌어올린 윤회 전주가 의자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가문 노조를 따라 보제연에 참석한 청년이 보제도과를 먹고 푸른 광채를 분출하더니 놀랍게도 금선 중기의 고비를 넘기고 후기의 기운을 발산했다.
이런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유유히 탄성이 들려오는 곳을 훑은 윤회 전주는 거의 태을경 이하의 비교적 낮은 수행을 지닌 이들이 쉽게 고비를 넘어서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태을경 수사들도 보제도과를 복용한 효과가 나쁘지 않은지 격동한 얼굴이었다.
시간이 지나 연회장의 동요가 차차 가라앉았다.
“오늘 여러 수사들이 기연을 얻어 천정이 오랜 세월 준비한 성의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고혹금은 수사들을 훑으며 웃음 지었다.
“전부 보제도과를 베푸신 지존 대인의 은혜 덕분입니다! 지존 대인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상아색 장포를 입은 청년이 막 경지를 넘어서 안정되지 않은 기운을 지니고 일어나 시간도조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이에 수행이 높아진 수사들이 분분히 일어서서 천정에 대한 마음을 전했다.
윤회 전주가 그걸 보고 홀로 중얼거렸다.
“천정의 방법이 과연 범상치 않구만. 겨우 보제도과 따위를 베풀어 추종자들을 끌어모으다니,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어.”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곳의 모인 사람들의 수행을 생각할 때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대다수가 그리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흥! 천정을 적대시하며 천도를 거스르는 자들이 지존 대인의 은혜로 이런 성스러운 연회에 참석했으면 말을 가려서 해야 할 겁니다!”
백발노인이 노기충천해서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다른 이들도 윤회전의 행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한순간 고상하던 연회장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졌다.
고혹금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노하는 기색 없이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수사들을 조용히 시키고 입을 열었다.
“다들 그럴 것 없습니다. 천정과 윤회전의 은원은 오랜 세월 이어져 왔기에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누구의 잘못인지 정확히 가를 수 없는 지경이지요. 오늘 윤회 전주를 보제연에 청한 것은 오랜 갈등을 마무리 짓고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고혹금의 말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도조의 광명정대함을 칭송했다.
“평화 같은 소리 하십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가 허다하니 선역이 이 지경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윤회 전주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주는 지금 내 진의를 의심하는 겁니까? 당신을 요지승경에 들이고 천문 밖의 윤회전 대군을 쫓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의는 표했다고 생각이 됩니다만. 전주가 싸움을 멈추고 평화를 구축할 의지만 있다면……. 우리는 적에서 벗으로 돌아서, 모든 은원을 정산하고 선역의 영원한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눈썹을 꿈틀한 고혹금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수사들은 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지존, 어째서 저런 도적놈들을 벗으로 삼으려 하십니까? 그간 윤회전과 쌓은 한을 어찌 말 한마디로 풀 수 있단 말이에요. 천정을 위해 윤회전과 싸우다 죽은 충신들의 한은 누가 풀어준단 말입니까!”
창오진군부터 참지 못하고 버럭 성을 냈다.
“창오 수사, 그렇게 모든 원한을 갚아나가면 언제 이 싸움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그간 천정에서도 사상자가 많이 나왔지만 윤회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은원의 인과를 전부 처리해 나가다가는 언제 싸움을 매듭짓겠냐는 말입니다.”
고혹금이 지긋이 그를 보며 달래듯 말했다.
“하하. 말은 그럴듯합니다만, 천정이 죽은 이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겠다면. 사적인 은원은 내가 이곳을 나서는 대로 알아서 청산하겠습니다.”
창오진군은 비애에 잠겨 웃음을 터트렸다.
“천정의 선동질에 당하는 벌레 같은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 의기가 높은 자도 있었어요.”
윤회 전주가 그를 보고 오히려 칭찬하는 눈빛을 보냈다.
“전주, 천정의 뜻은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천정과는 화해하시겠습니까?”
미간을 좁힌 고혹금이 물었다.
“화해? 하하하! 그보다 제가 제안을 하나 하지요. 고 수사는 내 모습을 확인한 후에 그래도 벗이 될 생각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광소를 터트린 윤회 전주가 드디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삿갓을 벗어 던졌다.
다들 예상하던 선풍도골의 인자한 모습이나 아니면 사납고 추악한 용모 대신 아주 평범한 청년의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몸을 파르르 떤 시간도조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스쳤다.
도조들 몇몇이 안색이 달라졌고, 그중에서도 구원관 관주 이원구의 표정 변화가 컸다.
“한립?”
홀린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인 이원구가 누군가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 자리에 있는 대다수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홀로 금원선궁에 들어가 살육을 했을 때부터 천정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행보로 사람들의 입에 빈번히 오르내린 이름이었다.
얼마 전 도조 풍청수를 이겼다는 천정의 수배범도 이름이 한립이지 않았던가.
그가 천정칠군 중 한 명인 헌원걸을 죽인 일은 보제연 소식에 가려져 멀리 퍼지지 않았고, 그런 풍문을 들은 이들도 사실이라 여기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윤회 전주가 한립이었다고요?”
“저 사람이 한립? 저렇게 평범하게 생겼다니…….”
“아니, 아니지. 나이가 맞지 않는데…….”
다들 웅성거리는 가운데 윤회전과 오래전부터 대적해온 대라경 수사가 중얼거렸다.
“한립은 시간법칙을 수행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윤회 전주라니 말이 안 됩니다.”
“설마 지존 헌원걸이 살해당했다는 소식도 정말일까요? 그 뒤에 윤회전이 있었다면…….”
요지승경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몽파 뒤에 앉은 여몽한도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일어서려다 다행히 스승에 의해 제압당했다.
“몽한, 경거망동 말거라.”
몽파가 전음으로 말했다.
그녀는 여몽한이 이렇게 놀라는 이유를 몰랐지만 <오뢰정법진경>과 연관이 있을 거라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냉정을 되찾은 여몽한은 윤회 전주를 잠시 살피다 중얼거렸다.
“아냐, 그가 아니야…….”
모기소리처럼 작은 중얼거림은 홍수처럼 들려오는 다른 사람들의 논쟁 소리에 묻혔다.
“어쩐지 진단노조의 점괘가 구름에 쌓인 산처럼 불투명하다 했더니 인과의 순행이 뒤틀린 탓이었어. 그랬구나, 그랬어…….”
고혹금은 오랜 세월 풀리지 않던 의문이 해소되자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고 수사는 내가 이런 모습인 연유를 알아차렸나 봅니다?”
윤회 전주가 눈썹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이전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알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한립이고, 한립도 결국 당신이란 말이군요.”
고개를 끄덕인 고혹금은 다른 이들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했다.
“그 옛날 당신은 내 반려를 죽이고, 날 살해하려 궁지로 내몰았습니다.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 나도 모르게 필생의 시간법칙을 써서 시공간초월을 했기에 지금의 윤회 전주가 되었고요. 이런 원한이 화해하자는 한 마디로 풀릴 것 같습니까?”
윤회 전주가 화제를 돌렸다.
시간법칙? 시공간초월? 사정을 모르는 이들도 기함할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원구만이 인상을 굳혔다 몸을 떨며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그도 당연히 한 사람이 두 가지 지존법칙을 익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회법칙에 정통한 윤회 전주와 시간법칙을 수행한 한립은 당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공법을 전수해준 사람은 대체 둘 중 누구란 말인가?
“듣자니 결국에는 모든 것이 대도(大道) 쟁투 때문이군요…….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갈등이라지만, 전주도 윤회법칙을 깨우쳤으니 이제는 대도 쟁투는 어떤 길에서든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 아닙니까. 지금은 우리 둘 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 둘이서 대도 쟁투를 할 필요도 없어졌고요. 그렇다면 원한을 내려놓고 내 도움을 받아 윤회법칙의 최고봉에 이른 다음 새로운 천정칠군으로 등극하면 어떻겠습니까?”
안타깝다는 듯 탄식한 고혹금이 상대를 설득했다.
“당신에게는 전생에 불과하고 기억 속에도 각인되지 못한 사건이겠지만, 내게는 뼛속 깊이 새겨진 고통스러운 기억입니다. 아무리 긁어내려 해도 불가능한! 그리고 천정과 윤회전의 원한은 이미 우리 둘 사이의 문제라기에는 너무 일이 커져 버렸어요. 얼마나 수많은 이들의 은원이 얽혀 있는지 아십니까? 이런 거대한 인과를 그냥 묻어두고 갈 수는 없을 겁니다.”
윤회 전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전주의 뜻은 이제 어쩌자는 겁니까?”
“당신과 내가 결단을 내야지요. 천지간에 우리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진정한 평화가 도래할 겁니다.”
고혹금의 물음에 윤회 전주는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먹듯 답했다.
“일전에는 서로 투쟁하면서도 당신을 지기(知己)로 여겼습니다. 당신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수단을 지녔고, 결국에는 같은 길을 갈 수 있을 거라 여겼으니까요. 이제보니, 모든 것이 내 착각이었습니다.”
고혹금은 실망한 얼굴로 서서히 말했다.
고요히 고혹금을 바라보는 윤회 전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 반려의 죽음, 당신과 나의 대도쟁투, 심지어 수많은 윤회전과 천정 수사들의 죽음도 천도(天道) 아래 흘러가는 잔물결일 뿐입니다. 당신은 천도 위에 군림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까?”
소매를 펄럭이며 기운을 차린 고혹금이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천도와도 승부를 보겠다? 당신은 시간법칙의 지존으로 칠군의 우두머리입니다. 이미 세상 억만 수사들의 위에서 군림하면서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윤회 전주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도조가 아니니 천도가 머리 바로 위에서 억눌러 숨조차 제대로 못 쉴 것 같은 이 답답함을 느껴보지 않았으니까. 언젠가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그 천도를 쳐부숴 버리고 싶을 만큼.”
고혹금은 주먹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순간 움찔했다. 오늘 고혹금은 그들이 알고 있던 인물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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