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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222화 (1,979/2,000)
  • 2222화. 연회의 시작

    *

    진여연 옆에는 검은 장포로 몸을 가린 덩치 큰 인물이 짙은 보랏빛 눈동자만 드러내고 있었다.

    천도 칠군 중 가장 신비롭고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도조가 있다면 바로 그였다.

    진단노조가 오랫동안 출타를 하지 않아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진 거라면, 이 은명 노조는 아예 노출된 적이 없어 천정 고위급 인사들도 그의 정체를 잘 몰랐다.

    진단 노조는 천도에 집어 삼켜져 거의 폐인과 다름없었고, 헌원걸은 한립과 금동에게 당해 이제 천도칠군 중 남은 건 이 다섯 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평소 보제연에는 고혹금 말고 다른 천정칠군들은 얼굴을 잘 비추지 않아 다섯 명이 나타난 것도 많은 편에 속했다.

    그들의 등장에 거의 모든 수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존을 뵙습니다!”

    천정 관할 수사들은 입을 모아 인사를 올렸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준 고혹금이 입을 열었다.

    “창오 수사, 오늘 윤회 전주는 손님으로 온 것이니 예를 갖춥시다.”

    그 말에는 전혀 경고의 의미가 없고 따스하게 설득하는 것 같았지만 창오진군은 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짧은 사이에 나이를 백 살은 더 먹은 것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윤회 전주가 고혹금 등을 담담히 쳐다보았다.

    한시름을 놓은 청추진인이 그를 안내해 청오진군 등 도조들과 같은 줄 오른쪽에 데려나 놓았다.

    “전주, 여기가 준비를 해둔 자리입니다. 앉으시지요.”

    청추진인의 말에 윤회 전주는 크게 웃으며 탁자를 넘어 천도칠군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다다랐다.

    일곱 개의 탁자 중 하나가 방석과 함께 그쪽으로 끌려왔다.

    “어차피 앉을 사람도 세상을 떴는데 비워두면 흉하지 않습니까.”

    낭랑하게 웃음 지은 윤회 전주는 알아서 방석에 앉아 탁자의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그 광경에 광장이 떠들썩해졌다.

    청추진인은 진땀이 나서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남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윤회 전주에게 탄복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탄복하는 건 탄복하는 것이고, 그도 맡은 바 임무가 있어 억지로 청했다.

    “전주, 이러시면……. 예에 맞지 않습니다.”

    윤회 전주는 못 들은 척 술잔을 꺾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괜찮습니다. 전주가 직접 스스로 자리까지 마련하고 고생입니다.”

    고혹금이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지존이 괜찮다니 다들 이견을 제기하지 못했고, 청추진인은 인사를 하고 바로 동성대륙으로 돌아갔다.

    고혹금 등도 각자 자리에 앉았으나 딱 붙어 있지는 않았다.

    천도칠군의 우두머리로서 고혹금이 중간에 앉고, 그의 왼쪽으로 흑포 도조 은명이 오른쪽은 진단의 자리였던지 비워두었다.

    다시 은명 옆에 소녀 도조 진여연이 앉았는데, 그녀 옆 탁자는 윤회 전주가 가로채기 전에는 헌원걸의 자리였다.

    오른쪽 진단 노조를 위해 비워둔 자리 옆에 적융도조와 구원관 관주 이원구가 앉아 있었다.

    천정칠군이 앉은 뒤에야 수사들은 자리에 앉았다.

    광장에 평화롭게 악기 소리가 흘렀다.

    그때 짙은 안개를 두른 누군가가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구름 모양의 수가 놓인 하늘색 장포를 입은 이는 장천정(掌天庭)을 맡은 백운 도조였다.

    “보제선연이 시작되었으니 모두 마음껏 즐기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고혹금 등에게 예를 취한 백운도조가 맑은 목소리로 선포했다.

    광장 위로 일곱 빛깔의 상서로운 구름이 드리워 열댓 명의 깃털 옷을 입은 미인들이 꽃비를 뿌리며 떨어졌다.

    다들 화려한 공연을 구경하며 탁자에 놓인 과일과 선주를 맛보기 시작했다.

    * * *

    무궁무진한 허공 난류 깊은 곳에 거대한 은색 산봉우리가 떠있었다.

    반짝이는 은색 광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는 공간 파동을 내뿜어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간법칙의 힘을 품은 허공정석(虛空晶石)인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수많은 공간법칙 파동이 산봉우리에서 퍼져나가 강대한 힘으로 허공 난류를 왜곡시켰다.

    산봉우리 아래에는 거대한 검은 거북이 대륙과 같은 몸으로 은색 산을 등에 받치고 있었다.

    거북이 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은색 거산이 유유히 허공 난류 속을 지나갔다.

    산속에 헤아릴 수 없는 구멍이 뚫려 벌집과 같았는데, 그 내부 통로는 크고 작은 석실들이 뚫려 있고 은색 문자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석실 내의 모든 진법은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전송진법이 맞았다.

    전송진이 수시로 웅웅 소리를 내며 수시로 물건들을 토해내면 윤회전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가 다른 전송진으로 옮겨주거나 아니면 괴뢰들에게 맡겼다.

    괴뢰들은 바삐 은산 통로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날랐다.

    그런 바쁜 은산 위에 네 개의 방대한 연기용 화로가 설치된 대전이 있었다.

    수십 장에 달하는 커다란 화로는 생긴 것은 같았지만 남색, 푸른색, 붉은색, 검은색으로 색깔이 달랐고 은색 화염이 주변을 둘러싸 열기를 주입했다.

    그 주위의 수사들은 윤회전 가면을 쓴 윤회전 인물들이었지만 보라색 장포를 입은 마역 야양왕조 복색을 한 수사들도 있었다.

    진귀한 재료들이 계속해서 네 화로로 들어가고, 화염에 달궈진 화로 내부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남색 화로의 뚜껑이 들썩이고 남색 빛덩이가 빠져나왔다.

    인근에 서 있던 윤회전 수사가 받아든 것은 남색 토끼 머리 가면이었다.

    그걸 들고 편전 안으로 들어간 윤회전 수사는 세 개의 제단에 각각 따로 앉아 백옥 판을 든 수사들을 보았다.

    다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옥판을 들고 바삐 손을 움직이는데, 왼쪽의 마른 회의 중년인은 눈이 움푹하게 들어가 음침해 보였다.

    중간에 앉은 자포 노인은 야양왕조 복색을 하고 허리가 약간 굽었으나 눈빛만큼은 예리해 보였다.

    오른쪽 백의 여인은 상당한 미인으로 표정이 냉랭했다.

    셋 다 대라경 수사인데 자포 노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대라 중기 최고봉으로 대라 후기를 한 걸음 앞둔 강자였다.

    “대인들 술법을 펼쳐주십시오!”

    윤회전 사내가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옥판 위로 움직이던 손을 멈춘 세 사람이 시선을 마주치고 같은 수결을 맺었다.

    잿빛, 은빛, 하얀빛이 세 사람의 손끝을 빠져나와 사내가 내려놓은 남색 가면으로 흡수되었다.

    어딘가 부족해 보이던 가면 주위로 은색 주술문자들이 몰려들더니 현란한 빛을 토해냈다.

    윤회전 사내는 공손한 눈빛으로 감히 그들이 술법을 펼치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 있는 대인들은 윤회전에서 존귀한 신분으로 윤회전의 가면 또한 그들이 제련해서 공간교역, 은신, 환형 등의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남색 가면에 은색, 회색, 하얀색 문양이 퍼져나갔다.

    쉭!

    세 사람이 술법을 멈추고, 스스로 하늘 높이 솟아오른 가면은 한 마리 새처럼 맑게 울부짖었다.

    “감사합니다!”

    윤회전 사내가 그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뒤, 가면을 거두고 편전을 빠져나갔다.

    세 사람은 쉴 틈이 없는지 바로 옥판을 들고 아까 하던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한동안 그런 일이 계속되었다. 회의 중년인과 백포 여인은 피로한 기색이 보이는데 자포 노인만 여전했다.

    “석 수사의 수행이 참으로 심후하십니다. 대라 후기에 이를 날도 머지않았겠어요.”

    회의 중년인이 자포 노인을 보며 칭찬을 했다.

    “허허, 노 수사의 은신 신통이야말로 나날이 현묘해집니다. 요 며칠 제련한 가면들은 특히나 더 그렇고요. 다만 대라 후기가 어디 바란다고 오를 수 있는 경지랍니까.”

    자포 노인이 차분히 웃음 지었다.

    “제 은닉법칙이 곁가지라면 석 수사의 공간법칙이야 말로 정도이지요. 백수사의 환형법칙과 비교해도 그렇고요.”

    고개를 저은 회의 중년인이 계속 자포 수사를 추켜세웠다.

    “전주께서 앞장서 천정과 싸우고 계십니다. 후방을 우리에게 맡겼으니 다들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해야 할 일에나 집중하지요.”

    듣고 있던 백포 여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 말에 회의 중년인은 어색하게 웃었고, 자포 노인은 인상을 찡그려 불만을 드러냈다.

    “백우, 석 수사는 윤회전 일을 도와주시고는 있지만 윤회전 사람은 아니니 무례를 범하지 말거라.”

    청포 인영이 편전 안쪽에서 나왔다.

    백발의 청년이었는데 잘생긴 외모와 달리 상심이 컸는지 표정에 애처로움이 배어 나왔다.

    “황보역주!”

    회의 중년인이 백발 청년을 보고 일어나 예를 취했다.

    “예, 제 불찰입니다.”

    백포 여인도 표정을 바로 하고, 자포 노인을 향해 사죄의 뜻을 표했다.

    “석 수사, 소녀가 실언했으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백포 여인에게 손을 저어준 자포 노인이 백발 청년에게 공수를 해보였다.

    백발 청년은 회계에서 본 적 있는 윤회전 금남역 역주, 도조 황보옥이었다.

    “세 분 다 그리 예를 취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간 윤회전 가면을 제련하느라 그리고 다른 윤회전 일을 보느라 고생이 많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황보옥이 미소를 띠고 말했다.

    “모두 스스로 원해 여기 있는 것인데 고생이라니요. 그보다 윤회전과 천정의 전황은 어찌 되어갑니까?”

    회의 중년인이 웃으며 물었다.

    “아직 모르겠으나 우리야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지요. 전주의 능력에 천정을 꺾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세 사람은 입을 모아 답했다.

    그 말에 황보옥은 흡족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포 노인을 보았다.

    “석 수사, 윤회전과 광원재의 거래에 앞으로도 아낌없는 지원 부탁드립니다. 교역 능력으로는 광원재가 윤회전을 앞서니까요. 비용은 일을 마치는 대로 보상할 것입니다.”

    “다 제가 해야 할 일이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포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말만 믿지요.”

    황보옥은 몇 마디를 더 나누고는 편전을 나서 거대한 은색 봉우리 위에 나타났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의 눈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보제연.

    춤과 노래가 그치자 오히려 모두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들이 여기까지 오며 바라마지 않던 일이 벌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다들 기대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예전처럼 보제도과를 모두와 나누려 하는데, 이번에는 달라지는 점이 있습니다.”

    백운도조가 말을 마치기 전에 많은 이들의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이번에는 보제도과를 얻기 위해 다른 거래 조건이라도 있어야 한단 말인가?

    속삭이는 소리가 커져만 갔다.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지존 대인께서는 천하를 돌보시며 모두와 함께 열반하기를 원하십니다. 보제성연의 본의가 그러하고요. 그래서 이번 연회에는 정식으로 초청받은 손님들 외에 수행원들에게도 도과를 베풀기로 했습니다.”

    백운도인의 느긋한 설명에 사람들이 안심하며 환호했다.

    “지존 대인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지존 대인!”

    고혹금이 웃으며 수사들을 내려다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띤 윤회 전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고공에서 8마리의 새가 입에 보석함을 물고 내려와 흩어졌다.

    보석함에 가득 담긴 보제도과를 나눠주기 위함이었다.

    아리따운 여인들이 쟁반마다 보제도과를 담아 연회에 참석한 수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고, 윤회 전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윤회 전주는 탁자에 놓인 보제도과를 살폈다.

    꼭 배처럼 생긴 선홍색 과실은 등불처럼 빛을 머금고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을 발산했다.

    고혹금 등의 앞에 놓인 보제도과와 그의 것이 똑같은 것으로 보아 급이 가장 높은 것을 받은 듯했다.

    가장 앞줄의 도조, 대라 수사들은 잠시 시선을 주다 고상하게 눈을 떼었지만, 그 뒤쪽의 수사들은 마치 자신의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일을 조심스럽게 들고 눈치를 살폈다.

    지존 대인의 명이 떨어지기 전에 함부로 과실을 입에 가져가는 자는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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