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220화 (1,977/2,000)
  • 2220화. 군웅(群雄) 출현

    *

    그때 침묵을 지키던 아이처럼 생긴 백발 사내가 탁한 목소리를 냈다.

    “주안 수사……. 우리가 받은 명령대로라면 이 진법의 힘을 빌려 저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맹연 수사는 헌원걸이 살해당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한 겁니까? 그는 오행본원도조였어요. 우리보다 얼마나 강자였는지 아십니까?”

    주안이 당장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곳에서 달아난 이들에게 듣기는 했습니다. 한립 저놈이 이기기는 했지만 서금선의 도움이 있었고, 헌원걸도 큰 실수를 했더군요.”

    “그럼 풍청수가 저 자에게 죽을 뻔한 일은요? 그때는 서금선의 도움도 없었다고 합니다.”

    맹연이 머뭇거리며 하는 말에 주안이 조소했다.

    “주안 수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저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요. 게다가 우리 도조들은 천도의 구속을 받지 않습니까. 일단 죽을힘을 다해 맞붙으면 득보다 실이 클 겁니다.”

    동리호가 동조했다.

    “그래도 지존께서 맡기신 일에 이리 소극적으로 있다가 질책이라도…….”

    맹연은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먼저 들어가 저들과 붙어 보세요. 우리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니, 수사의 실력을 보여 보란 말입니다.”

    주안이 웃으며 제안했다.

    그 말에 맹연은 속으로 분노했다.

    “됐습니다. 어차피 저들은 갇혀 있고 천정으로 가서 소란을 일으키지 못할 테니, 보제연이 끝나면 지존께 결단을 내려달라 하면 됩니다.”

    자삼이 소란을 잠재웠다.

    그 말에 다들 입을 다물고 맹연도 안심했다.

    나중에 책임을 돌리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 그 홀로 안에 들어가 한립과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제연 와중에 이런 곳에서 결계나 지키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보제도과의 맛도 못 보고…….”

    노파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 * *

    중토선역.

    남첨대륙 응천문 바깥의 바다에 거대한 선박들이 떠서 ‘윤회전’이란 글자가 적힌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선박과 해역 상공에 윤회전 복색을 하고 가면을 쓴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중 한 선박의 갑판에 여덟 명이 서 있었는데 여섯은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머지 둘은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은색 단발에 탄탄한 몸을 지니고 검은 천으로 입만 가린 녹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었다.

    등 뒤로 메고 있는 녹색 검 두 자루는 검신이 채찍처럼 길고 얇아 청년이 호흡할 때마다 은은하게 녹색 안개가 흘러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있었다.

    그 옆에 선 검푸른 피부의 철탑 같은 사내는 무양이었다.

    “탐랑 수사, 전주는 이미 천정으로 가신 겁니까?”

    무양이 걱정스레 물었다.

    “동천문으로 들어가셨을 겁니다. 몇 시진 후면 보제연이 시작되겠군요.”

    은발 청년은 말이 느릿하고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염탁과 현어 쪽은요?”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긴장해야 할 것은 저들입니다.”

    불안한 무양의 목소리에 탐랑이 손을 들어 웅장한 응천문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무양은 응천문 뒤쪽에 거대한 빛기둥들이 올라와 공간파문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첨대륙과 다른 선역을 잇는 대형 전송진들이 있는 곳으로 대량의 진선계 강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내 냉취도(冷翠刀)가 피맛을 못 본지 오랩니다. 더이상 굶주리게 할 수는 없어요.”

    탐랑의 목 깊은 곳에서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검은 천으로 가린 아래턱에 입가에서 귓불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상처가 드러났다.

    * * *

    윤회전은 북구대륙의 북천문외에 동천문, 서천문에도 백만 병력을 주둔해 천정과 대치하고 있었다.

    쌍방은 서로 도발하지 않고 견제하고 있었다.

    세 곳의 응천문 중 북천문이 가장 북적북적해서 전송진을 전력으로 운용해 끊임없이 다른 선역의 수사들을 불러들였다.

    중토선역의 아홉 대륙이 거리마다 등불을 켜고 성대한 연회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원래 중토선역에 위치한 중소 종문들은 보제연에 참석할 자격이 없더라도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해 종문 경전을 열어 교분이 있는 다른 종문들과 교류했다.

    더 큰 대형 상회나 종문들은 각양각색의 경매회 등을 개최해 진선계 전역에서 몰려든 보물들을 미끼로 수사들을 유혹했다.

    거의 광란에 가까운 흥겨움의 끝에는 보제연이 있었다.

    천궁대륙 중앙의 거대한 분지에는 천정의 주요 기관들이 분포해 있었고 보제연의 주요 회장도 이곳 상공의 만리 운해(雲海) 속이었다.

    분지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어떤 각도에서라도 구름 속의 상서로운 빛과 보라색 수증기를 볼 수 있었다.

    사실 그 운해 위로는 백만 리에 달하는 거대한 섬이 떠있어서 요지성경(瑤池勝境)이라 불렸고, 천도칠군의 우두머리인 시간도조 고혹금이 이곳에서 기거했다.

    영기와 안개가 가득한 요지성경 주변에는 산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절벽마다 폭포가 쏟아져 진주알 같은 물을 쏟아냈고, 폭포 아래 연못에는 구색신록(九色神鹿)들이 몰려들어 평화롭게 물을 마시는 광경은 선경이 따로 없었다.

    또한 수풀 속에서는 새와 산짐승들의 소리가 들리고, 그 위로 학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갔다.

    그런 하늘 위로 수많은 빛줄기가 뭉쳐 날아들었다.

    만여 둔광 속에는 봉황 마차니, 용 모양 가마니 하는 것들이 수시로 보였고 여러 선인들이 화려한 복장으로 몰려왔다.

    이런 요지성경의 중심부에 맑은 호수가 있어 거울처럼 풍경을 비추었기에 정명호(淨明湖)라 불렸다.

    정명호 뒤로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는 늙은 홰나무가 천장 가까이 자라나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홰나무 아래 지어진 2층짜리 누각이 시간도조가 평소 수행을 하는 곳이었다.

    정명호 바깥 반원형의 형태로 지어진 백옥 광장에 고랑이 파여 맑은 호숫물을 끌어들여 구역을 나누었고, 절반짜리 고리 모양의 기다란 구역들에 보랏빛 옥으로 만든 탁자 수만 개가 놓여있고, 탁자 위에 은은한 향이 나는 신선한 영과를 두고 연회의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좌석들 사이로 수백 장마다 무대가 설치되어 궁장 차림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춤을 선보였다.

    광장 중앙은 거의 정명호를 등지고 가깝게 붙어 있었고 7개의 보랏빛 탁자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아직까지 자리를 잡은 이는 없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이 늘어선 백여 개의 좌석은 벌써 수십 명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들로 복색은 달라도 하나 같이 진선계에서 내로라하는 종문의 노조들이었다.

    심지어 전설로 전해지는 고인들도 수시로 눈에 띄었다.

    그들은 거의 눈을 감고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으나 그 뒤로 앉은 젊은 제자들만 호기심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외가 있다면, 우측 구석에 앉은 백발의 노파 하나가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몸을 앞으로 기우뚱 뒤로 기우뚱하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 뒤로 앉은 새하얀 피부의 수려한 미모를 지닌 백의 여인 역시 그랬다.

    백의 여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순간 몸에서 미세한 보랏빛 뇌전이 일어 곁으로 퍼지려 했다.

    그녀 앞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노파가 휙 몸을 틀어 여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보랏빛이 가시고 눈을 뜬 백의 여인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스승님…….”

    “몽한아, 내 몇 번이나 얘기하지 않았더냐. <오뢰정법진경>이 뇌전법칙의 정통을 잇는 공법이라 해도, 스승의 <대몽춘추>를 수련할 때는 동시에 발동해서는 안 된다. 욕심을 부리다 몸을 상하는 법이야.”

    백발 노파는 여인을 아끼는지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백의 여인은 여몽한이었다.

    한립과 구원성에서 헤어진 뒤 여기 몽담종(夢曇宗) 노조와 인연이 닿아 관문 제자로 들어가면서 꿈속에서 수련하는 무상의 공법을 전수받게 되었다.

    “제가…… 또 꿈속에서 뇌전술을 펼쳤다고요?”

    “어휴, 내 너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사람을 이리 걱정시켜서야.”

    한숨을 푹 내쉬는 노파의 눈빛에 여몽한에 대한 총애가 드러났다.

    노파는 몽담종을 세우고 천만 년 동안 자신을 이을 제자를 찾다가 겨우 여몽한을 만나 제자로 받아들였다.

    오랜 삶 속에 대라 최고봉에 이르러 꿈의 도조에 이르는 최후의 관문만 남기고 있었지만 가능할지 앞길이 캄캄하기만 했다.

    그러다 여몽한을 만나 다른 선택지가 생긴 것이다.

    여몽한의 재능에 자신의 훈육이 더해지면 대도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여몽한이 <오뢰정법진경>에 미련이 깊어 자신이 전수해준 무상의 공법을 수련하는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같이 수련한다는 것이었다.

    “곧 보제연이 시작될 듯하니 더는 졸고 있지 말거라. 보제도과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대도에 이를 가능성이 커질 것이야.”

    여몽한에 대해서만은 모질어지지가 않아 노파도 더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스승님, 저도 보제도과를 맛볼 수 있는 건가요?”

    여몽한은 놀랐다는 듯 물었다.

    “수행원들은 당연히 자격이 되지 않고 천정이 정식으로 초청한 사람들에게만 몫이 돌아간다. 허나 스승은 보제도과를 먹어봐야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네게 맛을 보여 주려 한다.”

    “예? 안 돼요. 스승님의 것을 어찌 제가…….”

    “착한 것. 보제도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느냐? 태을, 대라 수사는 물론 도조들도 몹시 아끼는 과일이다. 물론 보제도과에도 등급이 나뉘어서 천정 수행과 지위 혹은 천정과의 관계를 따져 대접하지.”

    노파는 여몽한의 이마를 톡 치며 웃음 지었다.

    “그럼 스승님의 보제도과는…….”

    “당연히 가장 급이 높은 것이지. 일단 받아두고 급히 복용하지는 말거라. 내 몽담종으로 돌아가 네 혼백과 몸이 상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조금씩 나눠 먹게 해주마. 그래야 약효를 최대로 볼 수 있으니.”

    “몽파 수사의 제자 사랑이 극진하십니다. 보제도과는 지존의 비법으로 수많은 법칙의 힘을 응결한 것인데 어찌 제자에게 내주려 하십니까?”

    그때 옆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파는 고개를 돌려서 누군지 확인하고 퉁명스레 말했다.

    “내 보제도과를 누구에게 주든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여몽한도 궁금해 고개를 돌리고는 체구가 좋은 잿빛 장포를 입은 노인을 발견했다.

    분위기는 신선 같았으나 회색 장포가 낡아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허허, 보제도과는 대도에 이르지 못한 이가 복용하면 수행의 길을 돕고, 대도에 이른 이가 복용하면 천도의 침식을 미루는 효과가 있지 않습니까…….”

    회의 노인은 불쾌한 내색 없이 온화하게 웃음 지었다.

    “창오 수사,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남의 일에는 간섭하지 마시지요.”

    몽파가 힘을 주어 경고하자 창오진군이라는 도호를 지닌 회의 노인은 목을 움츠리고 더는 아무 소리 하지 못했다.

    “스승님, 저기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인가요?”

    몽여한이 깜짝 놀라 물었다.

    “당연하지. 안 그러면 창오 노인 같은 도조 급이 천정에 고개를 조아릴 이유가 있겠느냐. 천정이 위세를 떨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노파는 비술을 이용한 전음으로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여몽한은 마음속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보제도과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선배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여몽한은 창오진군이 일부러 그녀를 일깨우려 해준 말인 것을 알고 전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창오진군이 뜻밖이라는 눈빛을 하다 몽파를 향해 웃어 보였다.

    “몽파, 늘그막에 제자 복은 있습니다. 참한 제자를 들였어요…….”

    말을 마친 그는 휙 사라져 노파 옆의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번잡한 주변을 둘러보며 여몽한은 누군가를 생각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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