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9화 십방만선진(十方万仙陣)
*
청추진인은 수결을 맺어 응천문 앞을 가로막은 강대한 금제를 거두었다.
청추진인이 윤회 전주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금제는 곧바로 회복되었다.
문 안쪽 머지않은 허공에 누각과 같은 거대한 마차가 떠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간은 용머리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고, 전방에서 용머리에 말의 몸을 지닌 용수 8마리가 마차를 끄는 비범하기 짝이 없는 보물이었다.
“품격이 있습니다.”
그걸 본 윤회 전주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전주와 동반하지 않으면 저도 못 누렸을 호사입니다.”
청추진인이 정중히 답했다.
마차에 오르자 그 안은 또 다른 세상이라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공간이 넓었다.
청추진인의 외침에 영수들이 힘차게 뛰어 마차를 천궁대륙으로 이끌었다.
발굽에서 불이 나와 기다란 불의 길을 맞들어 마차는 순식간에 모두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마차 위, 두 사람만이 누각에 마주 앉아 있었다.
“솔직히 전주의 의중이 궁금하군요.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는 홀로 연회에 참석하다니 도대체 싸우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화해를 하려는 것입니까?”
청추진인이 참다못해 물었다.
“청추 수사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미소를 지은 윤회 전주가 말했다.
“그리 답하시면 정말 할 말이 없군요.”
“청추 수사, 이번 보제연이 열리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윤회 전주의 물음에 청추 진인이 머뭇거리다 답했다.
“주요 장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천궁대륙이지만 이번에는 참석 인원이 많아 다른 곳에도 회장을 마련했습니다. 동성대륙에도 한 곳이 있어 저는 수사를 천궁대륙으로 안내한 다음에 다시 돌아와야 하고요. 명령이니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중토선역 전역이 보제연의 연회장이란 소리군요.”
* * *
수일 후 용연선역, 천연대륙.
광활한 해역에 검은 구름이 껴서 바다와 하늘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 파도가 높게 치는데, 그 사이를 금색 둔광이 한 척의 배를 품고 지나고 있었다.
선박 앞에 선 청포 사내는 키가 크고 평범한 얼굴을 지녔지만 형언할 수 없는 특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세 번째 참시에 성공한 한립이었다.
보통은 세 번의 참시를 마치면 천도와 융합되어 한 걸음 한 걸음 도조의 자리에 가까워지겠으나 그는 시간법칙을 익혀 외나무다리에서 원래의 시간도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시간 유속과 광음의 강을 느끼면서도 천도와 결합하지는 못하는 난감한 처지였다.
그의 뒤로 남궁완과 금동이 서 있었다.
“내가 잡혀 있는 것도 아닌데 윤회 전주는 왜 천정으로 간 걸까요?”
미간을 좁힌 남궁완이 의문을 제기했다.
“감구진이 전해온 소식에 이유는 없었소. 그것도 그의 뜻이었겠지.”
“일부러 당신에게 계획을 알리지 않았단 건가요?”
“내 추측으로는……. 윤회전과 천정은 오랜 세월 싸우며 서로서로 첩자를 심어 두었을 것이오. 내가 그의 계획을 모르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게 더 나을 거라 여겼을지도.”
한립의 말이 남궁완도 일리가 있다 여겼다.
“금동, 너는 나를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헌원걸이 죽어 복수를 마쳤으니 이번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너는 관여하지 않아도 돼.”
남궁완을 스쳐 금동을 바라본 한립이 말했다.
“헌원걸이 날 죽인 건 어차피 천정의 지시 때문이었어요. 그자만 죽인다고 내 복수가 끝났다고 할 수는 없죠.”
금동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사실 그녀가 한립을 따라가는 건 복수를 위해서이기보다는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그녀도 도조의 지위에 이르러 실력이 상당했기에 한립도 크게 염려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선박이 수십만 리를 지나 먹구름을 뚫고 나왔다.
해역의 섬들을 훑은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런…….”
무의식중에 남궁완을 자신의 뒤쪽을 끌어당긴 한립은 전방의 이변을 주시했다.
하늘에 거대한 은색 빛기둥이 떨어져 만장 파도를 만들고, 은빛이 동서남북으로 퍼져 한립 일행을 에워쌌다.
동쪽에는 호리호리한 보라색 장삼을 입은 미인이 서늘한 얼굴로 은색 거울을 들고 있었고, 서쪽에는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구불구불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입가에 노란 뻐드렁니를 드러낸 채 역시 은색 거울을 들고 있었다.
남쪽과 북쪽에 나타난 백발의 꼬부랑 늙은이와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백발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막대한 기운 파동을 내뿜는 넷은 모두 도조였다.
“일단 화지공간에 들어가 있으시오.”
한립은 급히 은색 빛의 문을 열었다.
“조심해요…….”
남궁완은 심란한 얼굴로 당부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려움 없이 네 사람을 살핀 금동이 한립에게 말했다.
“도조가 넷이라. 나를 노린 걸까요 아니면 수사를 노린 걸까요?”
“지금이 농담할 때이더냐? 저들이 든 거울이 심상치 않으니 어서 자리를 피해야겠다.”
한립은 호승심이 느껴지는 금동의 말에 실소했다.
“그럼 저 거울부터 부수면…….”
금동은 말을 다 마치지도 않고 아무 징조도 없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가죽 갑옷을 입은 구불구불한 수염 사내 앞에 요란한 금빛을 휘날리며 나타난 그녀는 양손을 뻗어 탄서의 기운이 어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수염 거한은 금동이 근접전을 펼치리란 걸 예상했는지 미리 피해 그녀에게 말려들지 않고 수결을 맺었다.
다른 세 사람도 동시에 물러서는데 합을 맞춘 듯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었다.
뭔가 이상을 감지한 한립이 ‘금동’이라 외치고 금빛을 퍼트려 시간영역을 퍼트렸다.
그러나 시간영역이 반절쯤 펼쳐졌을 때, 아래쪽 바다 백만 리가 찬란한 빛에 휩싸여 정체 모를 거대 진법을 이루었다.
삽시간에 기이한 공간파동이 퍼져 나와 세상을 뒤덮었다.
안색이 달라진 한립은 금동을 잡아채 금색 뇌전으로 전송진을 응결해 그곳을 떠났다.
바로 이어서 천장도 되지 않는 곳에서 그들이 나타났다. 멀리 전송되지 못하고 아직 해저 빛의 진법 위였다.
“공간이 봉쇄되어 뇌진술로 떠날 수 없겠구나.”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괜찮아요! 시간이 걸려도 해치우고 가면 되죠.”
씩 웃은 금동이 말을 마치자마자 동서남북에서 홀연히 눈을 찌를 듯한 은빛이 방출되었다.
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든 은색 빛의 거울에서 굵직한 빛기둥을 분출하고 있었다.
은색 빛기둥은 마치 천만 개의 거울이 서로 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은빛 허상을 방출해 하늘 위에 겹겹이 들어찼다.
부서진 거울 파편과 같은 은빛이 이룬 빛의 장막이 해저 진법과 호응해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으로 백만 리를 감쌌다.
한립과 금동이 무얼 하기도 전에 주위의 풍경이 달라졌다.
청명하던 하늘에 밤이 도래하고 주위 허공에도 검은 종이가 한 장씩 덧대어진 것처럼 빛이 차단되었다.
완전한 암흑 속에서 그들은 빛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환술일까요?”
“환술보다는 고명한 공간비술 같구나. 이미 용연선역이 아닌 듯해…….”
금동의 의문에 눈동자에 보랏빛이 어린 한립이 답했다.
이제야 자신의 강대한 의식으로도 해저 진법을 미리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법 자체가 그곳 해역에 위치하지 않고, 공간을 넘어 나타난 네 도조가 술법으로 소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네요. 백만 리 내에 우리 둘의 기운밖에는 느껴지지 않아요. 이렇게 조용히 있을 거면 우리를 여기로 왜 던져 놓은 거죠? 천지영기가 차단되었다고 우리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요.”
“의식을 더 멀리 퍼트리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감옥과 마찬가지야. 저들은 그저 우리를 이곳에 가둬두려는 것 같다.”
고개를 저은 한립의 말에 금동의 표정이 달라졌다.
천만리 내의 허공에 기괴하기 짝이 없는 공간의 힘이 퍼져 거대한 공간장벽을 이루고 중간에 그들을 가두고 있었다.
“아니, 공격은 안 하고 왜 가두기만 하냐고요. 설마…… 우리가 천정으로 가는 걸 막으려고?”
“보제연이 시작되었는데 네 명의 도조가 나타나 이런 짓을 벌인 것을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구나. 겨우 나 같은 대라경 수사를 천정에서 이리 경계하다니 의외야.”
한립이 웃음 지었고 그 말을 들은 금동도 피식 따라 웃었다.
“삼시를 베어냈고, 천정의 도조도 수사에게 둘이나 당했잖아요. 그중 한 명은 천도칠군 중 한 명인 헌원걸이고요. 그런데 어떻게 경계를 안 할 수 있겠어요?”
한립은 금동의 타박에 코끝을 문지르며 탄식했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지금 그의 수행에 시간도조가 직접 나타나 죽이려고 들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어디 이곳이 정말 우리를 가둬둘 수 있을지 보자고요.”
금동은 벌써 몸이 근질근질한지 손목을 풀고 있었다.
“그래, 공간결계를 뚫을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한립도 멀리 허공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금동이 금빛을 일으켜 날아갔다.
몇 초 만에 천만리 밖 암흑 공간에 금빛 화염이 퍼지고, 방대한 체구의 금색 딱정벌레가 무언가와 부딪쳤다.
이에 허공에 은빛이 폭발해 강대한 공간법칙의 힘을 함유한 거대 장벽의 존재가 드러났다.
금동은 몸통박치기로 안 되자 나선형의 금빛 빛기둥을 불러내 앞세우고 다시 돌진했다.
쿵…….
굉음이 들리고 금동이 튕겨 나왔지만 은빛 장막은 잠시 물결만 칠뿐 부서지지 않았다.
다시 시도하려던 그녀를 한립이 붙들었다.
“공간이 특수해 장벽 뒤에 방대한 힘의 근원이 느껴진다. 힘만으로 뚫릴 것 같지 않으니 찬찬히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겠어.”
그들은 공간장벽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공간 결계 바깥도 역외공간 비슷한 어두운 허공이었다.
두 사람을 막아섰던 도조들은 결계 바깥에 떠서 신중한 눈빛으로 내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결계 내부는 까맣게 어두웠지만, 그들은 내부를 속속들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자삼 수사, 저들이 십방만선진을 부술 수 있겠습니까?”
수염 거한이 입을 열었다.
“수사도 말했다시피 이건 십방만선진이에요. 우리 넷이 저 안에 갇혀 있어도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없는데. 저들이 빠져나오려면 최소한 만 년은 걸릴 거예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보라색 의복의 여인이 답했다.
“동리호는 저들이 진법을 파훼할 능력이 된다고 보는 건가요?”
추레한 노파가 주름진 얼굴로 물었다.
“주안 수사, 저들은 탄서법칙의 도조와 시간법칙의 대라 최고봉 수사입니다. 천군들도 꺼리는 인물들을 상대로 경계심을 유지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동리호라 불린 수염 거한이 반문했다.
“십방만선진이 어떤 진법인데요? 선역 10개의 계역의 힘을 모아 그 선역들의 진법을 중추로 삼고 있습니다. 각 선역에 못해도 대라 수십 명과 태을옥선 수백 명, 수천의 금선들이 주둔하며 결계 대전을 발동하는데, 이게 뚫리면 우리가 천정으로 돌아갈 낯이나 있겠습니까?”
주안이란 이름의 노파가 냉소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빛은 암흑 속을 쳐다보았다.
검은 장막 위에 10개의 거대한 창문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이 각기 다른 선역과 연결된 통로였다.
각각의 ‘창문’ 안에는 높다란 산맥, 바닥이 울창한 숲 등 다양한 자연환경이 펼쳐졌다.
산과 섬 위에 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마련된 거대 진법 중앙에는 거의 만장 높이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주안 노파가 말한 대라와 태을옥선 그리고 금선 수사들이 복잡한 주술문자가 새겨진 돌기둥 주위에 앉아 주문을 외면서 진법을 발동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 아래 지면에서 은빛 파문이 떠올라 부단히 돌기둥으로 흡수되었다.
10개의 선역에서는 이 ‘창문’을 통해 볼 수 없는 지역에서도 천지영기가 강물처럼 쏟아져 들어와 진법을 위해 소모되었다.
영기가 부족했던 지역은 벌써 숲이 시들고 강물이 고갈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진법을 지탱하는 인원수는 물론 소모되는 천지영기로도 가히 최고라 꼽히는 진법이었다.
한립과 금동은 자신들이 깨고 나가려는 결계가 10개의 선역과 만여 선인들의 힘이 응집된 진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바깥에는 도조 넷이 버티고 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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