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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218화 (1,975/2,000)

2218화. 천기

*

화지공간 안, 금동이 눈을 뜨고 사라졌다.

다음 순간, 화지공간 깊은 곳에 나타난 그녀는 남궁완을 잡아챘다.

하얀 빛기둥이 인근 누각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빛기둥의 여파가 성난 파도처럼 두 사람을 덮쳐 금동이 금빛 보호막을 일으켜 남궁완을 보호했다.

“성공한 걸까요?”

남궁완은 희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수행만 돌파한 게 아니라 연신술도 완전히 익힌 것 같고요.”

금동은 놀란 얼굴로 수결을 맺어 보호막을 강화했다.

* * *

유명계, 윤회전 내부.

육도윤회반 전방의 허공에서 하얀 빛기둥이 나타나 흡수되었다.

육도윤회반이 심하게 흔들리는 탓에 그 안의 무수한 화면들이 하얀 빛기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감구진이 급히 달려와 그걸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빛기둥은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육도윤회반은 평정을 되찾았다.

“이건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연신술 7성 수련을 마쳤을 때의 현상과 비슷한데? 설마 한립?”

눈을 반짝인 감구진이 윤회 전주에게 연락을 취하려 몸을 돌렸다.

* * *

화지공간 안, 금동이 애써 보호막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식의 힘은 원래 약한 편이라 한립이 누각 안에서 방출하는 강렬한 의식파동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가 한계에 이르기 전에 하얀 빛기둥이 번쩍번쩍하다 자취를 감추고 하늘에는 금색 천문만 남아 금빛을 쏟아냈다.

그 안의 대도법칙의 힘을 감지한 금동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도 도조에 이르며 천도의 힘을 얻었지만 이것만은 못했다.

이제 한립이 얼마나 강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한참 만에 화지공간을 채운 금빛이 가시고, 누각 안의 한립이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서서히 뜬 그의 눈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아 천도의 화신처럼 보였다.

쿠쿵.

그의 위압감에 주변 허공이 붕괴해 지기화신은 겁먹은 얼굴로 금빛을 방출해 몸을 보호했다.

지기화신의 금색 보호막이 순식간에 절반 정도 부서지고 누각도 무너졌다.

강대한 위압감이 주변을 허무(虛無)로 돌리고 있어 화지공간에 균열이 갔다.

“한 수사!”

공간이 붕괴하려 하자 금동이 소리치며 자신의 금빛으로 화지공간을 둘렀다.

움찔한 한립의 두 눈에 감정이 돌아오고 위압감이 사라졌다.

금동은 안심하고 빛을 거두었고 지기화신도 보호막을 치울 수 있었다.

“이렇게 빨리 모든 집념을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졌습니다.”

지기화신이 한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말한 대로 살면서 무궁무진한 집념이 생기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릴 수 있다면 되는 것이다.”

한립은 지기화신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악시, 선시 그리고 눈앞의 자아시를 베어 내다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를 어찌할 생각입니까? 당신으로 인해 삶을 얻었으니 나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넌 악시나 선시와는 다르다. 곁에 두기에는 위험이 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다.”

“지금의 당신에게 내가 위협이나 되겠습니까.”

지기화신이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한립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장천병을 불러내 암녹색 빛을 뿜었다.

푸학!

허공이 갈라지며 수정벽이 생기고 그 안의 소용돌이가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문을 열었다.

“시공간 통로? 시공 난류 속으로 나를 유배 보내려는 겁니까? 나도 원하던 바입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에 작은 변수도 용납할 수 없으니 가보거라.”

한립의 말에 지기화신은 반항하지 않고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소매를 펄럭여 수정벽을 없앤 한립은 장천병을 쥐고 날아드는 남궁완과 금동을 돌아보았다.

“걱정을 시켰소.”

한립이 밝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걱정은요. 뜻을 이루었으니 다행이에요.”

남궁완이 고개를 저었다.

“한 수사,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요?”

금동의 물음에 한립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 * *

기천대륙, 보천종.

용기봉 위에 구름이 짙게 끼어 산 정상을 가렸다.

산 정상에 검은 암석으로 만든 제단에 까만 안개가 회오리쳐 무궁무진한 힘을 끌어들였다.

그 소용돌이 속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노쇠한 머리가 하얀 머리카락을 펄럭거렸다.

오래간만에 눈을 뜬 노인의 한쪽 눈은 하얗게 물들어 시력을 잃은 듯 보였다.

안개가 흩어지고 제단 앞 나무 아래에 준수하게 생긴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는 폭이 넓은 하얀 장포를 입고 백옥을 조각해 만든 바퀴 의자에 앉은 고혹금이었다.

“고 수사, 이미 점괘를 알려주었건만 어째서 다시 온 겁니까?”

노쇠한 노인의 머리가 힘겹게 물었다.

“진단 수사, 보제연을 앞두고 마음이 불안하니 다시 점을 봐줘야겠습니다.”

고혹금은 허리춤에 늘어트린 금색 실들을 정돈하며 말했다.

“난 천도와의 동화가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대로 점괘를 보면 천도에 잡아먹힐 텐데 당신이 내게 약속한 일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일이 우리만을 위한 건 아니지요. 더 이상 우리 수도자들을 억누를 수 없게 하기 위해섭니다. 한 번의 점괘가 부족해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된다면요?”

고혹금의 감정 없는 말에 진단은 주름진 얼굴로 고뇌했다.

“너무 많은 도조들이 연관되어 있어 천괘로 점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습니다. 절반의 술법을 써 해보기는 하겠지만 결과가 어떨지는 그야말로 하늘의 뜻일 겁니다.”

“알겠습니다.”

고혹금이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단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그의 하나 남은 멀쩡한 눈에서 수정빛이 빠져나가 허공으로 흡수되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은빛이 걷히고 진단 노조 뒤쪽의 소용돌이가 요동치며 그의 뺨으로 검은 실들이 촉수처럼 뻗었다.

얼굴 반쪽이 순식간에 사라진 예언도조는 눈이 먼 반쪽 얼굴만 남은 채 허공에 둥실 떠있었다.

“어떻습니까?”

고혹금은 눈살을 찌푸리다 물었다.

“대세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변수가 있겠어요…….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반절만 남은 얼굴로 진단은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변수?”

눈을 가늘게 뜬 고혹금의 말에 진단 노조는 아무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로 키가 큰 사내의 형상과 미약한 시간파동이 전해졌다.

“한립.”

잠시 그 허상을 보던 고혹금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두 글자를 내뱉었다.

“윤회 전주도 운명을 피하지는 못하겠으나 보제연에서 변수가 생긴다면 그 자일 겁니다.”

“허허, 이미 점괘로 그럴 거라는 말을 들었으니 더 이상 변수가 아니지요. 내 직접 처리를 하겠습니다. 어차피 대도쟁투의 일환이기도 하니.”

“그러면 좋겠지요…….”

진단 노조의 말에 자조적으로 웃은 고혹금은 의자의 바퀴를 굴려 어딘가로 향하려 했다.

“그러면 좋겠지요.”

그때 고혹금이 안색이 변했다가 웃음을 흘렸다.

“천정에 귀한 손님이 찾아와 변수를 제거하는 일은 다른 이에게 맡겨야겠습니다.”

“그 변수는 직접 처리하는 게 나을 겁니다.”

생각을 바꾼 고혹금을 진단 노조가 설득하려 했다.

“십방만선진(十方万仙陣)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고혹금은 질문 아닌 질문을 남기고 표표히 사라졌다.

길게 한숨을 내쉰 진단 노조는 습관적으로 이미 멀어 버린 눈을 감았다.

도처의 고목들이 꽃잎을 흩날려 한바탕 꽃비를 뿌리고 있었다.

* * *

중토선역, 동성대륙.

동성대륙 끄트머리에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별처럼 분포한 크고 작은 섬들이 보였다.

이곳의 해안선은 모래사장을 중심으로 여인의 몸의 굴곡처럼 부드러운 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두 섬에 각각 만장 옥석(玉石) 기둥이 솟아 끝이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그 옥석 기둥 위에 얹어 놓은 삼층 지붕에 ‘응천문’이라는 세 글자가 보였다.

중토선역 동쪽의 천문이 바로 이곳이었다.

웅장한 동쪽 천문 바깥에는 금색 갑옷을 입은 백만 천병(天兵)들이 서 있었고 그 뒤로 백 리마다 키가 십여 만장에 이르는 상반신을 벌거벗은 거대 도끼를 든 거인들이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병들과 수천 리 거리를 둔 허공과 아래쪽 섬에도 수십만 대군이 주둔했는데, 천정의 병사들에 비해 복색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 외에 다양한 이종족들이 섞여 섬과 바다를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로 각양각색의 전함이 떠있었고, 그 중간의 암홍색 거대 선박은 삼층 궁전과 다름없고 거대한 광장도 있었다.

암홍색 거대 선박에 까맣게 모인 이들 중 삿갓을 쓰고 검은 장포를 입은 키 큰 사내가 윤회 전주였다.

“전주…….”

윤회 전주 뒤에서 무리가 포권을 하고 송별을 했다.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예!”

한 마디를 남긴 윤회 전주는 둔광을 일으켜 동쪽 천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천정 대군이 출렁이며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윤회 전주는 응천문 앞에서 멈추었다.

“고혹금이 나를 연회에 초대한 것으로 아는데? 이게 손님을 맞이하는 광경인가?”

윤회 전주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웃음 지었다. 그러자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가 천정 병사들의 혼백을 울렸다.

그러나 윤회 전주는 천정 대군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었는지 말소리를 전할 뿐이었다.

동성대륙 중부, 산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지는 산맥 안 어느 하얀 도관.

울창한 숲속의 눈에 띄지 않는 도관에는 3층 장서각이 있었는데, 흑백이 섞인 도복을 입은 중년인이 푸른 서책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청수한 얼굴에 눈빛은 맑고, 콧대는 높으면서 길게 수염을 길러 정말 도문 진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허나 속세의 어리석은 자들이 써놓은 이야기라면 몰라도 고금 이래 정상에 서 있는 자를 꺾는 일이 어디 쉬울까.”

청수한 도인은 책을 내려놓았다.

겉표지에 <범인수선전>이라고 적힌 책은 공법이나 비술경전이 아닌 속세의 ‘망어’라는 범인이 지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왔구나…….”

청수한 도인은 한걸음에 장서각을 빠져나와 동쪽 천문 앞에 나타났다.

천정 병사들은 그의 등장에 한결 안심한 눈치였다.

“청추 노조를 뵙습니다.”

대군이 한목소리로 인사를 올리는 소리가 하늘과 바다를 울렸다.

별 볼 일 없는 도관 노인이 동성대륙 진천루를 지키는 청추진인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이곳에 주둔하는 도조였다.

“허허,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멀리 마중을 나가지 못했으니 실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청추진인은 속세의 도인처럼 포권을 해보였다.

“악객(惡客)에게 과분한 예의를 차리십니다.”

윤회 전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예상치 못한 행보십니다. 남천문을 노리거나 그게 아니면 서천문일거라 여겼는데 여기서 뵙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청추 수사. 난 천정으로 쳐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니 어느 문으로 들어간 들 차이가 있겠습니까. 어찌 됐든 손님이니 들여는 보내 주시겠지요?”

“허허, 그나마 미리 준비를 해두어 다행입니다. 마차는 준비해 두었거든요. 바로 연회로 가시렵니까?”

“부탁드립니다.”

윤회 전주의 말에 청추진인이 길을 안내하려다 멈칫했다.

“수행하는 이들은 같이 안 데려가십니까?”

“불편한 자리에 가는데 혼자로 충분합니다.”

윤회 전주는 호방하게 웃어 보였다.

“과연 대단한 분입니다. 입장이 다르지만 앉았다면 전주와 차 한 잔 나누며 교분을 나누고 싶을 정도로요.”

“우리 윤회전도 청추 수사와 같은 도조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차든 술이든 거절하지 않을 테니 언제든 찾아오시지요.”

“이번 보제연에서 천정과 맹약을 맺고 더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제가 윤회전으로 찾아가 폐를 끼칠 기회가 생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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