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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217화 (1,974/2,000)

2217화. 환영(幻影)

*

백소원이 기뻐하며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받자 그 안에서 진한 향기와 넘치는 선령력이 전해졌다.

“선지증원단(仙芝增元丹) 10알입니다. 본명원기를 보할 수 있을 테니 호언 수사가 열흘에 한 알씩 복용할 수 있게 하세요.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원기를 회복하고 제 수행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열심히 수련을 하면 더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고요.”

“감사합니다! 려 선베님!”

한립의 설명에 감동한 백소원이 다시 절을 올렸다.

“가보세요. 달빛이 마음에 들어 난 더 돌아봐야겠습니다.”

손을 휘휘 저은 한립이 걸음을 옮겼다.

백소원은 그의 뒷모습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났다.

골짜기 안을 유유히 걷던 그가 대숲의 작은 정자에서 멈춰 섰다. 그 안에 하얀 의복을 입은 남궁완이 서있었다.

주위에 무형의 물빛이 아른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부군, 젊은 아가씨가 노비라도 되겠다고 하던데 그리 냉담하세요?”

남궁완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선지증원단을 주었으니 호언도인에게 정은 갚은 셈이오. 이곳의 인과를 거두었으니 갑시다.”

웃으며 고개를 저은 한립이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뇌전빛이 반짝이고 두 사람은 골짜기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어느 상공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천외역.”

눈을 반짝인 한립은 그녀를 데리고 고공으로 치솟아 천외역 안전한 곳에 간단히 동부를 마련했다.

그는 남궁완을 데리고 곧장 화지공간으로 들어갔다.

“수련을 계속할 건가요?”

자신을 쳐다보는 남궁완을 보고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도움은 되지 못하지만, 반드시 성공할 거라 믿고 있을게요.”

“당신의 믿음이 내게는 더없이 큰 힘이 되오.”

남궁완을 안아 이마에 입을 맞춘 뒤, 한립은 죽루로 들어갔다.

금제를 치고 가부좌를 친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꼬박 하룻동안 심경을 다스린 후에야 한립은 의식공간으로 돌아가 앉아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청포 한립과 마주했다.

고개를 들고 한립을 훑은 청포 한립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하하, 그 사이 심경의 변화가 크셨나 봅니다. 이번에는 정말 참시를 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 같고요.”

“그렇다.”

한립은 청포 한립과 긴말 하지 않고 금빛으로 영역을 만들었다.

예상과 달리 청포 한립은 피하지 않고 그의 영역에 둘러싸였다.

한립의 미간에서 수정빛이 반짝이고 청포 한립 주변에 수정 사슬이 나타나 그를 속박했다.

청포 한립은 그럼에도 전혀 걱정스런 기색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한립 주변 공간이 사라지고, 청포 한립도 종적을 감추며 새까만 어둠이 찾아들었다.

“환술?”

도처를 살피며 연신술을 펼친 한립은 강대한 의식파동을 의식거검으로 변화시켜 어둠을 파헤쳤다.

그러나 어둠의 파동이 의식거검을 삼켜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놀라고 있었다.

자아시와 싸우며 연신술이 늘어 7성을 원만하게 익혔으니 환술법칙을 익힌 도조가 나서서 환술공간을 만들었어도 이것보다는 변화가 있었어야 했다.

그때 풍경이 달라져 어둠 대신 핏빛 하늘이 나타났다.

진득한 핏물이 가득힌 피의 연못에 코를 막게 하는 피비린내가 풍겼다.

케엑!

다섯 마리의 흉측한 귀물이 핏물속에서 튀어나왔다.

전신에 피 주머니를 단 귀물들은 양쪽 옆구리에 8개의 팔이 달리고 각각의 손마다 기다란 손톱을 갖고 있었다.

그 추악함과 흉흉한 기운이 마치 사람을 잡아먹고 사는 흡혈귀 같았다.

한립은 귀물들을 앞두고 다섯 자루의 청죽봉운검을 불러내 전광석화처럼 날렸다.

그러나 귀물들은 허상처럼 청죽봉운검들이 변한 금빛을 투과시켰다. 불가사의한 속도로 한립 옆에 이른 귀물들은 그의 몸을 붙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한립은 영역을 발동하려다 멈칫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귀물이 그를 깨물어 피가 튀고 고통이 혼백을 타고 들었지만 그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흥분한 얼굴로 그의 사지를 뜯어 먹는 귀물들 때문에 한립은 곧 빼만 남았다.

다섯 귀물이 동시에 그의 백골 신체를 붙들고 뜯어내려 했다.

“아무리 두려운 것이라도 허상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가?”

한립의 몸에 보광이 번져 귀물들을 스르륵 녹이고 핏빛 연못도 사라지게 했다.

어둠 속으로 돌아온 한립은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풍경은 또 달라져 분홍빛으로 가득한 세상은 수많은 여인으로 가득했다.

열대여섯 살의 생기 가득한 여인들이 그를 둘러싸고 춤을 추며 유혹을 했다. 강철같은 사내라도 마음이 약해질 광경이었다.

그러나 한립은 그런 여인들을 보는 듯 마는 듯 무시했다.

그때 어느 소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숨결을 불어넣는데 백소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 마음은 선배님의 것입니다. 한 선배님께서도 제가 마음에 드시지요?”

간드러진 목소리로 웃음 짓는 백소원 옆으로 또 다른 묘령의 소녀가 다가왔다.

여몽한이 활짝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선배님을 찾아 진선계로 비승한 것입니다.”

춘풍이 불어오고 원요와 연려도 어디선가 나타났다.

“한 형, 연려 언니와 제가 의탁해도 될까요?”

원요는 요염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연려는 붉어진 얼굴로 그의 품에 기댔다.

“미인도 결국에는 흘러가는 구름에 불과한 것. 내가 나이기만 하다면 무언가에 붙들려 있을 까닭이 있는가.”

한립은 태연하게 중얼거렸고, 보광이 나타나 미인들을 펑펑 터트려 버리고 분홍 세계는 암흑 공간으로 돌아갔다.

다음 풍경은 위풍당당한 대전 안이었다.

상석에 앉은 한립 좌우로 윤회 전주, 이원구, 악면, 백택 등 진선계 강자들은 물론 영계와 인계의 인사들도 모여 있었다.

“지존을 뵙습니다. 무한한 영광이 있기를!”

수많은 이들이 그를 향해 엎드려 경배했다.

한립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끌고 오라!”

험악하게 생긴 장수의 외침에 금색 사슬에 묶인 이들이 끌려 들어왔다.

한립의 적이었던 기마자, 석파공, 음승전 등이었다.

그 맨 앞에는 고혹금도 머리를 산발하고 허약한 모습으로 붙잡혀 있었다.

“전부 목을 쳐라!”

거대한 칼을 가지고 들어온 거한이 고혹금을 시작으로 원수들을 목을 댕강댕강 베어 바닥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립의 눈빛은 고요했다.

“지존 어찌하여 기뻐하는 기색이 없으십니까? 온 세상을 뒤져 지존께 해를 끼쳤던 자들을 잡아 왔습니다.”

장수가 한립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권세는 꿈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나라면 허망한 꿈을 좇을 이유가 없지.”

담담한 한립의 한 마디에 펑, 대전 풍경이 걷히고 암흑 공간이 돌아왔다.

연달아 세 가지 환영을 거치며 세 가지 종류의 집념과 망상을 베어냈지만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죽은 이들은 윤회전, 만황계역의 복색을 하고 있었고 그가 알고 있던 대부분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있었다.

윤회 전주, 감구진 그리고 만황계역의 악면, 백택 각 종족 족장들이 겁에 질린 채 죽어 있었다.

뿌연 안개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한립!”

냉철한 목소리와 함께 고혹금이 나타났다.

“보았느냐! 이게 네가 내게 대적한 결과다!”

냉소를 흘린 고혹금의 손짓에 밧줄에 묶인 남궁완, 자령, 금동, 제혼, 류낙아, 석천공 그리고 속세의 부모가 줄줄이 끌려왔다.

그걸 본 한립은 순간 표정이 흔들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네 놈이 중히 여기는 이들은 전부 잡아들였다. 지금이라도 내게 무릎 꿇겠다면 살려두겠으나, 아니면 네 앞에서 전부 참혹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고혹금의 광소에도 한립은 가만히 서 있었다.

“좋다. 시간법칙을 최고봉까지 수련한 자답구나! 어디 두 눈으로 네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거라!”

고혹금은 금빛 칼로 석천공의 가슴을 갈랐다.

그 모습에 한립의 눈빛에 파문이 일다 고요해졌다.

“으하하, 다음!”

두 줄기 금빛이 금동과 제혼의 몸을 잘라 시체 더미로 떨구었다. 한립은 뺨에 피가 튀는데도 물러서지 않았다.

“보아하니 벗은 네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네가 여동생처럼 여기던 류낙아는 어떨까?”

고혹금이 손가락을 까딱해 금빛으로 류낙아의 몸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왈칵 피를 쏟은 한립은 비틀거렸지만 그래도 몸을 가누고 바르게 섰다.

“이제 남은 것은 두 명의 여인과 부모다. 누굴 먼저 죽여 줄까? 그래, 네게 선택할 기회를 주지. 네가 원하는 쪽을 먼저 죽이마.”

고혹금의 계속되는 도발에 한립은 핏기가 도는 얼굴로 서서 숨을 가쁘게 쉬었지만 이를 악물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 실망스럽군. 제대로 된 선택도 하지 못하다니. 하나씩 죽이는 것도 귀찮은데 그냥 다 머리를 날려 버려야겠다.”

“멈춰!”

드디어 한립이 소리를 질렀다.

네 사람을 향해 금빛을 날리려던 고혹금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드디어 결정을 내린 것이냐? 네가 내게 굴복하면 이들은 산다.”

고혹금은 웃음을 터트렸고, 한립은 천천히 걸어갔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매서운 고혹금의 외침에 한립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으하하…….”

고혹금의 웃음소리가 커지며 거대한 검은 손이 내려와 한립의 머리를 뜯어내려 했다.

탱!

검은빛은 한립과 부딪쳐 왜곡됐고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고개를 든 한립은 핏기가 가라앉아 하얀 얼굴로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너…….”

고혹금이 뭐라 말하기 전에 금빛이 나타나 그를 베었다.

푸확!

고혹금의 몸이 찢겨나갔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완이, 자령……. 이런 놈에게 이용당하게 해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몸을 일으킨 한립은 그들을 향해 소매를 저어 핏빛 공간과 환영을 없앴다.

어둠 속으로 돌아온 그는 피곤한 얼굴로 휘청거렸다.

일평생 수행을 하며 정을 끊어내고 살아왔다고 여겼는데 마음속 집념과 역린이 이리 많을 줄은 몰랐다.

“어떤 정도 만나면 결국에는 흩어질 날 있는 것. 내가 내가 아니고 그가 그가 아니면 무엇을 후회하겠는가.”

그가 생각을 정리했을 때 썩은 습지의 풍경이 나타났다.

그는 썩어가는 시체가 되어 몸을 파고드는 벌레에 둘러싸였다.

인상을 찌푸리던 한립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육신도 인연이 닿아 만났다 헤어질 수 있는 것. 모든 것이 덧없구나.”

촤악!

풍경이 찢어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사람의 생에 집념은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마음도 생각도 가라앉히면 다음 관문을 넘어설 수 있을 거예요.”

멀리서 청포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궁무진…….”

지쳐가던 한립이 몸을 떨고 무언가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놓아버리세요. 어떨 때는 포기가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호언도인처럼 수행을 포기하고 유유자적 살아가면 그것도 한세상입니다. 포기하세요. 놓아버리세요.”

청포 한립의 목소리가 그를 유혹했다.

멍해져 가던 한립은 점점 긴장을 풀었는데, 순간 머릿속에 번갯불이 번득 일어 남아있던 의지를 되살렸다.

“가장 지쳤을 때 나타나 나를 현혹하려 하다니! 가라!”

눈빛이 선명해진 한립이 손을 저어 무형의 검으로 청포 한립이 있는 곳을 베었다.

어둠이 붕괴되고 한립은 화지공간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쿵!

부드럽지만 방대한 힘이 그의 의식 속으로 녹아들어 피로감을 날려주었다.

육신도 편안해지며 천신만고 끝에 원하던 바를 이룬 것 같았다.

몸이 붕 떠올라 높이 높이 날아오른 그는 진선계 전체를 발아래 둔 것만 같았다.

마치 무적의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그 순간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져 그런 마음을 억눌렀다.

다시 풍경이 달라져 화지공간으로 빠져나온 그는 이번 공간이야말로 진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지막 관문은 힘에 대한 갈망이었구나! 어찌나 강한지 그 안에 잠식될 뻔했어. 성인이라 해도 수사라면 힘에 대한 갈망은 끊어내기 어려운 것이지.”

간담이 서늘해진 한립은 마음을 다스린 다음에 손을 뻗었다.

“나오거라!”

푸른 빛이 그의 몸을 벗어나 미리 꺼내 둔 지기화신 쪽으로 날아갔다.

화지공간 상공에 금빛들이 몰려들어 천도 대문이 나타났다.

쿠쿵!

현묘한 시간법칙의 힘이 한립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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