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6화.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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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좀 보게. 쓸데없는 소리를 떠든다고 묻는 것도 있고 있었구나. 여기 선자는 누구신지?”
호언도인이 한립과 남궁완을 번갈아 보며 알 것 같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완이라 합니다. 제 반려이고요. 완이, 이분은 호언 수사요. 촉룡도에 있을 당시 내게 도움을 많이 주셨지.”
한립이 나서서 소개를 해주었다.
“호언 수사, 소녀 남궁완이라 합니다. 부군을 돌봐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남궁완이 예를 취했다.
“남궁 선자,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호언도인은 한립을 향해 눈을 찡긋하고 갑자기 번듯한 자세로 남궁완과 인사를 나누었다.
“호언 수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자리를 옮겨 술이나 한 잔 하시지요?”
“뭐, 술 마실 곳은 찾을 것도 없다. 괜찮으면 내 집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면 되지.”
“좋습니다. 수사의 거처로 가서 술 한 병 얻어 마셔야겠어요. 그간 술 빚는 솜씨는 퇴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호언도인은 그가 진심을 나눈 몇 안 되는 벗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다.
“하하하! 수행은 몰라도 술 빚는 솜씨는 나날이 늘었지! 어서 가자!”
안 그래도 한립을 보고 마음이 붕 뜬 호언도인이 얼른 그들을 데리고 환연소택을 벗어나 산 쪽으로 들어갔다.
* * *
한립 등이 도착한 곳은 높은 산봉우리들은 보였지만 천지원기가 짙지 않아 요수도 별로 없고 적막한 산이었다.
이런 곳은 웬만하면 수사들이 거처로 삼지 않았다.
호언도인은 흥이 올라 낭랑하게 시 한 수를 읊더니 자신이 생각하기에 구경할 만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명소를 소개해 주었다.
한립은 별 관심이 없었지만 남궁완은 흥미롭게 들으며 감상을 들려주어 호언도인을 즐겁게 했다.
세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떠들며 반나절을 걷다 어느 산 아래로 향했다.
멀리서도 뭔가 달라 보이는 곳이었다.
고명한 금제가 걸려 있어 태을경 이하의 수사는 발견하지도 침입할 수도 없었다.
하얀 영패를 꺼내 빛을 비추자 허공에 파문이 일고 균열 사이로 입구가 드러났다.
“안으로 가지.”
호언도인의 안내에 내부로 들어간 한립은 고즈넉한 산골짜기에 2, 3층 짜리 죽루가 몇 개 지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대숲과 졸졸 흐르는 시냇물 그리고 유유자적 뛰어노는 작은 짐승들이 있었다.
한쪽의 밭에서는 기이한 화초들이 자라고 그 안에서 두 명이 바삐 일을 하고 있었다.
“어머!”
밭일을 하던 두 여인이 그들을 보고 일어났다.
한 명은 운예였고 다른 한 명은 아름다운 소녀, 백소원이었다.
세월이 흘러 운예와 백소원의 수행도 늘어, 전자는 금선경 후기 후자는 금선 초기의 경지에 이르러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려 수사였군요. 호언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술만 마셨다 하면 수사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운예는 미소를 띠고 다가와 인사했다.
“운 수사,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한립도 그녀를 향해 예를 취했다.
“려 선배님, 촉령도로 데려다 주신 은혜도 갚지 못하고 세월만 흘렀네요. 제 절을 받아주세요.”
백소원이 눈을 빛내며 그에게 절을 하려 했다.
“소원 수사, 그럴 것 없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무형의 힘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멈칫한 백소원은 한립 곁의 남궁완을 발견하고 미소를 보냈다.
눈빛에 운 좋게도 려비우 같은 사내와 함께 다니게 되었다는 뜻이 깃들어 있었다.
운예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크게 놀랐다. 아무렇지 않게 금선경 수사의 거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태을경 수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립은 그들에게도 남궁완을 소개하고 한담을 나누다 죽루 2층으로 올라갔다.
꽤 넓은 공간이 소박하지만 우아하게 꾸며져 있고, 창 밖으로 골짜기의 선경이 보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자리를 잡은 한립은 어쩌다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지 물었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다. 원래 북한선역 어딘가에서 은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많은 회선들이 쳐들어 와서 선계가 난리가 났지. 그렇게 쫓겨 다니다 흑토선역까지 오게 되었고.”
한숨을 쉬며 답하는 호언도인은 자세한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는 눈치였다.
운예와 백소원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속으로 탄식했다.
진선계가 혼란이 빠지니 적잖은 선역이 그 여파로 힘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수도의 길은 점점 더 협소해지고 더욱 고되어져 약자들은 무력하게 목숨을 잃었다.
명의상 진선계를 다스린다는 천정은 그럼에도 보제연만을 준비하며 각지의 인력을 끌어들이고 크고 작은 선역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라경에 이른 실력자나 도조의 눈에 진선계 중저계 수사들은 언제 어떻게 죽어도 되는 개미와 같은 존재일지도 몰랐다.
“흑토선역에 온 후, 이곳에 진언문 유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듣고 인적도 드물어 자리를 잡았지. 어때, 좋지 않으냐?”
호언도인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산도 있고, 물도 있고 보기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고개를 숙여 남궁완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도 기대 같은 것이 스치듯 지나갔다.
서로 역경을 거치며 영계에서 진선계까지 왔으니 도에 대한 갈망도 강했지만 함께 은거하는 이런 조용한 삶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인계에서 영계로 영계에서 진선계로 오며 오직 진선이 되기 위해 고된 수련을 견뎠는데, 그 뒤에 또 다른 수도의 길이 시작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장생불사를 이루어도 이 길은 끝이 없었다.
남궁완도 한립의 마음을 느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한 눈빛을 보냈다.
그들의 마주친 시선과 순간의 호흡이 백마디 말보다 더 많은 뜻을 전했다.
호언도인도 그간 한립이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흑토선역에 온 뒤로 세상사를 묻지 않고 조용히 살아 천정이 한립을 쫓는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한립도 그들이 자신의 일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아 그저 흑토선역에서 수련을 하다 진언문 유적을 살피러 들렸다고만 말했다.
“호언 수사, 천정이 수천 년 전에 진언문 유적을 망가트렸다는 것은 무슨 소립니까?”
“려 선배님, 저희가 인근 종문 세력에 알아본 결과 당시 천정 외에 다른 세력들도 몰려들어 전언문 유적을 안팎으로 샅샅이 뒤졌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찾다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이곳의 영맥까지 훼손해 버렸지요.”
듣고만 있던 백소원이 입을 열었다.
“천정의 행실 답습니다. 호언 수사의 수행이 퇴보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한립은 화제를 돌려 호언도인의 수행에 관해 이야기 했다. 그러나 운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백소원도 고개를 숙였다.
“별 일 아니래두. 흑토선역에 왔을 때 우연치 않게 원수를 만나 싸우다 이렇게 된 것이야. 서로 중상을 입은 것이지.”
호언도인은 웃으며 대충 설명했다.
“그랬군요.”
“다른 이야기를 하지. 내 네게 흑토선역 특유의 재료로 빚은 술을 맛보여 주겠어!”
호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언, 시간이 흘러 서로 위치가 달라졌으니 려 수사라고 칭하는 게 좋겠어요.”
운예는 한립의 끝모를 수행을 느끼고 불안해져 끼어들었다.
“호칭에 불과한데 려 수사든 려 가든 무슨 상관이라고. 아직까지 그런 사소한 것에 목메고 있었으면 벌써 저리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까.”
“하하, 호언 수사의 말이 맞습니다. 오랜 벗을 만나 술 한잔에 정취를 즐기는데 수행의 차이에 구애를 받을 턱이 있나요.”
호언 수사의 시원시원한 말에 한립도 크게 웃음 지었다. 운예도 그들의 말을 듣고 미소 지었다.
시간이 흘러도 호언수사는 여전히 그가 알던 호언도인이었다.
“하하하! 과연 호언 수사의 솜씨가 더 늘었습니다. 이런 귀한 술을 마시며 나날을 보내다니 주선(酒仙)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겠어요.”
한립은 호언이 내온 술을 마시며 칭찬했다.
“술은 부족함이 없는데 마음을 나눌 술상대가 없어 적적했지. 네 녀석이 와서 오랜만에 통쾌하게 마시는구나.”
“영광입니다.”
한립이 호응하며 호언도인과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은 술에 취해 당시 촉룡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했다.
촉룡도에서 머문 시간이 긴 호언도인은 당연히 그보다 촉룡도에 대한 정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북한선역으로 돌아가 직접 촉룡도를 일으키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호언 수사가 나선다면 부족한 자원은 제가 돕겠습니다.”
한립은 아련한 호언도인의 표정을 보고 입을 땠다.
<진언화륜경>을 촉룡도에서 얻은 그도 그곳에 정이 남아 있었다.
“허허, 말 한 번 쉽게 하는구나. 그럴 능력은 되고? 허나 만물이 흥할 때가 있으면 쇠하는 때도 오는 법이지. 종문의 흥망성쇠도 역시 그러하니 끼어들기 보다는 그저 지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호언 수사의 성정이나 일처리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많은 일들을 겪고 또 수행이 크게 떨어지면서 오히려 알게된 것들이 있는 것이지. 은혜도 원한도 전부 뜬구름 같은 것인 게야. 두고두고 집착하며 괴로워하는 것보다 술 한 잔에 노랫가락을 얹어 인생을 보내면 좋지 않더냐.”
호언도인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은원이 구름과 같다……. 구름과…….”
한립은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읊조렸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르고, 또 미래의 내가 어떨지는 모를 일이지. 어차피 모르겠다면 굳이 미래의 내게 집착할 필요도, 과거의 내게 파묻힐 이유도 없는 것이야. 그냥 오늘도 즐겁게 취해 하루를 보낼 수 있으면 되는 것이고!”
호언도인이 취해 흔들리는 몸으로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좋은 말입니다. 은혜와 원한 뿐 아니라 우정, 가족에 대한 애정, 고통과 쾌락까지 대부분이 과거 혹은 미래의 나에 대한 집착이지요. 그런 것들에 묶여 있을 이유가 없는 데도요.”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말에 호언도인은 빈 술잔을 들고 이상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같은 이치로 부모가 육신을 낳아주었다고 하나 수행을 하며 천지원기를 받아들여 환골탈태를 한 제가 이전의 저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나중에 제가 어떨지도 알 수 없고요.”
“육신과 의식에 대한 집념을 버리면 나는 내가 아니고, 그는 또 그가 아니니 어차피 허상이고 모두 구름과 같군요. 허구와 실체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수사와 술 한잔을 나누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한립은 생각에 빠져 홀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호언도인은 더는 그를 신경쓰지 않고 홀로 술잔을 서너 번이나 비웠다.
“고맙습니다, 호언 수사!”
갑자기 벌떡 일어난 한립은 호언도인에게 포권을 했다.
“에이, 술 마시다 갑자기 뭐하는 것이야?”
호언도인도 놀라 일어났다.
“호언 수사가 해준 말씀이 제 오랜 고민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한립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고, 호언도인도 깊게 파고들지 않고 웃음 지었다.
향기로운 선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 호언도인이 먼저 골아 떨어졌다.
한립은 그런 그를 침상으로 옮겨주고 의식으로 몸상태를 살핀 다음 방을 나섰다.
해가 진 하늘에는 뽀얀 달만 은쟁반처럼 걸려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남궁완, 운예도 각자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한립이 골짜기를 걸으며 고요히 밤 풍경을 즐기는데 대숲에서 백소원이 걸어나왔다.
“려 선배님.”
하얀 치마로 갈아 입은 그녀는 자태가 더욱 고와보였다.
“소원 수사, 늦은 시각에 쉬지 않고 무얼하고 있습니까?”
“려 선배님의 수행에 호언 선배님의 상태를 알아챘겠지요?”
백소원은 망설이다 말했다.
“호언 수사는 본명원기가 고갈되었습니다. 싸우다 생긴 부상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기운을 불어넣는 관정술을 과도하게 써서 생긴 현상 같더군요.”
한립이 담담히 답했다.
“맞습니다. 호언 선배님의 수행이 떨어진 것은 전부 저 때문이에요.”
백소원은 고개를 조아렸고, 한립은 놀라는 기색 없이 가만히 서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호언 선배님이 원수와 싸우다 부상을 입은 건 사실이지만 근간을 상하지는 않으셨어요. 원래는 요양하면 회복할 수 있었는데, 제가 사존을 잃은 한에 급히 복수를 하려 금선경 고비에 도전하다 죽을 위기해 쳐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저를 구하려고 부상을 입은 몸으로 기운을 불어 넣어 주시다, 오랜 세월 수련해온 본명원기를 상하고 마셨지요. 저는 그 덕에 목숨을 건졌지만 호언 선배님의 수행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백소원의 목소리에 깊은 슬픔이 어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한립도 탄식했다. 백소원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호언 선배님은 태을경 고수가 아니면 도저히 도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려 선배님은 분명 태을경에 이르셨겠지요. 제발 도움을 주세요. 저는 선배님의 노비가 되든 하인이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사정하는 백소원을 보고 한립은 소매를 털어 백소원을 일으켜 세웠다.
“나와 호언 수사는 본래 벗입니다. 게다가 방금 큰 도움을 얻었으니 수사가 사정하지 않더라도 도울 겁니다.”
한립은 차분히 하얀 옥병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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