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5화. 연마하다
*
보름 후.
한립은 의식공간으로 돌아갔다.
“한 수사, 오늘도 싸우러 온 겁니까?”
청포 한립도 기력을 회복했는지 맑은 눈빛으로 웃고 있었다.
“그렇다. 하지만 그 전에 물을 것이 있다.”
“물어 보세요.”
뒷짐을 쥐고 등을 곧게 편 청포 한립이 말했다.
“지난 번에 자아시를 베어내려면 벗, 반려, 부모를 죽여야 할 거란 말이 무슨 뜻이지?”
질문을 던진 한립은 상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건…… 스스로 깨우쳐야 할 일입니다.”
웃으며 고개를 저은 청포 한립은 답을 알지만 그에게 알려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한립이 더는 입을 놀리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청포 한립도 놀라지 않고 금빛을 일으켜 파도처럼 주먹 허상을 날렸다.
쉭! 쉭!
대오행멸절권 두 줄기가 더 없이 빠른 속도고 청포 한립 머리 위로 떨어졌고, 청포 한립은 몸을 휘릭 돌려 바람 기둥을 만들어 그걸 튕겨냈다.
“하하! 나와의 싸움을 통해 법칙 조종 능력을 키우려 하나 봅니다? 그러면 수행은 빨리 늘 수 있겠군요. 고혹금과 싸워보니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보였던 모양입니다.”
청포 한립은 표표히 뒤로 물러나며 웃어 보였다.
눈을 빛낸 한립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상대의 말이 맞았다.
또 다른 목적은 청포 한립과의 접촉을 통해 자아시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였고.
“허나 조심해야 할 겁니다. 내가 당신을 멸하면 육신은 곧 내 것이 될 테니까요. 어차피 ‘한립’이라는 이름은 변하지 않겠군요.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곧 나이니.”
“어디 그래 보던가.”
한립은 이렇게 말하고 달려들어 수일을 싸우다 서로 지쳐 나가떨어질 때 쯤 멈추었다.
며칠이 지나 기력을 회복한 한립은 다시 의식공간으로 들어가 자아시와 싸웠다.
이런 싸움이 수만 번 이어져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한립의 의식공간 안에서는 금빛 두 개가 잔영을 남기며 맞붙어 육안으로는 움직임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주먹 허상, 손바닥 허상, 검기, 검은 빛 등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굉음이 펑펑 터졌다.
쿠앙!
두 인영이 분리되며 각각 한립과 청포 한립으로 돌아갔다.
금빛을 미친 듯이 반짝인 한립이 주먹을 내질렀다.
평범한 일격으로 보였지만 줄줄이 뻗어나가는 주먹 허상들이 전부 대오행멸절권이라 강력한 힘이 의식공간을 뒤덮었다.
“멸하라!”
제자리에 선 청포 한립은 소매를 펄럭여 하늘 가득한 주먹 허상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웅장한 소리가 의식공간을 채워 일대가 어둑하게 변하고 절세의 힘이 나타났다.
쿠쿠쿠…….
주먹 허상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의식공간도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한립과 청포 한립은 몸을 떨며 서로 뒤쪽으로 튕겨나갔다.
승부를 내지 못했지만 한립은 흥미가 다했다는 듯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만 하렵니까?”
청포 한립도 먼저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더 싸워도 이번 판은 승산이 크지 않으니 다음에 다시 오겠다.”
손을 저은 한립이 사라졌다.
만여 년 동안 싸우며 그들 사이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수행은 말 할 것도 없고 성품까지 똑같으니 분명 적이면서 오랜 벗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본체로 의식이 돌아온 한립은 피로한 혼백을 요양했다.
회복을 마친 그는 더는 의식공간으로 들어가 ‘자아’와 싸우지 않았다.
그간의 싸움으로 시간법칙을 섬세하게 조종하는 데는 거의 한계에 이르러서 더는 싸워도 진보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아시에 대한 이해도 높아졌다.
생각 끝에 한립은 책자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무슨 요수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새까만 책자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티가 났다.
우연히 윤회전을 통해 얻었는데, 어느 도조의 후인이 기록한 것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도조가 참시를 하기 전에 천 년을 허비해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이 막 수도계에 발을 들였던 종문 유적을 찾아가 백 일을 앉아 있기도 했다는 내용 같은 것이었다.
한립이 볼 때 그 도조는 자신이 수도의 길을 들어설 때 느꼈던 초심을 돌아보며 자아시를 베어내는 데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 같았다.
그간 금동과도 교류를 했지만 금동은 참시를 통해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서 그다지 유용한 정보를 주지는 못했다.
검은 책자를 덮고 일어난 그가 결계를 거두고 누각 바깥으로 나가자 남궁완이 바깥에 따로 집을 짓고 수련을 하고 있었다.
만년의 고된 수련과 한립이 준 진귀한 자원으로 그녀의 수행도 진선 최고봉에 이르러 금선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전음을 보내 남궁완을 불러냈다.
“수련을 마친 건가요? 진전은 있었고요?”
“아니, 아무래도 좀 돌아다녀 봐야 할 것 같은데 같이 다니겠소?”
한립이 남궁완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럼요. 진선계에 온 뒤로 제대로 구경도 하지 못한 걸요.”
남궁완은 희색을 드러냈다.
“내가 화지공간을 나서면 시간가속도 사라질 텐데, 금동은 함께 가겠느냐?”
한립이 금동이 수련 중인 곳을 향해 물었다.
“부부가 유람을 하는데 내가 거기를 왜 끼겠어요.”
멀리서 금동의 목소리가 유유히 들려왔다.
한립도 강요하지 않고 영역을 거둔 후 남궁완을 데리고 천외공간으로 빠져 나왔다.
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해 하는 그녀에게 천외역에 대해 설명을 해준 한립은 어딘가로 날아갔다.
* * *
보름 뒤, 그들이 내려선 곳은 격랑이 치는 검은 바다였다.
그다지 선기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머지 않은 곳의 섬은 고명한 금제를 두르고 퍽 번화한 모습이었다.
“독특한 곳이네요.”
“흑풍해역이오. 저기 섬은 오몽도라 하는데, 내 두 번째로 진선계에 비승했을 때 이곳에 오게 되었지.”
한립은 해역과 섬을 보며 추억에 잠겼다.
“가지.”
한립은 남궁완을 안고 방향을 정해 날아갔다.
그는 적당한 속도로 이동하면서 그녀에게 이곳에서 겪었던 일들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며칠이 지나 두 사람은 대형 섬인 흑풍도에 도착했다.
“이 흑풍성에서 외부로 통하는 전송진을 이용했었다고요?”
“그렇소. 오랜만에 오는데 흑풍성은 그대로인 것 같군.”
한립은 눈앞의 낯익은 성을 보고 감탄했다.
윤회전의 북한선역 침략이 여기까지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 싶었다.
하긴 윤회전이 진선계에 잠복해 천정과 암암리에 겨루었어도 중저계 수사들이나 범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립은 남궁완과 같이 성문으로 들어가 대로를 걸으며 구경을 했다.
“무얼 그리 보는 거예요?”
“참시를 앞두고 진선계로 비승해 거쳐온 길을 다시 돌아보며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고 심경을 단련하려 하오.”
남궁완은 아직 경지가 높지 않아 그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를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이틀을 머물며 한립은 가는 곳마다 자신이 겪었던 일, 만났던 사람 등을 설명해 주어 남궁완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흑풍성을 떠난 그들은 낙백량풍을 지나 바깥의 황란대륙에서 그의 과거의 흔적을 따라갔다.
반년 후, 둘은 고운대륙 촉룡도에 이르렀다.
촉룡도는 한립이 진선계에 이르러 처음으로 사문으로 삼은 종문이었다.
이곳에서 꽤 오래 수련했으니 선계에서의 두 번째 고향이라 할 수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북한선역 전체에서 이름을 날리던 촉룡도가 지금은 제자도 얼마 없고 희미하게 전투의 흔적도 남아 있어 당시의 기세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의식을 퍼트려 본 한립은 그 이유를 찾았다.
북한선역은 원래 그리 크지 않은 선역으로 촉룡도를 비롯한 삼대선역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백리염 사건으로 천정의 공격을 받고, 명한선궁 일행이 촉룡도 쪽을 박살내 놓아서 되돌릴 수 없는 타격을 입은 것이다.
물론 창류궁과 복릉종도 크건 작건 그 일에 영향을 받았을 테고.
후에 회계가 북한선역을 침략했는데 세 종문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다시 한번 세력이 기울어 지금의 처지에 이른 것이다.
한숨을 내쉰 한립은 은신술을 써서 남궁완을 데리고 이전에 머물던 적하봉 쪽으로 가보았다.
자신이 떠나고 아무도 살지 않았는지 황폐해져 있었다.
적하봉에 내려서니 촉룡도에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시간법칙을 익히겠다 결심했던 것, 해 도인을 찾기 위해 조급했던 마음, 언제든 추격자가 쫓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오랜 세월 묻어 두었던 기억이 되짚어 볼수록 선명해졌다.
마치 과거가 거울이 되어 진실한 자신을 비추는 것 같았다.
기억을 떠올릴수록 자신의 본심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자아인지 깨닫는 바가 생겼다.
남궁완은 생각에 잠긴 그를 방해하지 않고 곁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적하봉 정상에 앉아 열흘이 넘는 시간을 보낸 한립은 석양이 마지막 빛을 잃기 전에 일어나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궁완은 그런 한립을 보고 이채를 띠었다.
표정과 분위기가 무언가 달라졌는데 어떻게 달라졌는지 콕 찝어 말하기가 어려웠다.
‘심경을 수련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대라의 경지가 과연 현묘하지 않은가.’
남궁완이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한립은 그녀를 데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북한선역과 흑산선역 중간의 만황계역을 두 줄기 둔광이 지나갔다.
속도가 느릿한 것이 어딘가를 향해 급히 가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 * *
흑산선역 부운산맥, 야학곡.
흑산선역은 북한선역과 가까워 회계 침략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 야학곡은 황량했고, 당시 이곳에 남는 것을 택했던 막무설과 우자기도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남궁완과 당시 골짜기 내에서 종종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정자로 가서 술잔을 기울였다.
* * *
흑토선역, 환연소택.
한립과 남궁완이 걸어가는 동안 하얀 안개가 스스로 길을 터주고 있었다.
“이런 곳에 진언문 유적 입구가 있다고요? 사람을 현혹하는 안개가 아닌걸요?”
“그런 안개는 특정 시점에만 나타나오.”
남궁완의 말에 답해주는 한립은 이전과 용모가 그대로였지만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운 느낌이 있었다.
“진언문 유적에 들어가 볼 수 있을까요? 어떤 곳일지 궁금해요.”
“진언문 유적은 공간균열에 잡아먹혀 철저히 훼손되었소. 아마 다시 보기는 어려울 거요.”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요? 그때처럼 회계로 갈 건가요? 진언문 유적이 소실되어서 어떻게 회계로 가야할지…….”
“회계는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소.”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회계 뿐 아니라 마역도 갈 곳이 못되었다.
해 도인이 패하고 마주의 손에 넘어간 마역에 들어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그때 하늘 멀리서 둔광이 반짝였다.
고개를 들어 그곳을 본 한립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환연소택 자체에 쓸만한 재료가 많았고, 이상한 안개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 많은 수사들이 보물을 찾으러 들르곤 했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피하려 남궁완을 데리고 떠나려던 그가 문득 눈을 빛내고 금빛 둔광을 일으켰다.
하늘 끝에서 날아들던 수사가 한립의 둔광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멈춰섰다.
하얀 장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려 가 녀석 아니냐!”
백발 노인은 어안이 벙벙해서는 한립을 알아보았다.
“호언 수사,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흑풍해에서 헤어지고 이곳에서 다시 만납니다.”
하얀 장포를 걸친 백발 노인은 다름아닌 호언도인이었다.
“나야 말로 네 녀석을 여기서 만날 줄 몰랐다. 수행이 많이도 늘었구나. 나는 대체 얼마나 수행이 깊어 졌는지 알아보지도 못하겠어.”
“그간 다양한 경험을 하며 수행이 약간 늘기는 했습니다. 그보다 어찌 호언 수사는 수행이 퇴보한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입니까?”
호언도인은 수행이 진선 중기의 경지로 떨어져 있었다.
“하하하! 수행이니 뭐니 해도 속세의 부귀권세와 다를 바가 있겠느냐. 흘러가는 바람이나 떠도는 먼지처럼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호언도인의 깨달음이 깊은 것을 보니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그간 자아에 대해 생각하며 느꼈던 감정과 호언도인의 말이 통하는 바가 있었다.
“거창하게 깨달음이라고 까지 할 건 없고. 나야 술동이만 가득 차있으면 좋은 사람 아니냐.”
호언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남궁완은 두 사람이 환담을 나누는 것에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기억 속의 한립은 사람을 대할 때 거리를 두고 예를 갖추는 편이지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만큼 둘 사이의 친분이 깊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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