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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214화 (1,971/2,000)

2214화. 자아(自我)

*

울창한 숲 위에서 뇌전이 번득이고 한립과 금동이 나타났다.

급히 의식을 퍼트려 보았지만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거대 손바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안전을 위해 몇 번 더 전송하고는 그대로 멈춰 섰다.

“이번에는 고혹금을 정말 떨쳐 냈나 봐요.”

금동이 훅, 한숨을 내쉬었다.

한립은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안심하고 있었다.

잠시였지만 직접 싸워보니 그와 고혹금의 실력 차이가 확연하게 보였다.

이번에 무사히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저씨, 난 이제 막 도조가 되어 경지를 안정시켜야 해요. 조용한 곳을 찾아 수행을 쌓은 다음에 고혹금을 혼내 주는 것 어때요?”

“금동, 이제 도조에 이르렀으니 아저씨라거나 주인이라거나 하는 호칭은 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앞으로는 그냥 한 수사라 부르거라.”

한립이 손을 내젓는 것을 보고 금동은 생각을 해보는 눈치였다.

“우리의 수행에 겨우 호칭에 얽매일 필요 없다. 게다가 내 언제 너를 영충으로만 대했더냐.”

“알겠어요. 그래서 한 수사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죠?”

잔잔히 미소 짓는 한립을 향해 금동도 웃으며 물었다.

“나 역시 폐관할 곳을 찾아볼 요량이다.”

자아시의 출현은 언제든 위험을 몰고 올 수 있는 화근이었고, 시간도조가 그를 노리고 있는 판에 얼른 실력을 키워야 했다.

“좋네요! 한 수사의 시간차공간에서 나도 덕을 보겠어요.”

“그러자꾸나.”

“도조의 경지에 이르면서 이전 기억도 거의 회복했어요. 수사는 수행이 거의 대라 최고봉에 이르러 자아시만 베어내면 되니 도조의 경지를 겨우 한 걸음 앞두고 있겠네요?”

가만히 그를 보던 금동이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이냐?”

“그렇게 되면 실력은 늘겠지만 고혹금에게는 눈엣가시가 따로 없겠어요.”

“시간법칙을 수련한 순간부터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련해온 시간법칙을 버릴 수도 없는 것 아니냐.”

“고혹금이 그간 해온 짓을 보면 그렇기는 하네요.”

금동이 쓴웃음을 지었다.

“난 사존의 뜻을 이어받아 진언문을 다시 일으킬 사명을 지니고 있다. 고혹금과는 언제든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겠지. 어차피 윤회전이 천정과 고혹금의 주의를 끌어 줄테니 지금이야말로 수행을 높이고 힘을 비축할 기회이다.”

한립의 말에 금동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변을 살핀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가 있는 선역은 의식으로 다 살필 수 없을 만큼 넓었지만 대부분이 사막이고 흙의 원기가 짙었다.

사막에 세워진 성들의 건축양식도 독특한 편이었다.

“황사선역(黃沙仙域)…….”

황사선역은 진선계 500개 중형선역 중 하나로 억만리 사막의 독특한 풍경과 선역 특유의 흙 속성 재료로 유명했다.

그가 놀란 것은 이곳이 황사선역이라서가 아니라, 선역의 위치가 흑토선역과 가깝고 북한선역과도 머지않았기 때문이었다.

연달아 달아나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여기로 온 게 왜요?”

금동은 한립을 보고 물었다.

“아니다. 폐관 수련을 하려면 어느 선역이든 안전하지 않으니 천외역으로 가자꾸나.”

고개를 저은 한립은 곧장 금빛으로 금동을 휩싸 날아올랐다.

천풍역과 청명역을 지나 역외공간에 이른 그는 더 깊은 곳으로 한참을 더 날아가서야 멈췄다.

의식을 퍼트려 비교적 안전한 곳을 찾은 한립은 거대한 운석에 동부를 만들고 금제를 펼쳤다.

모든 일을 익숙하게 처리한 그가 화지공간을 열어 금동과 함께 들어갔다.

“부군, 바깥에서 강렬한 파동이 느껴졌는데 괜찮은 거예요?”

남궁완이 한립을 보고 다가왔다.

그녀는 따라 들어오는 금동을 향해서도 온화한 미소를 보였다.

“금동 수사지요? 하계에서 보았었는데 이런 모습으로 변했을 줄은 몰랐네요.”

남궁완은 먼저 다가가 금동의 손을 잡았다.

“아, 부인…….”

금동은 남궁완의 친밀한 행동이 어색해서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인은 무슨, 부군이 수사의 주인이지 난 아닌걸요. 게다가 내 수행이 한참 떨어지니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남궁 수사.”

금동은 한립에게도 수사라 칭하기로 한 터라 더는 예의 차리지 않고 인사를 했다.

“부군,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금동과 인사를 마친 남궁완이 아까 물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의견이 맞지 않는 누군가와 싸운 것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손을 저은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말에 금동이 속으로 눈을 흘겼다.

한 명은 본원도조, 다른 한 명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고혹금이었는데 한립이 저렇게 말하니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금동은 그가 남궁완이 걱정할까 그렇게 말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남궁완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완이, 우리는 한동안 폐관 수련을 해야 할 것 같소.”

한립이 자신의 계획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좋아요. 나도 당신의 그 신비한 공간을 한번 보고 싶었거든요.”

남궁완은 눈빛이 밝아지며 웃음 지었다.

그걸 본 한립은 곧장 영역을 불러내 화지공간을 둘러싸고 광음천선대진과 진언보륜을 발동했다.

화지공간의 시간 유속이 십여만 배는 가속되었다.

이전에 비교해 그의 시간법칙의 힘이 커져 가속효과도 커졌다.

“와, 신기해요! 시간법칙이 3대 지존법칙 중 하나인 이유가 있었네요.”

“흠, 평범한 시간법칙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오……. 어찌 되었든 시간법칙으로 진선계 제일이라고 자신하지는 못해도 제이(第二)의 자리는 발을 걸친 것 같소. 제일의 자리도 희망이 없다 할 수는 없고.”

남궁완이 놀라워하자 한립은 하하 웃으며 그녀를 향해 농을 던졌다.

늘 진중하던 한립이 장난을 치자 금동은 꽤나 놀란 얼굴을 했다.

“자랑은, 누가 들으면 웃겠어요.”

남궁완이 그런 한립을 향해 눈을 흘겼다.

“한 수사, 남궁 수사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난 적당한 곳을 찾아 수련을 시작하겠습니다.”

금동이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며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하하 웃음을 터트린 한립은 남궁완의 손을 잡고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 폐관 수련이 당신에게 의미가 큰 거죠?”

“반드시 전력을 다해야 할 때요.”

“안심하고 수련에 전념해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요.”

남궁완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잘 읽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저물법기를 꺼내 주었다.

“완이, 내 이번에 폐관 수련에 들어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으니 이 안에 든 단약과 선원석 등 수련자원으로 당신도 수행을 쌓고 있으시오.”

남궁완은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해야 그가 안심할 것을 알았기에.

남궁완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누각을 떠났고, 한립은 내부에 분신참시술에 필요한 진법을 설치해 마지막 지기화신을 꺼내 두었다.

이어서 누각 인근에 겹겹이 금제를 쳐 자신의 힘이 외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 * *

천정의 이름 없는 궁전 앞.

고혹금이 노란 구슬을 들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더없이 강렬한 흙의 법칙을 발산하는 구슬을 쥐고 그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감응한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그 사이에 달아나 버리다니. 아까 그냥 붙잡아 둘 것을 그랬던가…….”

* * *

화지공간 안.

사흘 동안 움직임이 없던 한립은 육신과 정신이 모두 최상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주변의 배치를 확인하고는 다시 앉아 눈을 감고 의식공간으로 들어갔다.

“하하, 드디어 날 만나러 올 짬이 났다 봅니다.”

또 다른 한립이 그곳에 앉아 편안히 웃음 짓고 있었다

그는 그와 똑같이 푸른 장포를 걸치고 표정이 덤덤해서 악시처럼 사납지도, 선시처럼 상냥하지도 않았다.

한립은 상대가 마치 자신과 똑같은 것을 보고 이번에는 참시가 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다른 청포 한립 앞에 도착해 마주 앉았다.

“날 베어내려고 온 겁니까?”

청포 한립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듯 무심하게 물었다.

말을 하면서 손을 저어 둘 사이에 돌로 만든 상과 찻잔을 만들어냈다.

“그렇다.”

한립은 자신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하며 답했다.

“오, 당신은 무엇이 자아시인지 압니까? 또 어떻게 나를 베어내야 하는 지도요?”

청포 한립이 화내는 기색 없이 물었다.

그 말에 한립은 침묵했다.

확실히 자아시에 대해 아는 바가 매우 적었다.

자아시는 악시, 선시에 비해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윤회전 가면을 통해 관련 자료를 구하려 했어도 수확이 미미했고.

“자아란 곧 자신을 뜻합니다. 나를 베어 내려면 자신을 베어야 한다는 뜻이고요.”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뭐지?”

청포 한립의 설명에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숨길 것도 없어서입니다. 게다가 이걸 안다고 해도 나를 베어내는 게 쉽지는 않을 테고요.”

“자신이 넘치는군.”

“그럼 묻겠습니다. 나를 베어내기 위해 동류를 죽일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바깥의 금동은 어떻습니까?”

“자아시를 베어내는데 왜 벗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지?”

청포 한립의 질문에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그럼 자신의 반려는 어떻습니까?”

청포 한립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또 물었다. 이번에는 인상을 굳힌 한립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면, 부모를 죽이는 것은요?”

“내 보기에 무엇보다 그냥 너를 죽이는 것이 가장 낫겠구나.”

벌떡 일어난 한립은 청포 한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산만한 금색 주먹 허상이 날아갔다.

고개를 저으며 탄식한 청포 한립이 소매를 털어 하얀 손끝에서 강렬한 금빛을 발산했다.

펑!

손바닥이 놀랍게도 금색 주먹을 막고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걸 본 한립은 다른 주먹을 날렸고, 동시에 금빛 시간영역을 일으켜 청포 한립을 감쌌다.

청포 한립 주변에도 금빛이 퍼져 또 다른 시간영역을 만들고 있었다.

한립의 또 다른 주먹이 청포 한립의 영역에 맞았지만 바위가 바다에 가라앉는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두 영역이 힘 겨루기를 하면서 대치했다.

“당신과 나는 수행도 신통도 같습니다. 괜히 힘 빼지 마시지요. 나를 베어내려면 그보다는 자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우선일 겁니다.”

청포 한립은 담담히 웃음 지었다.

한립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척하며 수십 줄기의 뇌전 검기를 날렸다.

인상을 찌푸린 청포 한립은 수결을 맺어 똑같이 금색 뇌전 검기를 형성해 공격을 막았다.

의식공간 안에서 대대적으로 붙은 한립과 청포 한립은 실력이 비슷해서 승부를 내기가 어려웠다.

별안간, 십여일이 지나갔다.

둘 다 상당히 기운을 소모해 숨을 헐떡이며 멈춰서 있었다.

코웃음을 친 한립은 흐릿하게 의식공간에서 빠져나왔다. 본체로 돌아오고 나자 이루말할 수 없는 혼백의 피로가 전해졌다.

자아시와 의식공간에서 싸우다 보니 혼백의 힘으로 겨루어 그 부담이 막중했다.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지던 그가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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