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화. 충조(蟲朝)
*
고창선역(高昌仙域), 명령종(螟蛉宗)
만리독무가 가득한 산맥에 미궁과 같은 궁전들이 분포해 있었다.
개미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이종족들이 검은 갑옷을 입고 미궁 속을 돌아다녔다.
그 산속 가장 깊은 곳의 지하궁전.
거대한 흰색 여왕개미는 비대한 하반신과 달리 상반신은 인족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었다.
인족의 기준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하고!
눈을 감고 있던 여왕개미가 번쩍 눈을 뜨고 놀라워했다.
“설마……. 그래, 그런 거야. 반드시…….”
뭐라고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한 반인반충의 여왕개미는 묘령의 소녀로 변신해서 대라 후기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봐라!”
그녀의 외침에 8명이 날아들어 무릎을 꿇었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 찾아왔다. 대군을 정비하라!”
“존명!”
여왕의 말에 수하들이 미친 듯이 기뻐하며 답했다.
이날 고창선역 각지에서 역사상 최초로 최대 규모의 충조(蟲朝)가 발생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어난 영충들은 인근의 성을 공격하지 않고 까맣게 하늘을 가린 채 선역에서 가장 높은 산인 축원봉(竺源峰)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축원봉 꼭대기 위에도 만장 규모의 공간균열이 갈라져 있었다.
* * *
북한선역.
명한대륙 북극지방의 설원은 사시사철 눈보라가 치고 만년현빙이 얼어붙어 있어 사람은 물론 생명체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 만장 빙산 속에 무언가가 흐릿하게 들어있었는데, 아무런 징조도 없이 빙산이 쪼개졌다.
곧이어 광풍이 몰아치고 빙산을 털고 일어난 수천 장 크기의 거대 고치 속에서 남색 빛을 만발하며 두 개의 기다란 더듬이를 이마에 늘어트린 백발 사내가 빠져나왔다.
마른 뺨과 영준한 얼굴 그리고 남색 수정처럼 빛나는 눈이 차가워 보이면서도 매력적이었다.
남색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의 등 뒤로 네 장의 남색 빛의 날개가 달려 반짝거렸다.
대라 최고봉의 존재였다.
“왕께서 돌아오시는 구나…….”
* * *
중토선역, 천궁대륙, 천정 모처.
비취색 청옥으로 지은 거대 궁전 안에 단발에 근육질 몸을 지닌 암녹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비취색 왕좌 앞에서 왔다 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이마에 볼록 솟은 힘줄과 노기등등한 눈빛이 그의 감정을 알려주었다.
대라급 강자인 천정 신관(神官)들이 그의 앞에서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서서 예의 바른 표정 뒤로 두려움을 감추고 있었다.
금강불괴처럼 단단해 보이는 사내의 이름은 헌원걸로 오행본원 도조이자 천정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천도칠군의 일원이었다.
“그게 사실이냐? 호량선군 말고 동추도 죽었다고?”
옥좌의 난간을 짚은 헌원걸이 냉랭히 물었다.
“천군노조께 아룁니다. 윤회팔자가 전부 출격해 두 명씩 한 조를 이루어 보제령을 지닌 수많은 선역 강자들을 암살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두 분은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 앞에 서 있던 한 명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
다른 이들도 더욱 몸을 낮추고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호량선군은 그렇다 치고, 동추진인은 헌원걸의 오랜 벗의 아들로 자주 왕래를 하지는 않아도 정이 든 사이였다.
“윤회팔자 중에 어느 두 놈의 짓인지 알아냈느냐?”
눈꼬리를 파르르 떤 헌원걸이 다시 물었다.
“염탁과 현어라 합니다. 신분을 숨기지 않고 동추진인 종문의 조사당까지 가루로 만들고 사라졌답니다. 천정의 추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보로 보입니다.”
보고하던 자가 계속해서 답했다.
“그놈들의 위치를 파악해라. 반드시 죽여서 혼백을 뽑아내고 말 것이야.”
“예!”
이때 헌원걸이 돌연 표정이 달라졌다.
“오래 세월이 지났건만 또 해보자는 것이냐? 그래, 이번에도 달아날 수 있는지 보마!”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헌원걸을 보며 수하들은 눈치를 보다 입을 닫았다.
“육청산, 조요는 염탁과 현어를 맡거라. 나머지는 나를 따르고!”
“존명!”
* * *
용연선역, 천연대륙.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푸른 해수면이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그 하늘과 바다를 가르면서 기다란 금빛이 날아들어 키 큰 청포 사내와 남색 궁장 차림의 온화하게 생긴 여인으로 변했다.
“이야기 한 대로 여기서부터는 화지동천에 들어가 있으시오. 난 통천탑(通天塔)을 통해 중토선역으로 갈 테니.”
짙은 눈썹에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가 여인에게 말했다.
궁장 여인은 남궁완, 구레나룻 사내는 한립이었다.
“그러기로 한 건 알지만 걱정이 돼요. 천정이 중토선역과 연결해둔 전송진을 이용하려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요?”
“보제령이 있으면 문제없을 거요. 천정이 귀빈을 상대로 엄밀히 조사할 것도 아니니. 게다가 저들도 내가 감히 이렇게 움직일 거라 예상하지 못할 테고.”
“당신만 믿고 있을게요.”
두 사람은 대화하면서 수천 리를 이동해 멀리 청연대륙의 해안선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전방의 수평선에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멈춰선 한립은 남궁완을 끌어 자신의 뒤에 두고 전방을 살폈다.
거무튀튀한 해안선에 각종 벌레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기괴한 일이었다.
주변 수백 리가 전부 벌레 천지에다 그 크기도 다양해서 손가락만 한 영충부터 산만한 것까지 있었다.
똑같은 벌레들이 모여 충조를 이루었다면 신경 쓸 것도 없었지만 수많은 종족이 한곳에 뭉쳐 이동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하군…….”
한립은 가까워지는 충조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충조는 영계에서도 있었는데 어떤 점에서 이상하다는 거예요?”
남궁완이 물었다.
“보통 충조는 단일한 영충 종족들이 모여서 움직이고 대규모 충조라 해도 각기 다른 영충들끼리는 따로 움직이는 법이오. 그런데 이번 충조에 속한 영충들은 종류가 혼잡한 데다 서로 천적인 종류까지 모여 있소.”
한립은 설명을 해주면서 의식으로 영충 무리에서 백 장 크기의 거대 금색 딱정벌레를 찾아냈다.
태을 최고봉에 이른 서금선이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한립은 남궁완에게 말하고 번득 자리를 떴다.
충조 대군 앞에 나타난 그는 시야를 가득 채운 영충들 속으로 뛰어들며 금빛을 퍼트렸다.
반경 십여만 리가 시간영역의 영향권에 들면서 영충들은 날갯짓하던 그 모습 그대로 멈춰 섰다.
서금선 앞에 이른 한립은 손끝에서 수정빛을 뿜어 서금선의 미간으로 흡수시켰다.
조사를 마친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큰일을 내게 말하지도 않고…….”
그는 중얼거리다 말고 남궁완 곁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인 거예요?”
“금동이 다음 경지로 나아가려 하고 있고, 이 영충들은 자신들의 왕을 지키기 위해 몰려가는 것 같소.”
“다음 경지라면……. 대라 후기 말인가요?”
남궁완이 깜짝 놀라 물었다. 고개를 저은 한립이 말했다.
“대라 후기가 아니라 도조가 되려는 것이오.”
“도조…….”
남궁완은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탄서법칙을 타고난 금동은 수행을 쌓는 방식이 평범한 수사들과는 다르오. 원래 도조였던 몸이 분화된 것이니 서로서로 잡아먹어 한 몸이 되기만 하면 삼시를 참할 것도 없이 수행을 높일 수 있소.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수행을 높일 수도 있단 말이오.”
“그럼, 좋은 일인데 왜 그렇게 걱정을 하는 거예요?”
“이런 충조가 용연선역에서만 몰려드는 게 아닌 것 같소. 모든 선역에서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단 말이오. 이걸 천정이라고 모르겠소.”
“그렇다면 정말 위험하겠어요. 어떻게 하고 싶어요?”
남궁완도 상황을 이해하고 그의 뜻을 물었다.
“가서 금동을 도와야겠소.”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런데 금동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고요?”
“그거야 이 충조를 따라가면 되는 것 아니겠소.”
한립은 빽빽하게 몰려가는 영충들을 시선으로 쫓았다.
* * *
역외공간 어딘가.
그윽한 혼돈의 허공에 공간 폭풍이 불다 서로 충돌해 찬란한 빛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거대한 공간 폭풍 지대 끝에 검은 구름이 모여서 등대처럼 빛을 사방팔방으로 뿜었다.
검은 구름은 역외천마가 응집한 것으로 공간 폭풍과 가까이 붙어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검은 구름과 수십만 리의 거리를 두고 허공에 수만 장 크기의 거대 금색 딱정벌레가 떠서 활활 금빛을 발산했다.
웬만한 운석이나 돌풍은 금빛에 가까워지기도 전에 소멸했다.
동시에 금색 딱정벌레 주변에 크고 작은 공간균열이 벌어져 검은 창문을 만들고 새로운 영충들을 끝없이 각기 다른 계면과 선역에서 불러 모았다.
실력이 부족한 영충들은 역외공간으로 넘어오는 길에 폭발에 사라졌지만 남은 영충들은 두려움 없이 금빛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그 속의 서금충들은 금빛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 거대 딱정벌레의 체내로 흡수되고 있었다.
* * *
수많은 공간균열 중 하나에 망망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눈보라가 치는 설원에 더듬이를 길게 늘어트린 백발 사내가 하얀 풍경과 하나가 되어 서 있다가 훌쩍 뛰어올랐다.
역외공간으로 넘어온 그는 새하얀 빛으로 몰려드는 공간 폭풍을 부수고 거대 금색 딱정벌레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절을 올렸다.
“상백이 왕의 귀환을 경하드립니다.”
백발 사내가 격동한 얼굴로 공손히 인사를 올렸을 때, 하얀 치마를 입은 묘령의 소녀가 수백 명의 개미 머리 병사들을 데리고 다른 공간균열 너머에서 날아들었다.
검은 갑옷을 입을 개미 인간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주위를 지켰다.
“상백 수사, 청봉이 가장 먼저 와있을 줄 알았는데, 게으른 분이 이번만은 예외인가 봅니다?”
묘령 소녀가 백발 사내를 향해 웃음 지었다.
“의추 수사…….”
그녀를 돌아본 상백이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혼자고 서늘한 얼굴도 그대로네요. 오, 수행은 꽤 높아졌습니다?”
의추는 놀란 기색이었다.
왕을 따라 천정과 전쟁을 치르던 여덟 장수 중에서 딱 세 명만이 살아남았다.
청봉과 그녀 그리고 상백 중 부상이 가장 심했던 것이 상백이었다.
“왕을 보좌해 적을 막지 못하고 부질없이 살아남았으니 고되게 수련할 밖에요? 그래도 왕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수련을 해왔다니 다행입니다.”
이때, 모기 같은 음성이 상백의 어깨 위에서 들려왔다.
의추와 상백이 흠칫 놀랐다가 긴장을 풀었다.
상백의 어깨에서 윙! 하고 푸른 벌이 날아올라 푸른 갑옷을 입은 키 큰 사내로 변했다.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트린 중년인은 얼굴에 거뭇거뭇 수염이 자라있고 술독에 빠져 있다 나온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금색의 두 눈만은 눈빛이 형형해서 한번 보면 잊기 힘든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의추가 데려온 흑갑(黑甲) 병사들이 그를 보고 포위하려고 했다.
“물러들 가거라.”
의추가 손을 들어 병사들을 물렸다.
“청봉 수사 은닉법칙이 더 느셨군요. 우리 둘 다 당신이 와있는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겁니까?”
인상을 찡그린 상백이 물었다.
“왕께서 부르시는데 시간을 지체할 까닭이 있나요.”
청봉은 부드럽게 자신의 뺨을 쓸며 답했다.
“분부가 있으셨습니까?”
“아니요. 이곳에 온 뒤로 어떤 명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의추의 질문에 청봉이 금색 딱정벌레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딱정벌레의 몸에서 금빛이 폭발해 여인 허상을 응결했다.
무표정하게 모인 이들을 훑은 여인과 소녀의 경계에 있는 허상은 금동이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청봉 등이 희색이 만연해 인사를 올렸다.
“오늘 본 좌는 도조의 자리를 되찾으려 한다. 너희는 본 좌를 위해 호법을 서 모든 적을 막아야 할 것이다.”
천천히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금동이 입을 열었다.
“목숨을 걸고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들의 대답에 여인 허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금색 딱정벌레 몸속으로 되돌아갔다.
금색 딱정벌레의 빛은 더욱 찬란해져 특수한 파동을 사방으로 퍼트리기 시작했다.
각 선역과 계면의 영충들이 모여 역외공간으로 몰려들고 있었고 그중에는 흩어져 있던 서금충들도 섞여 있었다.
그중에는 태을급도 있었으나 대라급의 서금선은 금동이 전부 융합해 남아 있지 않았다.
“헌원걸 그놈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준비합시다.”
청봉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는 온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이 왕을 해치게 두지 않을 거예요.”
얼음장 같은 얼굴을 한 상백이 맹세했다.
“난 진법을 어충진(御蟲陣)을 펼치고 있을 테니, 공간균열로 적이 침입하지 못하게 살펴주세요.”
주위를 둘러본 의추가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