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화. 공생공사(共生共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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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모를 허공.
검은 장포를 입고 삿갓을 눌러써 얼굴을 가린 윤회 전주가 어느 절벽에 서서 빛의 거울을 띄워두고 서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거울에는 한립과 남궁완의 모습이 어려 있었다.
뜻밖에도 윤회 전주는 그들의 만남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 약간 거리를 두고 일고여덟 명이 서 있었는데 그중에는 검은 장포에 머리와 목 등에 붕대를 두른 보천종 원순풍도 있었다.
원순풍이 윤회 전주 곁으로 걸어왔다.
“전주, 남궁완이 유명계를 떠나 천정에 납치될 것이라 제가 미리 알려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관여하지 말라 하시고 저들이 재회하게 놔둔 것입니까?”
“남궁완의 성품은 여상과 다를 바 없이 강직하다. 그녀가 이번 생을 살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면, 내가 억지로 붙들어 두지 않는 한 말릴 방법은 없겠지.”
윤회 전주는 한 번 돌아보고 답했다.
“그래도 일단 뜻대로 유명계를 탈출하게 두었다가 천정이 납치하려 했을 때 우리 쪽에서 구해올 수도 있었습니다.”
“내 이리 한 것은 한립이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정의 진면목을 보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이날까지 나로 인해 천정과의 싸움에 말려든 남궁완을 이렇게나마 보내 주려는 것이기도 하다.”
“한립은 시간도조와 법칙대도를 두고 어차피 충돌할 운명입니다. 고혹금의 성격을 모르십니까? 한립을 제거하며 그 주변까지 티끌만 한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겁니다.”
“그밖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천정의 판단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지.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내가 이 일로 본격적으로 나섰으니, 저들은 내가 ‘당황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야. 이성을 잃고 그들과 전면전을 펼칠 거라 예상했겠지.”
“……그래도 너무 위험했습니다. 정말 남궁완이 천정으로 압송되었다면 일이 어렵게 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침묵하던 원순풍이 입을 열었다.
“풍청수는 조금 모자라더라도 그 윗줄에 있는 인물은 영특한 편이다. 너희 보천종이 양쪽에 패를 걸어두었는데 그들이라고 안 그럴까?”
“남궁완이 쫓기다 변고라도 생겼으면…….”
“그 때문에 자네에게 문제가 없을지 점을 봐두라 일렀는데. 일이 틀어졌다면 당연히 그 책임도 자네에게 물었을 테지?”
윤회 전주의 고개가 원순풍 쪽으로 돌아갔다.
순간 원순풍은 등골이 서늘해졌는데, 윤회 전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내가 이리 눈을 떼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는데 어찌 변고가 있을까.”
“예, 물론입니다.”
윤회 전주의 시선이 빛의 거울 속 한립과 남궁완에게도 돌아갔다.
“전주께서 이런 식으로 한립을 자극한 것은 그와 함께 천정에 대항하기 위해서입니까?”
“이 세상에서 나보다 그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용의 역린을 건드린 자는 절대 죽음을 면치 못하지. 남궁완이 그의 역린이고. 수행이 폭증한 그가 이대로 천정을 두고 보지는……. 흠?”
윤회 전주 앞에 있던 거울 속 한립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직시했다.
다음 순간, 기이한 빛이 번져 빛의 거울을 터트려버렸다.
윤회 전주를 제외한 원순풍 등이 돌발사태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전주, 이게 어찌…….”
“내가 지켜보는 걸 알아챈 모양이구나. 호, 내가 남궁완에게 남겨둔 윤회표식도 제거했고.”
가볍게 웃음 짓는 윤회 전주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이러다 전주에게도 앙심을 품는 것은 아닐지요?”
“그럴지도. 허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걸세.”
원순풍이 슬쩍 떠보았지만 윤회 전주는 걱정 없이 웃어 보였다.
* * *
용연선역 모처의 울창한 수풀 속.
거대한 단풍나무 아래 한립과 남궁완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왜 그래요?”
남궁완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청연대륙으로 가려던 그들은 전송진을 이용해 중토선역으로 가다가 갑자기 이 수풀로 내려섰다.
한립은 대답하지 않고 멀지 않은 곳의 잿빛 바위를 쳐다보았다. 잿빛 나방 한 마리가 바위에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풀, 그 다음에는 물고기, 참새를 쓰더니 이제는 나방? 끈질기게도 쫓는구나.”
혼잣말을 하며 코웃음을 친 한립은 수정빛을 날려 나방을 없애버렸다.
그걸 본 남궁완이 놀라 물으려다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 죽은 나방의 몸에서 윤회법칙 파동이 흘러나오는 거죠?”
“윤회 전주가 손을 쓴 것 같소.”
말을 마친 한립은 남궁완을 자세히 살피고 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남궁완은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살짝 고개를 숙여 목을 내주었다.
그의 손끝에서 은은한 금빛이 반짝이고 목덜미가 뜨끈해졌던 남궁완은 금방 편안해졌다.
“윤회 전주가 내게 표식을 심어둔 건가요?”
“아까 나방과 마찬가지로 윤회 전주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 한 것 같소. 풍청수가 당신을 해치려 했다면 이런 수단들을 통해 즉시 알 수 있었겠지. 허나 지금은 내가 곁에 있으니 그의 도움은 필요치 않소.”
한립은 얼굴을 풀고 대답했다.
그 말에 남궁완도 기분이 좋아져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맞아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뭐든 두렵지 않아요.”
“우리가 평안한 삶을 보내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 있어 아쉬울 따름이지.”
“우리 떠나요. 영계든 인계든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이든 상관없어요.”
남궁완이 한숨을 내쉬는 한립의 손을 잡았다.
“떠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오. 난 평생 마음이 향하는 대로 살았고 어떤 고난이 닥쳐도 내 길을 포기한 적은 없지만, 가면 갈수록 천도와 운명이 관여하지 않는 길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한립은 남궁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씁쓸하게 말했다.
“천도의 운행은 수많은 불규칙한 궤적에 불과해요. 어디 정해진 운명이 있겠어요? 만일 그런 운명이 존재해서 날 당신 곁으로 이끌었다면 고마워해야 겠지만요.”
“그건 나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오.”
한립의 미소에 남궁완의 눈도 초승달처럼 휘었다.
“대라 최고봉에 이르러 점점 더 시간도조와 대도가 상충하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소. 내가 보는 광음의 강을 지배하는 신이 시간도조라면 난 그 물길을 거슬러 올라 반역을 하려는 역도에 불과하지.”
“당신이 그런 걸 느낀다면, 상대도…….”
“시간도조도 분명 느끼고 있을 거요. 세상만사는 결국에는 한 길로 통하기 마련인데 그 하나뿐인 길에 운이 좋으면 아무도 없을 것이고, 나처럼 운이 좋지 못하면 강적이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니겠소.”
“그와 대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함께해요. 죽음이든 삶이든 당신의 곁에서 함께하겠어요.”
한립의 굳은 의지를 느낀 남궁완은 더는 떠나자고 하지 않고 결연한 눈빛을 보냈다.
“안 될 말이오. 천정은 용담호혈과 같은데, 어찌 당신을 데리고 갈 수 있겠소.”
놀란 한립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들어줘요……. 감여상의 기억에 난 윤회 전주를 따라 고혹금에 맞섰고 결국 실패해 죽음을 맞으면서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진다면 당신과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당신이 이기면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보겠어요.”
남궁완은 두 손으로 한립의 어깨를 잡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한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더는 무슨 말을 하지 못했다.
“당신을 꽁꽁 묶어 숨겨 둬야지만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는데.”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일지도 몰라요. 당신 곁에 있어야 나는 마음이 편한걸요? 내가 곁에 있어야 당신도 주저 없이 전력을 다할 수 있을 거예요.”
“꼭 그래야겠다면, 중토선역에 이른 후에는 화지공간에 들어가 있으시오.”
신중하게 고려를 해본 한립이 당부했다.
“약속할게요.”
남궁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이 내려지자 한립은 부드럽게 남궁완의 어깨를 감싸 절색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모든 세상사를 잊고 오직 그녀와 둘만 있는 기분이었다.
“뭘 그렇게 봐요.”
얼굴이 붉어진 남궁완이 살짝 시선을 피했다.
“당신은 여전히 처음 보았을 때처럼 아름답소. 너무 놀라 선녀인 줄 알았지 뭐요.”
“처음 봤을 때 날 선녀처럼 공경하는 눈빛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그보다는 교룡 때문에…….”
남궁완은 여기까지 말하다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한립이 그녀를 품에 안고 옛 추억에 잠겨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그 교룡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소. 음낭대를 교단이라고 오해해서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없었으면…….”
“쉿, 그만하지 못해요.”
진작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그래도 부끄러운지 남궁안이 한립의 입을 막아 버렸다.
울창한 수풀 사이로 전해지는 청량한 바람과 새 소리를 들으며 부드럽게 그녀를 안은 한립은 오랜만에 더없이 편안한 느낌을 향유 했다.
* * *
보름 뒤.
남림선역(南林仙域) 관할의 인계 중에서도 가장 천지영기가 약한 곳.
수많은 생령들 가운데 영근을 타고난 자가 있더라도 수행을 통해 크게 자라기에는 턱없이 자원이 부족했다.
천지영기의 부족으로 선약이나 영초도 잘 자라지 않는 탓에 결단기 수사도 만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였다. 이에 원영기 수사는 이 세계의 절대강자로 통했다.
이 세계에서는 속세의 삶이 더욱 만연했고, 얼마 안 되는 수도 세력은 신과 같은 존재로 전설이나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했다.
수가 부족한 만큼 수도자들끼리의 싸움은 드물었는데, 이날 북원국(北源國)이란 나라의 제일 큰 수도 종문에 원수인 남강국(南疆國) 수사가 쳐들어왔다.
남강국 수사는 겨우 결단 중기 수사로, 벌써 수십 년 전에 결단 후기에 이른 은산종(隱山宗) 당대 종주보다 수행이 한참 떨어져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침입자는 당당히 은산종에 침입해 뼈 피리로 영충을 부리는 어충술을 쓰며 대량의 독극물을 조종해 백 명도 안 되는 종문 제자들을 몰살시켰다.
평범한 독극물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속에 구하기 힘든 서금충 유충 스물여덟 마리가 숨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상을 입고 겨우 살아남은 은산종 장문인과 장로들은 영충과 독극물에 쫓겨 산정상의 조사당 쪽으로 달아났다.
머리가 하얗게 센 아이의 모습을 한 은산종 장문인은 오른팔이 서금충들에게 먹혀 사라졌다.
“과거 한순간의 실수로 원영기에 이르려던 당신을 방해했다고, 이렇게까지 해야만 합니까!”
장문인이 창백한 얼굴로 피리를 부는 삿갓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천지영기가 희박한 이 땅에서 원영기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 않더냐! 네가 앗아간 그 한 번의 기회가 내게는 유일한 기회였다! 일평생 결단기에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 내 심정을 네가 아느냔 말이다!”
삿갓 사내가 냉랭히 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은산종을 멸했으니 이쯤에서 용서를…….”
“네 놈이 죽지 않았는데, 은산종을 멸하기는!”
삿갓 사내는 뼈 피리를 불어 영충들을 움직이려 했다.
그때 천지간에 들릴 듯 말듯한 진동이 퍼졌다가 계면 수사들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고요해졌다.
별안간 영충들이 삿갓 사내의 통제를 벗어났다.
삿갓 사내가 전력으로 영력을 움직여 멀어지려는 영충들을 끌어들이려 하자, 생각지도 못하게 영충들이 경로를 틀어 그에게 달려들었다.
“끄아아악…….”
참혹한 비명소리가 들리고 삿갓 사내는 살이 싹 사라진 채 피 묻은 뼈만 남아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에 은산종 사람들이 겁에 질려 있는데, 영충들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고 높이 날아올라 흩어졌다.
죽다 살아난 은산종 장문인과 장로들은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인계의 웅장한 산꼭대기, 하늘과 맞닿은 곳에 기다랗게 공간균열이 벌어져 전역에서 날아든 각양각색의 영충들을 빨아들였다.
대부분의 영충들은 공간균열 속에서 공간의 힘에 찢겨 사라졌는데 서금충들은 멀쩡하게 그 안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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