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화. 선계 대란(大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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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청수는 완이를 이미 천정으로 보냈다고 했는데, 어떻게 당신이 데리고 있던 겁니까?”
한립이 묻자 진여연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립이 인상을 찡그리는데 남색 영역 안에서 얼마간 기운을 회복한 풍청수가 나왔다.
“여연 대인, 제가 무능하여 폐를 끼칩니다.”
진여연을 향해 예를 올리는 풍청수의 얼굴에는 사죄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풍청수를 본 한립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서늘해졌다.
그의 태도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진여연이 물의 본원 도조이고, 풍청수가 그 분파에 속하는 물 속성 법칙의 도조라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한 수사는 나라고해도 이길 수 있다 장담할 수 없으니, 너무 자책하지 말게.”
차분히 말하는 진여연의 태도는 한립을 대할 때와는 또 달랐다.
풍청수가 복잡한 표정으로 한립을 힐끗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수사, 풍청수가 당신의 반려를 잡아 온 것은 사실입니다만, 천정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남궁 수사를 내어 드렸으니 더는 풍청수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저와 풍청수는 가끔 천정을 위해 일을 하기는 하지만 고혹금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은 아니고, 또 윤회전과 척을 질 마음도 없습니다.”
말을 마친 진여연이 한립을 향해 예를 취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고혹금이 당신들에게 완이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지만, 윤회전이 대규모 침공을 시작했고 천정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있지요. 둘 중 누가 이길지 확신할 수 없으니 완이를 천정에 바로 넘기지 않고 데리고 있다가 어느 쪽이 우세한지 본 다음에 움직일 계획이었군요.
풍청수가 완이를 이미 천정에 넘겼다는 거짓말로 일부러 내 화를 돋운 것도 내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고요. 내 실력을 확인한 후에는 윤회전과도 반목할 수 없어 완이를 내준 것이고요.”
상대의 입장과 동기를 분석한 한립은 말을 이었다.
“진 수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이번만은 용서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내 곁의 사람을 건드렸다가는 이번처럼 운이 좋을 수는 없을 거예요.”
풍청수에게 싸늘한 경고의 눈빛을 보낸 한립은 시간영역을 완전히 거두고 금빛 뇌전으로 변해 사라졌다.
진여연이 그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윤회전이 저런 고수를 영입했을 줄은 몰랐구만. 한 번도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윤회 전주에 신비한 고수라……. 천정과 윤회전 간의 전쟁이 어떻게 될지 더욱 예상하기 어려워졌어.”
진여연은 가볍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여연 대인, 남궁완을 한립에게 내줘 버리면 지존에게는 뭐라 답해야 한단 말입니까?”
풍청수는 걱정이 가득했다.
“자네는 천정으로 보내려 했으나 윤회전에서 갑자기 쳐들어와 구해갔다고 하면 될 것이야. 윤회전과 전면전을 앞둔 천정이 그 일로 우리를 어찌할 여력이 있으려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립 저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게.”
“2천 년 전에 회계에서 만난 적이 있는 잡니다.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동행하던 자들 중에 마역의 황자가 있었습니다. 마역과 무슨 연관이 있는 자가 아닌지 의심이 됩니다.”
“오, 그런 일이?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진여연이 관심을 보이자 풍청수는 회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금선의 경지에서 한걸음에 대라 최고봉에 이르다니. 결코 2천 년 만에 이룰 수 없는 성취이니 당시에는 진정한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종국에 마역의 황자와 같이 허공을 가르고 마역으로 탈출했다면 분명 그자와 연관이 있다는 것인데. 일이 복잡하게 되었어. 설마 윤회전이 마역과도 내통하고 있단 말인가? 회계에서 탈출한 류기노조도 혹시 윤회전으로…….”
진여연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역과 윤회전이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과 다름없습니다. 윤회전 가면으로 공간교역이 가능한 것만 보아도 공간법칙의 힘에 도움을 받은 게 틀림없지요. 진선계에서 마역의 인물이 아니면 누가 공간법칙을 그 정도까지 수련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일은 숨겨진 사정이 따로 있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이채를 띤 진여연의 말에 풍청수는 궁금했지만 눈치껏 묻지 않았다.
“류기노조는 윤회전에서 구해갔고, 만황계역도 윤회전과 결맹을 맺었습니다. 윤회전 세력이 날로 커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랜 세월 동안 암암리에 천정과 대치할 수 있겠는가?”
“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온산에 바람이 불고 빗물이 떨어지니, 진선계에 세상이 뒤집어질 대란이 찾아왔구나. 우리가 이 난관을 무사히 지날 수 있을는지.”
“여연 대인, 저희는 도조입니다. 천정과 윤회전의 싸움에 직접 끼어들지만 않으면 아무 일도 없지 않을까요?”
풍청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대란이 도래했는데 누군들 말려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오늘만 해도 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으면 자네는 죽었네.”
그 말을 들은 풍청수가 얼굴이 굳어 고개를 숙였다.
“하긴 여기서 걱정만 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지. 가세, 상황을 보아가며 움직이는 수밖에 없겠어.”
진여연이 흐릿하게 사라지고 풍청수는 그 자리에 남아 있다가 남색 빛으로 변해 무용종으로 날아갔다.
용연선역 내부의 깨어진 공간들이 회복되고 난장판이 되었던 천지원기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인근의 작은 섬에 한립이 내려서서 금제로 섬을 덮어 가려버렸다.
전투로 선령력 소모가 심해 단약을 복용하고 선원석을 통해 기운을 보충해야 했다.
연달아 두 명의 도조와 싸우는 것은 그에게도 피곤한 일이었다.
기력을 회복한 그는 화지공간 입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 추혼술을 마치고 넣어둔 양산 장문인을 바깥으로 집어 던졌다.
금색 뇌전빛이 번쩍이자 사라진 양산은 어디로 전송되었는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저물대도 전부 거뒀고 남궁완도 되찾았으니 굳이 살생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곧장 남궁완을 데리고 누각 안으로 들어가 침상 위에 그녀를 눕혔다. 단정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진선계로 비승한 후에도 이 침상 위의 여인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다시 만나 기억을 잃은 남궁완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진정으로 다시 만났다고 할 수 없었다.
호흡을 몇 번 해서 감정을 가라앉힌 그가 남궁완의 미간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봉인 주술인 남색 문양이 떠올랐지만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봉인이 사라지고 남궁완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완이!”
한립은 남궁완의 이름을 부르면서 몸을 침상 쪽으로 굽혔다.
그의 눈빛은 무척 따사로웠다.
남궁완은 눈을 뜨기는 했지만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는지 눈빛이 흐릿했다.
그걸 본 한립이 수결을 맺어 맑은 빛을 그녀의 미간에 불어넣어 주었다.
머리가 맑아진 남궁완은 몸을 일으켜 앉았지만 한립을 보는 얼굴에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나다.”
한립은 남궁완의 손을 쥐었다.
설마 교삼이 남궁완이 기억을 되찾았다고 거짓말을 한 것일까?
탁!
남궁완은 그의 손을 쳐냈다.
“당신이 누군데요?”
펄쩍 날아올라 침상 옆에 내려선 그녀는 경계심이 가득해 보였다.
“나요, 한립. 당신의 반려인.”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죠?”
한립의 대답에 눈빛이 흔들린 남궁완은 금방 냉정하게 물었다. 그 소리에 한립은 화가 나기는커녕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정말 기억을 되찾은 것이다!
“완이, 우리가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하오? 혈색시련에서 당신은 소녀륜회공을 수련해 연기기 제자인 척하고 있었지. 혈색시련 비경 안의 영약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오. 솔직히 말해서 그리 정당한 방법은 아니었소.”
한립은 장난스럽게 웃음 지었고, 남궁완도 옛 기억을 떠올렸다.
“후에 우린 함께 위기에 처했고 힘을 합쳐 검은 교룡을 처리하며 인연을 맺었지. 다음으로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마도대전 중이었는데, 남들이 있을 때 당신은 나를 모른 척했어.”
한립은 추억을 회상하면서 둘 사이의 일들을 나열했다.
너무 오래된 일이었지만 기억은 전혀 퇴색되지 않고 어제 겪은 일처럼 선명했다.
“내가 천겁을 이겨내며 헤어져 홀로 진선계에 오름으로써 오랜 이별을 해야 했지.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소.”
그는 영계로 오며 헤어진 일까지 이야기했고, 남궁완은 조용히 이야기를 들으며 수시로 표정이 달라졌다.
“완이, 이 일은 오직 우리 두 사람밖에 알지 못하는 이야기요.”
“난 줄곧 당신에게 붙들려 있었어요. 수행이 약한 내 기억을 읽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남궁완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여전히 신중하군. 하긴 추혼술을 한다면 알아낼 수 있는 정보이기는 하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어 주겠소?”
멍하니 그녀를 보던 한립이 웃음을 흘렸다.
남궁완은 고민했고, 다시 그녀를 찬찬히 살핀 한립이 순간 안색이 달라졌다.
그녀는 진선경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의 기억을 회복하면서 육도윤회반을 통해 얻은 감여상의 수행은 잃은 듯했다.
“완이, 당신은 전생에 대라경 수사였다고 하오. 육도윤회반의 작용으로 진선의 경지로 수행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앞으로 수련에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육도윤회반……. 윤회 전주가 조종하는 이상한 보물을 말하는 건가요? 윤회 전주에게 딸이 하나 있던데 누군지 아나요?”
눈을 반짝인 남궁완이 물었다.
“윤회전에서는 교삼이라 불리지만 본명은 감구진, 당신이 전생에 낳은 딸이오. 무엇이든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물어보시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평온히 답했다.
“전생의 딸? 어떻게 그런 일이……. 윤회 전주는, 그는 왜 당신과 똑같이 생긴 거죠?”
한참을 얼떨떨해하던 남궁완의 질문에 한립은 윤회 전주와 자신이 두 번의 삶을 사는 관계이며, 그가 육도윤회반을 이용해 그녀의 전생 기억을 소생시키려 했던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인상을 굳히고 듣고 있던 남궁완은 평정을 회복했다.
그밖에도 유명계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도 한립을 일일이 대답을 해주었다.
“이제 내 말을 믿겠소?”
“아뇨, 당신과 그가 작당해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인할 수 있죠?”
남궁완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한립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수결을 맺은 그는 72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을 모조리 불러내 뇌전빛을 숨기고 본연의 모습을 보였다.
“완이, 잘 보오. 이 청죽봉운검들은 내 본명법보이고 당신도 본 적이 있소. 여러 번 정련을 거쳐서 외양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금뢰죽 자체의 기운은 남아 있을 것이오.”
남궁완은 청죽봉운검들을 보고 입술을 달싹이다 그를 쳐다보았다.
“아, 그렇지. 이것도 손을 보기는 했지만 예전 모습이 남아 있을 거요.”
한립은 원합오극산도 불러냈다.
그걸 본 남궁완은 떨리는 눈빛으로 한립을 제대로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보물들은 잃어버렸지만 영계에서 수련했던 공법과 신통들을 보여 줄 수도 있소. 춘려검진이나 열반성체 변신술 같은 것 말이오. 완이, 당신이 가장 싫어하던 변신이…….”
한립은 자신이 한립 본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억들을 털어놓았다. 그가 말을 마치기 전에 향기를 품은 바람이 먼저 날아들었다.
남궁완이 그의 품에 뛰어들어 힘껏 그를 안은 것이다.
“이제 믿을 수 있어요. 당신이 한립이란 걸!”
유명계에서 기억을 회복하고 수행이 떨어진 데다 진선계의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했었다.
그러다 익숙한 기운을 지닌 한립을 만나 그를 안으니 이렇게 안심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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