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화. 약속을 지키다
*
“갔느냐?”
감구진이 먼 하늘을 걱정스레 보고 있을 때, 그 옆에 파문이 일고 윤회 전주가 나타났다.
흐릿한 신형이 투영된 분신인 듯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감구진은 그의 출현에 크게 놀란 것 같지 않았다.
“네가 볼 때, 그는 어떤 것 같으냐?”
“무시무시하더군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고 끝 모를 심해와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런 느낌은 아버지에게서만 느껴보았었고요. 단시간에 어떻게 실력을 키운 걸까요?”
“내 짐작이지만, 선시를 참한 것 같더구나. 나와 비교해도 크게 부족함이 없는 실력이겠어.”
윤회 전주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요? 어떻게 벌써 대라 중기에서 후기에 이를 수 있는 거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 관심 밖이다. 기억할 것은 지존법칙이 지존이라 불리는 것은 천도의 근본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악한 자신’과 ‘선한 자신’을 참한 후의 지존 법칙은 특히 천도와 어우러져서 이전과는 확연히 위력이 달라지지. 윤회법칙이 그러하듯 시간법칙 역시 그러하다.”
“지존법칙이 특별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보니 알겠어요. 저도 더 노력해야겠군요.”
숨을 고른 감구진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
“모든 성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지존법칙을 수련하는 일은 다른 길보다 어렵고, 대라경에 이른 후에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진선계에 지존법칙을 익히고자 했던 이는 손에 꼽을 수 없이 많지만 다들 어찌 되었을 것 같더냐. 조급해 말고 네 길을 착실히 걸어가면 된다.”
윤회 전주가 감구진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조언했다.
“예.”
“수련에 뜻이 깊다면 오늘부터 바로 속세로 가서 경험을 쌓는 것이 좋을 것이야.”
“속세로요?”
“선(仙)이 없는 곳에서 어찌 선을 논하겠느냐? 수행의 길을 걷는 수도자들은 선은 물론이고 초심을 잃은 이들이 많다. 그런 면으로는 오히려 범부(凡夫)들만 못하지. 네가 선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여기서는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윤회 전주의 의미심장한 말에 감구진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사로운 마음이 없이 행하는 선은 사람이 환생하며 윤회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복이다. 내 육도윤회반을 조종하지만 대선(大善)을 행해온 혼백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알겠어요. 아버지는…… 정말 약속을 지키러 가실 건가요?”
“우리와 천정 세력 간의 전쟁은 어차피 일어날 일이다. 네 어미가 천정에 잡힌 마당에 구진이 너에게까지 무슨 일이 생기게 둘 순 없다.”
감구진을 향한 윤회 전주의 말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저도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구하러 가고 싶어요.”
“안 된다. 넌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이번에는 윤회 전주가 엄히 다그쳤다.
그 모습에 감구진은 흠칫 놀랐지만 상대의 눈에서 결연한 의지를 읽었다.
“너만 평안하다면 난 전심전력으로 천정과 싸울 수 있다. 네 어머니의 일은 나와 한립에게 맡겨주려무나.”
한숨을 내쉰 윤회 전주가 감구진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사라졌다.
감구진은 허공을 향해 입술을 달싹이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대전 쪽으로 날아올랐다.
* * *
용연선역, 천해대륙(天海大陸), 무용성(霧龍城)
용연선역은 물이 풍부한 곳이라 팔 할 이상이 망망대해이고 이 할만이 육지와 별처럼 산재한 섬들이었다.
천해대륙은 용연선역에서 가장 큰 대륙으로 무용성이 그곳에서 또 가장 규모가 있는 성이었다.
여러 대륙이 만나는 곳에 있어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번영을 이룬 섬이라 용연선역에서 무용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더 유명한 것은 무용성 밖의 무용종(霧龍宗)이었다.
무용종은 용연선역에 뿌리내린 지 오래인 종문으로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곳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용연선역 최대, 제일의 종문이라는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후에 만세불출(萬世不出)의 천재 수사 풍청수가 등장해 도조경에 이르고는 무용종의 위명은 하늘을 찔렀다.
무용성 안의 어느 광장.
백 리는 되는 광장을 남색 장포를 입은 순찰병들이 질서정연하게 돌고 있었다.
무용성의 질서를 유지하는 무용종 외문 제자들이었다.
무용성 만이 아니라 천해대륙 전체가 기본적으로 무용종 관할이라 무용선역의 선궁도 잘 간섭을 하지 못했다.
광장 안에는 거대한 남색 패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었고, 마치 산봉우리처럼 구름에 끝이 가려져 있었다.
그 패루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이 지면으로 이어져 광장 전역으로 이어졌다.
광장에는 크고 작은 전송진법들이 천여 개는 설치가 되어 있어 수시로 반짝거렸다.
진선계 각지의 거대 선역과 연결된 전송진이라 매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오갔다.
그중 어느 전송진이 하얀빛을 반짝이고 여섯 명을 토해냈다.
그중 다섯 명은 친한지 웃고 떠드는데, 푸른 장포를 입은 사내만 약간 거리가 있어 보였다.
“와! 무용성은 듣던 대로 장관이네요. 천지영기가 우리 천항선역(天恒仙域)보다 몇 배는 짙어요!”
남색 옷을 입은 소녀가 길게 숨을 들이쉬며 감탄했다.
“당연하지. 용연선역은 36개밖에 안 되는 거대 선역 중 하나인걸. 우리 다섯 형제가 가산을 털어 전송부를 구한 보람이 있구나.”
검은 장삼을 걸친 노인이 대답했다.
금선경 수사들인 다섯 명 중에 우두머리 격인 자였다.
“물론 한 수사의 덕이 컸습니다. 수사가 아니었으면 전송비를 다 채우지 못했을 겁니다.”
검은 장삼 노인은 곁의 청포 사내를 향해 웃음 지었다.
“아닙니다, 곽 수사.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것이지요. 최대 여섯 사람까지 이용할 수 있는데 수사분들이 동행을 해주셔서 제가 적잖은 선원석을 아꼈습니다.”
“한 수사는 정말 예의가 바른 분입니다. 저희는 수중에 남은 선원석이 얼마 없어 고생을 좀 해야겠지만. 열심히 노력해 자리를 잡아볼 생각이에요. ……그렇지 않더냐?”
검은 장삼 노인의 말에 다른 네 명이 웃으며 대답했다.
“한 수사, 같은 산수인데 원하시면 동행을 하셔도 됩니다. 서로 힘이 되어 줄 수도 있고요.”
“저는 볼 일이 있어 그러기 어렵겠군요. 수사분들의 앞날이 순조롭기를 바라겠습니다.”
노인의 제안에 미소를 지은 청포 사내가 공수를 해보였다.
검은 장삼 노인은 조금 실망한 듯했지만 마주 보고 공수를 하고는 성안으로 날아갔다.
청포 사내는 바로 떠나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이, 거기! 전송광장이 댁네 정원인 줄 압니까? 볼일 끝났으면 어서 떠나세요!”
인근의 마른 호위가 청포 사내가 가지 않고 서서 구경을 하는 것을 보고 냉랭히 소리쳤다.
그런데 청포 사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본 마른 호위는 인상을 굳혔다.
어디 조그만 선역에서 온 일개 산수가 무용종 문하의 제자인 자신을 무시하다니, 일벌백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가갔다.
하지만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서던 호위는 갑자기 표정이 이상해졌다.
청포 사내는 그냥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다가갈수록 온몸에 소름이 돋고 혼백이 떨려왔기 때문이었다.
푸른 장포를 입은 사내는 유명계에서 흑풍해역으로 돌아온 뒤 전력으로 용연선역까지 이동한 한립이었다.
용연선역은 면적이 무척 커서 학강선역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한립의 의식으로도 절반밖에는 살필 수 없었다.
그러나 천해대륙의 무용종 상황을 염탐하기에는 충분했다.
감응을 마친 그가 미간을 좁혔다.
남궁완과 풍청수의 기운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남궁완은 기운이 익숙해서 찾을 수 없는 게 말이 되지 않았고, 풍청수는 도조라지만 연신술 7성을 익힌 그의 감응에서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구진 수사의 정보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침음하던 그는 눈을 가늘 게 뜨고 다가오는 호위를 쳐다보았다.
눈이 몽롱해진 마른 호위는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전부 보여주었다.
연신술을 장악한 한립이 태을경 수사의 기억을 읽는 것은 애들 장난처럼 쉬웠다.
금방 상대의 기억을 조사한 한립은 무용종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확인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정신이 맑아진 마른 호위는 눈썹을 끌어올렸다.
“내가 뭘 하려고 했었지?”
* * *
무용종 내의 고즈넉한 대전 밖, 허공이 흔들리고 한립의 신형이 나타났다.
대전 문 좌우에 서있는 시위들은 태을경 후기에 이른 수사들이었다.
한립을 보고 안색이 달라진 그들이 신호를 보내려는데, 한립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태을 후기 시위들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조각상처럼 섰고, 한립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궁전을 살폈다.
꽉 닫힌 문에는 어슴푸레 하게 강력한 금제의 빛이 어려있었다.
남색으로 빛나는 문을 살핀 한립은 소매를 저어 72자루의 금빛 뇌전을 퍼트렸다.
천해대륙 사방 수백만 리 바깥에 일흔두 자루의 금색 뇌전 검이 떠올라 거대한 원을 이루고 대륙을 감쌌다.
검들에서 튀어나온 뇌전들이 새장처럼 우리를 만들어 대륙을 덮은 다음 공간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먹구름이 짙게 낀 대륙 하늘은 곧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보여 물의 기운이 왕성한 용연선역에서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작업을 마친 한립이 금빛으로 변해 대문으로 날아들었다.
남색 빛이 파도처럼 그의 침투를 막으려 했지만 금빛은 멈추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여윈 노인이 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머리 위에 커다란 남색 꽃봉오리 모양의 빛을 응결하고 청명한 불경소리를 내던 노인이 번쩍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빛이 번쩍이고 한립이 들어선 순간, 노인도 대라 최고봉의 기운을 방출했다.
그러자 웅장한 포효소리와 함께 남색 빛이 용 허상으로 변해 노인을 감싸고 있었다.
별안간 말라붙은 몸에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백발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새까맣게 변한 노인은 나이를 50살은 거꾸로 먹은 것처럼 야수와 같은 기세를 발산했다.
노인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한립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기까지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막대한 힘이 실린 남색 권풍이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차칵.
건물 내부에 균열이 생겼지만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노인이 주먹을 날린 순간, 무용종 곳곳의 금제가 발동되면서 종문 전체를 남색 빛이 둘렀다.
대전 벽에서도 강렬한 남색 물빛이 흘러나와 태고시대의 가락과 같은 현묘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솨아아…….
사방에서 남색 물빛이 넘실넘실 밀려들었다.
그 위력은 노인의 주먹보다 더 강한 듯했다.
대전 내부가 만장 심해로 갈아 앉는 듯 엄청난 압력을 버티고 있었다.
외부의 상황을 감지한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가 펴고는 대충 팔을 뻗었다.
금빛 거대 주먹 허상이 소리 없이 응결되었다.
고요한 와중에 날아들던 권풍, 용 허상, 남색 빛 등이 썩은 나무처럼 잘게 부서져 사라졌다.
경악한 노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바깥으로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주먹 허상은 찰나의 순간, 노인의 머리 위에 도착해 손을 쫙 펴고 파리를 잡듯 내리찍었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른 노인이 전신에서 남색 빛을 터트리며 양손을 머리 위로 뻗었다.
쿠쿵!
하반신이 강제로 지면에 박힌 노인은 처음의 여윈 모습으로 돌아와 힘겹게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숨이 붙어 있기는 했지만 다 죽어가는 꼴이었다.
허공에서 손가락 하나가 노인의 미간을 가리키고 수정 사슬을 내뿜었다. 노인의 눈에서 생기가 가시고 한립이 바닥에 내려섰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 대전을 감싼 결계 앞에 세 줄기의 강력한 둔광이 날아들었다.
덩치 큰 중년인과 남색 장포를 입은 여인 그리고 한 사내아이였다. 모두 대라의 존재로 중년인과 남포 여인은 중기 사내아이는 후기였다.
대전 바깥의 호위들은 인사불성이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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