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202화 (1,959/2,000)

2202화. 이별

*

한 달 뒤, 유명계 황천대택 호수섬의 대전.

대전 앞 돌계단 위에서 흑의 여인이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문을 지키는 두 귀장은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교삼’ 대인은 십여 일 전부터 여기서 저러고 있는데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섬 바깥에서 정반 돌풍을 뚫고 금빛 돌풍이 날아들었다.

그걸 감응한 교삼은 놀라다가 반가운 얼굴로 날아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한립과 자령이었다.

“전주는 어디 있습니까?”

자령의 손을 놓아준 한립이 앞으로 나섰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교삼이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자령을 데리고 그녀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의 문이 닫히기 전까지 입을 꼭 다물고 있던 교삼이 급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벌써 중토선역으로 가셨어요.”

“뭐라고요? 먼저 출발했단 말입니까?”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어머니 일로 얼마나 자책하셨는지 몰라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윤회전은 예정보다 빨리 공격에 들어갔어요. 지금의 진선계는 하루가 다르게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으니까요.”

교삼은 한립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천정이 자신이 중토선역에 오기만 하면 어머니를 풀어주겠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셨어요. 다양한 경로로 어머니가 갇힌 곳을 알아보다가 최근에야 누가 잡아 갔는지 만 알아낼 수 있었고요.”

“그게 누굽니까?”

“풍청수라고, 들어본 이름일 거예요.”

“풍청수라면…….”

한립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회계에서 만난 적이 있는 물 속성 법칙의 도조였다.

“그의 종문 배경, 선부의 위치, 행방 그리고 과거의 전적까지 모든 걸 알아야겠습니다.”

“직접 찾아갈 건가요?”

한립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교삼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풍청수에 대해 내게 알린 이유가 그것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은 하시지는 않았어요. 풍청수는 도조인데, 수사의 수행에…….”

교삼이 머뭇거렸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갈무리해 두었던 방대한 위압감을 방출해 금빛을 드러냈다.

이것도 통제한 것이었지만 백 장 내의 천지원기가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 교삼을 놀라게 했다.

교삼은 대라 후기 최고봉의 위압감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강해지다니. 어쩐지 아버지께서…….”

“그가 천정으로 쳐들어갔으니 모두의 주의력이 그쪽으로 집중되었을 겁니다. 지금 풍청수를 찾아가야 허점을 노릴 수 있겠지요. 그가 천정에 있지 않기만을 바라야 겠지만요.”

한립은 기운을 억누른 다음 말했다.

“중토선역에는 없어요. 또 다른 대형 선역인 용연선역(龍淵仙域)에 있는 무룡종(霧龍宗)에서 폐관 수련한지 시일이 꽤 되었으니까요.”

“잘 되었군요.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주면 내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네, 저도 같이 가요.”

“당신은 안 됩니다.”

교삼의 말에 한립은 단호히 답했다.

“왜죠? 어머니가 그 자에게…….”

“남궁완의 삶을 살기로 선택한 그녀는 당신의 어머니라 할 수 없을뿐더러, 완이도 당신이 오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내 마음속에 그녀는 내 어머니이고, 난 반드시 어머니를 구하러 가야겠어요.”

“당신의 수행에 가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또 자령을 나 대신 마계로 보내주었으면 하고요.”

한립은 돌려 말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 사항을 밝혔다.

그 말에 교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휴, 그래요. 내 실력에 가봤자 수사의 짐만 되겠죠. 하지만 자령 수사는 어째서 마계로 가려는 건가요?”

교삼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직 모르는 건가요? 자령 수사가 석천공 등을 찾으러 가려는 거라면 마계로 갈 필요 없어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한립은 눈을 반짝였고, 듣고 있던 자령도 불길한 예감에 표정이 달라졌다.

“마계에 내전이 벌어진지 벌써 천년 째입니다. 최근 백 년 동안은 싸움이 더 치열해져서 7년 전에는 야양성이 무너지고 적린공경은 완전히 가루가 되었다고 해요. 석천공이 따르는 석공해 쪽이 참패를 당한 거죠.”

교삼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석공해와 석천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소식을 아십니까?”

“지금의 마계는 철저히 봉쇄되어 바깥으로 정보가 새어 나오지 않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얻은 소식에 따르면 석공해는 마주에게 패해 죽었다는 말이 있더군요. 석천공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행방불명이라 합니다.”

해 도인은 전사했고, 석천공은 실종이라고…….

마음이 쿵 내려앉은 한립은 한동안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계 내전이 끝나고 7년이 지났다는 말인데, 그동안에 들려온 소식이 전혀 없다는 건가요?”

자령이 입을 열었다.

“마주가 친히 명을 내려 마계를 봉쇄하라 했답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어떤 정보교류도 불가능하게 되었지요.”

교삼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 일은 우리가 천정에서 돌아오는 대로 알아보는 것으로 합시다.”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이 표정을 바로 하고 말했다.

교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너는 유명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겠구나.”

한립은 자령을 바라보고 말했다.

자령은 잠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흠, 제혼에 대한 소식은 아는 것이 있습니까?”

“제혼 수사는…… 낙혼심연(落魂深淵)으로 갔어요.”

한립의 질문에 교삼이 답했다.

“낙혼심연이 뭐 하는 곳입니까?”

“유명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 할 수 있죠. 아버지도 함부로 가지 않는 곳이니까요. 제혼 수사는 그곳에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대도가 있다면서 말려도 듣지 않고 낙혼심연으로 갔어요.”

“간지는 얼마나 되었고요.”

“백 년 전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교삼의 이야기를 들은 한립은 당장 눈을 감고 미간에서 하얀빛을 반짝이다가 눈을 떴다.

“어떤가요?”

자령이 물었다.

“의식연계가 끊겼구나…….”

한립은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낙혼심연은 혼백들이 가득한 곳이고, 이곳과도 거리가 멀어 심연 속에서 자연적으로 감응이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제혼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어요.”

교삼과 자령이 그를 위로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한립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혼, 금동과 마찬가지로 그도 지금 가야만 하는 길이 있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용연선역으로 출발하겠습니다. 그전까지 풍청수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넘겨주세요.”

마음을 가라앉힌 한립은 교삼을 향해 말했다.

* * *

그날 밤.

호수 섬 대전 지붕 위에 한립과 자령이 걸터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 세월 함께 했지만 같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본 건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는 별은커녕 달도 제 모습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흐릿하게 떠 있었다.

시선을 거둔 한립은 자신 곁에 앉은 자령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도 그녀는 빛이 났다.

“자령, 난…….”

한립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부르며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무 말 마세요. 지금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난 만족하니까요.”

자령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립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잠시 후, 한립이 팔을 베고 누웠다.

“몸조심하고, 완이 언니를 구해와요. 난 어디도 가지 않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자령이 살짝 고개를 틀어 그를 보았고, 한립도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항상 씩씩하고 시원시원하던 그녀가 오늘따라 달라 보였다.

“내가 육도윤회반을 통해 본 지난 생이 어땠는지 알아요?”

“어땠지?”

사실 이 건 그도 궁금했지만 당시 자령의 안색이 좋지 않아 묻지 않았었다.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는 삶은 아니었어요. 지난 삶에서 난 인계의 영근 조차 없는 속세의 여인으로 겨우 백 년도 안 되는 생을 살다 가야 했으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노인이 되기까지 일평생을 한 사람만 기다렸는데, 그 사람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죠.”

천천히 말을 하던 자령은 한립과 시선을 마주쳤다.

뭔가 마음이 일렁인 한립은 아주 오래전 꿈속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부름을 들은 것 같았는데 흐릿한 목소리와 부르는 사람의 윤곽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돌연 그는 자령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살짝 몸을 떤 자령은 더욱 그의 품에 안기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만족해요. 수많은 역경을 지나 우리는 다시 만났으니까요.”

물빛 어린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한립은 자령의 두 눈이 별빛 가득한 밤하늘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때, 밤바람이 돌연 서늘해지며 먹구름을 몰고 와 마지막 달빛을 거두었다.

어둠에 잠긴 황천대택에 추적추적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명계의 비는 선계의 비와는 달라서 끈적한 음기를 지니고 있어 몸에 해로울 것은 없지만 지켜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오랜만의 한적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한립이 손을 저어 비구름을 물리려 했으나 자령이 그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돌아가요.”

“더 있지 않고…….”

말을 마치기 전에 한립은 자령의 붉어진 뺨을 보고 그 뜻을 알아들었다.

하려던 말을 삼킨 그는 그녀를 안아 들고 대전 안으로 향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비바람이 심해지고 있었다.

* * *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었지만 해가 떴을 때는 다른 곳이 된 것 같았다.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친 것이다.

눈을 뜬 한립은 곁에 누운 익숙한 여인을 보고 눈을 떼지 못했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짧은 한숨으로 모든 이야기를 대신했다.

몸을 일으켜 푸른 장포를 걸친 그는 잠시 침상 옆에 서 있다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자령의 긴 속눈썹이 흔들리고 진주 구슬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립이 문 앞에 이르러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자령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흔들리는 촛불만이 조용한 방안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바깥으로 나온 그를 교삼으로 불렸던 감구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는 되었습니까?”

“자령 수사는요?”

감구진은 홀로 걸어오는 한립의 뒤쪽을 살폈다.

“해야 할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고개를 젓는 한립을 보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손바닥 크기의 영패와 검은 옥간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보제령?”

“용연선역은 36개 대형 선역 중 하나로 중토선역으로 통하는 곳이에요. 보제령을 가지고 중토선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면 용연선역까지 가는 길이 편해질 거예요.”

“알겠습니다. 준비를 잘 해주었군요.”

한립은 보제령을 챙겨두었다.

“전부 아버지께서 분부해두신 일이에요. 옥간 안에는 용연선역으로 가는 방법과 풍청수에 관한 정보가 있고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충분합니다.”

“어머니를 꼭 구해주세요.”

입술을 깨문 감구진이 정중히 부탁했다.

“구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간다는 말을 남기고 하늘을 향해 뇌전을 뿜었다.

파칙!

뇌전이 번득이고 한립이 사라진 곳에서 감구진 홀로 남아 사라져 가는 공간 파동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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