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201화 (1,958/2,000)
  • 2201화. 거대 눈

    *

    해역에 들어서자 물 색깔이 점점 짙어지더니 푸르던 바다가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들고 하늘 위에는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그 구름이 얼마나 층층이 쌓여 낮게 내려오는지 해수면과 구름까지의 거리가 칠십여 장에 불과했다.

    이때 바다가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파도가 구름까지 솟아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것 같은 풍경을 만들어냈다.

    쿠르릉.

    두꺼운 먹구름 속에서 수시로 천둥소리가 들리고 굵직한 뇌전 기둥을 내리꽂았다.

    아직 그 뇌해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는데 사나운 기세가 느껴졌다.

    “화지동천에 들어가 기다리거라.”

    한립은 멀리 뇌해를 보고 자령에게 말했다.

    그녀가 동천공간 안으로 들어가고 한립은 72자루의 청죽봉운검을 불러내 그중 하나에 발을 올렸다.

    나머지 71자루의 검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호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콰르릉!

    뇌해로 접어들자 거대한 보랏빛 벼락이 떨어졌지만 한립은 올려다보지도 않았고 청죽봉운검들이 그를 대신해 뇌전을 막았다.

    캉!

    금속성의 충돌음과 함께 비검이 보랏빛 뇌전을 흩뿌렸다.

    한립은 이동 속도를 높이지 않고 천천히 가며 백 장을 갈 때마다 보랏빛 벼락은 한 번씩 맞았다.

    그의 청죽봉운검들이 돌아가면서 뇌전을 막고 있었다.

    처음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던 검들에 미세하게 뇌전 문양이 떠올랐다.

    “역시 예상대로야.”

    뜻 모를 미소를 지은 한립은 청죽봉운검이 뇌전을 견디게 하면서 보름이 넘는 시간을 뇌해 속에서 보냈다.

    뇌해 속에서 일흔두 자루의 청죽봉운검이 단련되고 있었다.

    콰릉!

    수백 가닥의 금빛 뇌전이 고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금색 뇌전 폭포에 모든 청죽봉운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올라 무지개 모양을 이루었다.

    파치칙.

    금색 뇌전 폭포가 비검들을 타고 흐르며 현란한 뇌전 가닥이 흩어졌다.

    뇌전 문양이 도드라진 청죽봉운검들은 태생적으로 뇌전법칙을 품고 있는 선천보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현천참령검을 떠올리며 비검 무지개 위에 선 한립은 전방을 응시했다.

    전방 허공에 불쑥 거대한 검은 물체가 나타나 있었다.

    뇌전들 때문에 흐릿해서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아도 한립은 그게 무엇인지 똑똑히 알았다.

    그의 손짓에 펄럭인 소맷자락에서 금색 뇌전 실들이 날아가 그쪽을 훑었다.

    드디어 검은 물체가 갈라지며 방대한 크기의 눈동자를 드러냈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뇌전의 눈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본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기운에 의식 손상을 입었었기에 어떤 거대 짐승의 눈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커다란 육체를 지닌 게 아니라 덩그러니 홀로 떠있는 눈알 그 자체가 전부인 것 같았다.

    그가 눈알을 쳐다볼 때 귤빛 눈동자도 천천히 돌아 그를 ‘보았다’.

    쿠쿵.

    한립의 의식세계에 천둥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틈이 갈라져 머리가 아파 왔다. 그러나 연신술을 7성까지 익힌 한립은 금방 의식의 힘으로 손상을 복구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오행환세결>을 발동한 그는 둥근 달처럼 금빛 진언보륜을 띄워 그 중앙의 금색 눈알이 눈을 뜨게 했다.

    “어디 너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해 주마.”

    진실안을 불러내자 진언보륜의 도문들이 반짝였다.

    한립은 진실안을 통해 귤빛 거대 눈을 보았다.

    복원된 거대 눈의 육신은 소와 같았는데 머리에 용의 뿔이 달리고 둥근 복부에는 고풍스러운 주술문자가 가득했다.

    거기에 굵은 다리가 하나밖에 없고, 등 뒤로 긴 꼬리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이건 뇌기(雷夔)가 아닌가!”

    뇌기의 문양을 응용해 도병들을 만들 때 활용하기도 했으니 낯선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까 뇌기의 문양이 그가 알고 있는 뇌전문양과는 퍽 달랐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한립은 진실안에 시간법칙을 더욱 강하게 불어넣었다.

    파아앗!

    금색 과즙처럼 광채가 진실안에서 뚝뚝 떨어져 복원된 뇌기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별안간 뇌폭해양의 시간이 그대로 멈추고 유일하게 뇌기 허상만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의 문이 열린 듯 고공에서 천만 가닥의 뇌전이 떨어져 뇌기의 육신을 강타했다.

    몸이 조금씩 타들어가는 와중에 뇌기는 억울하다는 듯 저항하며 미친 듯이 뇌전 실을 일으켰다.

    결국 몸의 절반은 천문(天門)에 뜯어 먹히고, 나머지 절반은 왼쪽 눈으로 흡수되면서 세상에는 덩그러니 귤빛 거대 눈만 남게 되었다.

    한립은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다 중얼거렸다.

    “이 눈……. 도조가 남긴 것이었어.”

    진실 안을 거두고 진언보륜을 체내로 되돌린 그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세상에 뇌전도조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거대 짐승인 뇌기가 뇌전 도조였다가 구천신뢰 속에서 천지의 뇌전법칙에 흡수되어 사라진 것 같았다.

    천도(天道)에 융합되어 천지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뇌전안은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고 말이다.

    연신술을 전력으로 발동해 자세히 관찰한 한립은 뇌전안에 방대한 뇌전의 힘은 남아 있되 뇌기의 의지나 혼백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긴 도조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다시 재기했겠지 여태껏 여기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조사를 마친 그는 금빛 장막을 넓게 퍼트려 뇌폭해양 전역을 감싸고 오행환세결을 발동해 시간영역 속에 산맥과 강, 달과 별, 사막과 숲을 만들어냈다.

    뇌폭해양에 마련된 천인경 영역에 뇌폭해양이 발작하듯 일어나 산맥과 강을 범람하려 했다.

    한립은 그런 반향을 무시하고 뇌기의 눈을 중심으로 청죽봉운검을 퍼트려 통천검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통천검진의 힘을 빌려 뇌기의 눈을 연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콰르르…….

    72자루의 청죽봉운검이 눈부신 금빛을 뿜어 서로 연결되면서 팔괘 문양의 허상이 뇌기의 눈을 품었다.

    진법은 마치 연단로가 된 듯 내부의 눈알을 자극했다.

    * * *

    그 시각, 황란대륙 변두리.

    수천수만의 회계 생물들이 메뚜기 떼처럼 바글바글 모여 멀리 바다 너머 뇌폭해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계 생물들 가장 전방에는 수백 명의 회계 수사들이 있었고, 검은 장포 위에 녹색 구리 갑옷을 입은 청년이 그 우두머리로 보였다.

    “묵식 대인, 무슨 일인지 조사를 해봐야 할까요?”

    청년 뒤에서 같은 검은 장포를 입은 마르고 작은 노인이 입을 뗐다.

    “아니다. 저게 무엇이든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다. 먼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건들지 말고 변수가 되지 않게 감시만 잘하면 될 것이야.”

    묵식이라 불린 키 큰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예.”

    “황란대륙에 아직 점령하지 못한 성들이 남아 있다. 속도를 높여라.”

    “존명!”

    * * *

    몇 달의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뇌폭해양은 그동안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어 끝없이 펼쳐져 있던 뇌전 구역이 백 리 정도로 축소되어 있었다.

    뇌운(雷雲) 아래 한립은 골치가 아픈 표정이었다.

    “분명 거의 된 것 같은데 왜 깨지지 않는 거지?”

    용 눈알 크기로 줄어든 귤빛 눈알이 금빛 뇌전에 둘러싸여 치직 거리고 있었고, 크기를 줄인 청죽봉운검들이 그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원래는 통천검진의 보조로 뇌기의 눈을 녹여 청죽봉운검를 사품 선기 급으로 만들려 했다.

    그런데 순조롭게 제련이 진행되었는데도 뇌기의 눈이 시종일관 갈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가 문제란 말이냐…….”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현천 호리병박을 꺼내 들었다.

    현천참령검의 잔존하는 법칙의 힘을 흡수해 호리병박 내부에 훼멸법칙이 남아 있었기에 뇌기의 눈을 깨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 방법밖에는 없겠구나. 청죽봉운검들을 함께 들여보내 뇌기의 눈을 제압하면 되겠지.”

    그는 더는 시간을 끌지 않고 뇌기의 눈과 청죽봉운검 그리고 아직 남아 있던 백 리 정도의 뇌운을 현천호리병의 녹색 광채로 휘감아 버렸다.

    강력한 녹색 회오리바람이 모든 것을 품고 현천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다.

    뇌기의 눈과 청죽봉운검이 현천호리병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본 한립은 호리병의 입구를 봉하고 마구 흔들었다.

    쿠콰콰쾅!

    호리병박 안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표면의 문양들을 타고 뇌전이 흘러내려 그의 살을 미약하게 태웠다.

    순간 콱, 하고 호리병에 미세한 금이 간 것을 본 한립은 두말할 것 없이 호리병을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양손으로 수결을 맺은 그가 날려 보낸 시간법칙의 힘이 가닥가닥 금색 실로 변해 호리병박을 감고 눈부신 빛을 발했고, 시간법칙의 힘에 구금된 호리병박은 더이상 갈라지지 않고 계속 강하게 빛을 내뿜었다.

    눈동자에 보랏빛을 일으킨 한립은 호리병박 내부를 살폈다.

    호리병박 내부에서 청죽봉운검들이 변한 금색 검들은 호리병박 벽면에 딱 붙어 진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뇌기의 눈은 그 중앙에서 암녹색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암녹색 빛이 검진을 보조하는 데도 뇌기의 눈에서 부단히 뇌전 실이 나와 대치하고 있었다.

    쿵-!

    몇 시진이 지나자 현천호리병은 결국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렸고, 그 안에서 암녹색 빛이 새어 나와 뇌폭해양이 있던 바다를 상하로 갈라버렸다.

    이때 갈라진 허공에서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공간 파동이 전해졌다.

    한립은 공간균열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마치 작은 뇌기 짐승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가는 것처럼 움직이는 금빛을 시선으로 쫓았다.

    주위에 떠있는 청죽봉운검들이 요란한 빛을 뿜고 있었다.

    순간 날카로운 검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한립은 봉합되는 공간균열 틈에서 검빛을 보았다.

    재빨리 손을 뻗은 그는 오른쪽 소매는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팔뚝은 멀쩡하게 무언가를 쥐고 돌아왔다.

    그가 손에 쥔 것은 청죽봉운검이 아니라 곱게 생긴 비취색 무언가였다.

    “이건…….”

    한립이 놀라고 있을 때 주위에서 금빛이 날아들어 비취색 소인(小人)들로 변했다.

    그중 몇몇은 그의 어깨에 앉기도 하고,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머리를 기어오르거나 콧등에 앉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와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비취색 수정 같은 피부에 정수리에만 머리털이 나고 황금색 눈동자에 손목과 발목에 뇌전 문양이 들어간 금테를 두른 작은 아이들은 정확히 72명이었다.

    “현천호리병이 뇌기의 눈과 청죽봉운검을 연화시켜 검령(劍靈) 동자들이 탄생했단 말인가?”

    비취색 소인들은 한립의 의아함을 느꼈는지 동시에 날아올라 72자루의 청죽봉운검으로 변했다.

    이전과 달린 금색 도문이 새겨져 있고 놀랍게도 3품 선기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립이 바라던 것보다 품계가 더 높았다.

    3품 선기와 4품 선기는 위력이 판이하게 달랐는데, 그게 한 자루도 아니고 무려 72자루였다.

    미간을 좁힌 한립의 의지에 72자루 청죽봉운검은 그가 조종할 필요도 없이 고공으로 솟구쳐 절세의 검진을 펼쳤다.

    쿠쿠쿠…….

    아득히 먼 곳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고공에 위풍당당한 만장 천문(天門)이 떠올랐고, 아직 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도 뇌전의 기운이 앞다투어 빠져나오려고 요동치고 있었다.

    검령 동자들이 탄생한 후 검진의 위력이 훨씬 막강해졌다. 한립은 슬쩍 의식을 움직여 금색 천문을 미세하게 열어보았다.

    쿠쿵.

    미세한 틈으로 금색 해양에서 수천수만 마리의 뇌전 교룡들이 천문을 빠져나오려 난리였다.

    새어 나온 위력에도 주변 허공에 공간균열이 쫙쫙 갈라지고 있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한립은 천문을 닫고 청죽봉운검들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청죽봉운검들은 다시 비취색 동자로 돌아와 그의 곁으로 떨어졌다.

    소매를 크게 펄럭여 그들을 사라지게 하고는 곧바로 화지동천을 열었다.

    은색 빛의 문이 열리고 죽루 창가에 서 있던 자령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됐어요?”

    “계획한 대로 되었다. 난…….”

    “알아요. 모두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자령은 한립이 할 말을 진작 알고 있었기에 가볍게 답했다.

    “일단 유명계로 가자꾸나. 그곳에 남아 있든 아니면 마계로 가든 상관없이 일을 마치는 대로 찾으러 가겠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말했다.

    “좋아요.”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