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0화. 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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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반선역(吠反仙域).
수십만 리 설원(雪原)에 붉은 연꽃이 피어난 것처럼 화염 덩어리들이 떠올라 눈으로 뒤덮인 평원에 거뭇거뭇한 자국을 만들어냈다.
적홍색 영역이 설원을 감싸 펑펑 쏟아지던 함박눈이 증발하고 있었다.
그 설원 중앙의 수만 장 크기의 구덩이에 청동 갑옷을 입은 요족 수사가 절반만 남아있는 머리로 금색 피를 철철 흘리며 누워 있었다.
생전의 수행이 상당했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머리통 반절이 날아가 원래도 포악해 보였을 얼굴이 더욱 흉측해 보였다.
폐반선역 최대의 요수(妖修) 종문인 만요굴(万妖窟) 노조이자 대라 후기의 존재였다.
제자 몇을 데리고 중토선역으로 보제연에 참석하러 가던 그는 중간에 매복을 당해 이 꼴이 되었다.
그는 시신이라도 남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재가 되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펑-!
웃통을 벗은 거대 사내가 구덩이 안 시체 옆으로 떨어졌다.
구불구불한 붉은 머리를 산발하고 광대가 도드라지는 사내는 불 구름 같은 붉은 반점들이 피부에 가득해 열기를 내뿜었다.
감정 없는 얼굴로 요수의 보제령을 거둔 그는 핏자국을 닦아내고 뒤쪽으로 던져주었다.
우산을 들고 서 있던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 그걸 받아 확인하고 넣어두었다.
백옥같은 피부의 여인은 보기 드문 미인일 것 같았지만 긴 머리를 드리워 가린 얼굴 절반에 생선 비늘 같은 흔적이 보였다.
“염탁 수사, 융견도 죽였고 물건도 챙겼으니 갑시다. 융견은 죽으나 마나 상관없는 자이나 동추진인은 전주께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명하신 인물입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알겠습니다.”
홍발 사내가 융견의 손에서 저물탁을 벗겨내곤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집요한 데가 있다니까요. 굳이 여기까지 와서는.”
여인이 그런 홍발 사내를 보고 탄식했다.
“저놈을 죽여 동추에게 경고를 한 겁니다. 아마 중토선역으로 곧장 가지는 않을 테니 산문에서 통쾌하게 죽일 수 있겠지요. 현어 수사, 문중 제자들은 상관없으니 조사당은 흔적도 없이 없애야 할 겁니다.”
염탁이 말했다.
“난 동추의 목만 취하면 되니 다른 것은 마음대로 하세요. 전주께서 우리 윤회팔자가 처음으로 전부 나서는 것이라 소란을 피울수록 좋다고 하기도 했고요.”
“좋습니다.”
염탁과 현어가 날아오르고 설원에는 다시 눈보라가 몰아쳐 모든 흔적을 덮었다.
그들은 지나는 곳마다 종문들을 습격했다.
이런 일이 진선계 곳곳에서 벌어져 성공한 곳도 있고, 실패한 곳도 있었지만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선역의 강자들은 수사들의 비명횡사에도 큰 소란이 생기지 않았다.
대부분 선역이 그보다는 보제연의 개최에 떠들썩해서 진선계 전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 * *
어느 선역의 험난한 땅.
독무가 낀 호리병 모양의 거대 협곡에는 유골들이 지천에 깔리고 귀화가 가득했다.
그중에는 야수나 요수의 유골도 있었지만 선계 수사들의 것도 있어 흉흉한 기운이 새어나왔다.
그런 골짜기 입구에서 탕탕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한 독무 속 기괴한 바위 위에 개나리색 치마를 입은 수려한 소녀가 요수의 다리뼈를 들고 바위를 내려치는 소리였다.
소녀는 한립을 떠나 홀로 여기까지 온 금동이었다.
“야! 널 찾아 얼마나 오랫동안 헤맨 줄 아느냐? 네가 나를 빼고 진선계에 유일하게 남은 대라급 서금선이다. 너만 집어삼키면 도조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복수하고 싶지 않아? 평생 이런 곳에 숨어 이런 쓰레기들을 먹으며 살거냔 말이다.”
금동의 외침에 골짜기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기어코 힘을 쓰게 만든다 이거지?”
금동이 눈을 번득이며 튀어 나가 들고 있던 다리뼈를 표창처럼 던졌다.
* * *
학강선역.
이름 모를 산맥의 동굴에서 수백 년 동안 수련한 자령은 태을 최고봉의 고비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밀실 문이 열리는 마찰음에 희색을 드러내며 서둘러 일어났다.
키 큰 사내가 그녀를 향해 온화하게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겨우 수백 년 만에 수행이…….”
자령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 출관하여 기운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했다만 금방 안정될 것이다.”
“아뇨, 그것 말고 수행이요.”
“그래, 대라 최고봉에 이르렀다. 조급하게 서두른 것은 아니니 염려 말거라.”
그녀의 얼굴에서 걱정을 읽어낸 한립이 자령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자령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대라 최고봉에 이르렀으니 한립이 유명계로 갈 거라고 여긴 것이다. 한립은 표정이 왜 안 좋은지 물으려다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그걸 본 자령이 서둘러 물었다.
고개를 저은 한립은 윤회전 검은 가면을 불러내 쓰고 검은 장포를 입고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윤회 전주 허상과 마주했다.
갑작스러운 윤회 전주의 연락에 한립은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 난 겁니까?”
“여상이……. 천정에 잡히고 말았다.”
“뭐라고요? 완이가 어쨌다고요?”
윤회 전주의 말에 가면을 쓴 한립의 표정이 급변했다.
자령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네가 유명계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상이 깨어났고, 두 삶의 기억을 전부 지니고도 내가 아닌 너를 택했다. 그대로 남궁완으로 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윤회 전주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한립은 눈빛이 뜨거워지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길이 일었다.
“어쩌다 천정에 잡혀간 겁니까! 천정에 대항해 그녀를 지킬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를 택하고도 그녀는 당장 떠나겠다고 하지 않았다. 네게 짐이 될까 걱정을 한 것이지. 나도 여상이 걱정되어 보내지 못했는데, 윤회전에서 네 행방을 찾지 못하자 그후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내가 폐관 수련을 하는 사이 네 안위를 걱정한 그녀는 홀로 유명계를 떠나 너를 찾으려다 천정에 끌려간 것이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 위치는 알아낸 것입니까?”
“아직. 천정도 그리 녹록한 곳은 아니니까. 허나 그녀가 잡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혹금에게서 소식이 왔다. 내가 직접 중토선역으로 오겠다고 약속하면 그녀를 건들지 않겠다는 이야기였지. 내가 중토선역에 들어서면 그녀를 풀어준다고 했다.”
윤회 전주의 말에 한립이 침묵했다.
천정은 윤회전주를 눈에 가시처럼 여겨 그를 세상에서 뽑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가 천정의 영역에 들어서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다.
“난 고혹금에게 그러겠다고 답했다. 더는 숨어 있지 않고 중토선역으로 갈 생각이고.”
“언제 출발할 겁니까?”
“아직은 준비가 더 필요하다. 무턱대고 갔다가는 여상을 구하지도 못하고 지금까지의 노력만 물거품이 될 테니.”
“같이 가겠습니다.”
한립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 소리에 윤회 전주가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는 것도 좋겠지. 네가 여상을 데리고 떠난다면 나도 조금은 안심이 될 테니.”
“내가 데리러 가는 것은 남궁완입니다.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일을 마치는 대로 유명계로 가지요.”
“기다리마.”
“천정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니, 전력을 다해 완이의 위치를 파악해 주세요.”
“알아내는 대로 네게도 알려주겠다.”
윤회 전주와 상의를 마친 한립은 가면을 벗었다. 자령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한립이 무어라 설명을 하려는데 자령이 먼저 말했다.
“가요. 완이 언니를 구해와요.”
“일단 돌아가자꾸나.”
“어디로 돌아간단 말이죠?”
“북한선역.”
* * *
한편 유명계의 대전 안.
한립과 연락을 마친 윤회 전주가 제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팔과 목 그리고 얼굴에 금빛 주술문자가 그려진 붕대를 두른 흑의인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무척 기괴한 분위기의 인물이었다.
“전주, 구천선역(邱天仙域) 황록존자의 행적을 파악했습니다. 머지않아 돈양대륙(敦陽大陸)에 도착할 거라 합니다.”
붕대를 두른 흑의인이 탁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중형 선역인 구천선역에는 중토선역으로 통하는 전송진이 없다. 돈양대륙에서 현천선역으로 가서 그곳에서 전송진을 이용해 중토선역으로 가려는 것이겠지. 봉회와 무장에게 연락을 취하거라. 돈양대륙에서 그자를 죽이고 수행하는 자들도 모조리 숨통을 끊어놓으라고.”
“존명.”
흑의인은 포권을 하고 떠나려 했다.
“원순풍, 나를 따른 지 몇 년이 되었지?”
윤회 전주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흑의인이 걸음을 멈추고 웃음 지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몇백 만년은 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미리 천정으로 가면 승산이 얼마나 될지 점쳐줄 수 있겠나?”
“정말로 그러기를 원하십니까? 제 상태로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겠으나 그 후로는 무용지물인 사람이 될 겁니다. 시간도조가 관여된 일이라 천기를 얼마나 알아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고요.”
윤회 전주도 원순풍도 심각한 일을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묻고 답했다.
“그렇다면 되었네. 그보다 각 대라경 수사들이 보제연으로 가는 경로를 예측하는 데 집중해 주게.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찾아내는 게 바닷속에서 바늘을 건져 올리는 것보다 어려울 테니.”
윤회 전주의 명에 원순풍은 별다른 말 없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너희 보천종이 윤회전과 천정 모두에 줄을 댄 것은 생각할수록 묘책이야.”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주와 시간도조는 진선계 최정상의 인물들입니다. 그런 거물들이 대도를 놓고 벌이는 쟁투에 천도가 간섭을 받고 천기가 혼란해지는데, 그 와중에 저희 보천종이라고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진단노조가 고혹금에게 판돈을 걸고 그의 제자인 네가 내게 판돈을 건 것을 보면 천정이 승리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허나 보천종 입장에서는 누가 이기든 또는 패하든 크게 상관이 없을 것이야. 어차피 종문의 전승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보천종은 그렇겠으나, 천정이 승리하면 저는 윤회전과 함께 몰락할 겁니다. 전주, 저를 패배자로 만들지 마십시오.”
원순풍이 붕대 사이 틈으로 눈을 번득였다.
* * *
2년 뒤.
북한선역, 고운대륙 변경의 성 옆에 둔광이 떨어져 내렸다.
푸른 장포를 입은 키 큰 사내와 보라색 치마를 입은 미인은 학강선역에서 돌아온 한립과 자령이었다.
한립은 망가진 정자 주변에 금빛을 펼쳐 모습을 가리고 성을 바라보았다.
결계 너머로 보이는 성은 그 옛날과는 달라져 있었다.
“흑풍해역에서 막 빠져나와 촉룡도로 가면서 이곳에서 머문 적이 있다. 많은 것이 달라졌구나.”
“회계가 침입해 북한선역 뿐 아니라 인근 선역들이 다 비슷한 상황입니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데 이곳만 같을 수는 없지요.”
“북한선역 대부분이 회계의 손에 넘어가 선계 수사들은 꼬리를 말고 몇몇 성안에 숨어 간신히 숨을 돌리고 있다. 아마 오래지 않아 그런 곳들까지 완전히 정복당하고 말겠지.”
“천정에서 원병을 보내주지도 않고 이 일이 퍼지지 않게 막기까지 하니까요. 회계도 눈치는 있는지 더는 점령지를 넓히지 않고요.”
“천정과 회계 사이에 암묵적인 결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회계는 과도하게 세력을 넓히지 않고 천정은 그런 회계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왜요?”
한립의 말에 자령이 물었다.
“회계는 처음 선역에 발을 디뎠으니 세력을 확장하기 전에 뿌리를 내릴 요량이겠고. 천정은……. 무엇보다 보제연의 성공적인 개최를 우선시하고, 둘째로 윤회전을 경계하는 것 아니겠더냐.”
“선역의 중생들만 그 탓에 고생하는군요.”
“가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이야기를 나누던 한립은 자령을 데리고 고운대륙을 떠나 황란대륙 방면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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