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9화. 변화무궁(變化無窮)
*
“……선과 진의에 대해 이렇게 깊게 파고드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을 드릴 테니 답을 주시지요.”
어떤 질문을 하든 망설임 없이 대답을 내놓는 한립을 보고 백의 한립이 말했다.
“해보게.”
한립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세상에는 이론에는 능하나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합니다. 선과 진의에 대해 익히신 만큼 구체적으로 어찌 실천해야 한다고 여기십니까?”
백의 한립은 뜨거운 눈빛으로 한립을 응시했다.
“모든 도리에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고, 모든 일에는 집착과 오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마음은 흔들림이 없고, 늘 마음이 가는 대로 불편함이 없이 행한다면 중생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네. 선을 수행하는 것도 이와 같겠지.”
이번에는 잠시 고민해보다 차근차근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하하, 마음에 드는 말입니다. 차별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마음이 가는 대로 선을 행한다…….”
백의 한립은 박장대소를 하며 하얀빛으로 변해 바깥으로 날아갔다. 마치 이대로 의식세계를 떠나려는 것 같았다.
그저 의식세계의 힘이 하얀빛을 떠나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걸 본 한립은 기뻐하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베어라!”
거대한 검 허상이 의식세계에 나타나 허공을 갈랐다.
추악!
선시가 변한 하얀빛과 의식세계를 연결하던 고리가 끊어졌다.
밀실 안에서 번쩍 눈을 뜬 한립은 몸 밖으로 빠져나온 하얀 빛덩이를 확인했다.
체내의 선령력과 시간정사 절반도 빛덩이를 따라 지선 괴뢰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비틀거린 한립은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을 삼켰다.
선시가 상당한 선령력과 법칙의 힘을 품고 떠나갔음에도 1,320개의 선규가 뚫리면서 대라 후기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우웅.
무형의 힘이 강림해 한립을 뒤덮고 구불구불 왜곡된 공간이 바깥 세계와 단절되며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
정수리 위 허공이 갈라지면서 무궁무진한 금빛 바다가 펼쳐졌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막대한 양의 법칙의 힘이 금빛 바다에서 쏟아져 내려 그의 몸을 적셨다.
한립은 그 안에서 천의(天意)를 느꼈다.
아주 오래된 기운 속에는 법칙의 힘이 녹아있어서 선인의 최고봉에 이른 그를 작은 개미처럼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골황, 윤회 전주 등 도조들이 발산하던 기운이 매우 강했어도 이 금빛 바다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했다.
“이 금빛 바다가 천도(天道) 중의 시간법칙인 걸까…….”
금빛을 머금고 기운이 왕성해진 한립은 줄어들었던 시간법칙의 힘이 삽시간에 회복되었다.
시간정사도 속속들이 응결되어 천팔백여 가닥으로 돌아왔고, 그 후로도 천지원기가 그의 체내로 콸콸 흘러들었다.
다른 방에 앉아 있던 자령이 놀란 눈으로 한립이 있는 밀실을 쳐다보았다.
* * *
천정, 천시봉(天時峰).
금빛의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한 곳에 만장 비석이 서서 광채를 반짝였다.
그 위에는 금색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크기는 달라도 각각 사람의 이름인 것 같았다.
금색 이름은 크기순으로 위에서 아래로 쫙 나열되어 있었다.
가장 위쪽 큼지막한 이름 중에 한립은 세 번째였다.
팟!
그때 비석의 한립이라는 이름이 금빛을 만발하며 커지더니 위의 두 이름을 밀어내고 첫 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파동이 일고 의자에 앉은 백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 옆에는 금색 장포를 입고 품위 있게 생긴 소년이 서 있었는데, 비석의 변화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립이 벌써 대라 후기에!”
“너를 넘어섰구나.”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비석을 보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무능한 저를 벌해주십시오, 지존!”
안색이 확 달라진 금포 소년이 그 앞에 엎드렸다.
“미라의 의발을 계승한 한립이 너보다 성취가 빠른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허나 나도 너를 배양하려 애를 썼는데 실망이구나.”
의자에 앉은 사내는 덤덤하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일어나지 않던 금포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한립……. 한립!”
흉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소년은 소리쳐 한립을 부르다 그곳을 떠났다.
* * *
이름 없는 산맥의 밀실 안.
금빛 바다에서 흘러나오는 시간법칙의 힘은 멈추지 않고 한립에게 녹아들었다.
한립은 전신의 1,800개 현규와 1,320개 선규를 반짝이면서 바닥이 없는 우물처럼 시간법칙과 천지원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선령력이 증가할수록 시간법칙정사의 굵기가 굵어지고 더욱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쿠쿠쿵!
한립이 발산하는 기세 때문에 금제를 펼쳐둔 밀실 벽이 무너질 판이었다.
이때 금빛 광채가 퍼져 벽을 스치고 갈라진 벽이 붙었다.
이런 일을 반복하며 하룻밤을 꼬박 새운 한립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을 품고 있었다.
바다와 같은 한립의 기운은 이전 골황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지만 윤회 전주에 비해서는 떨어졌다.
허공을 가르고 나타난 금색 바다가 떨리다 사라지고 밀실 안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둥실 떠올랐던 한립도 바닥에 몸이 닿아 강대한 위세는 사라지고 평범한 범인처럼 보였다.
밀실에 그려둔 진법들은 진작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선시가 깃든 지선 괴뢰는 진작 자유를 얻었음에도 조용히 밀실 구석에 서 있었다.
한립을 아래위로 살피는 선시의 눈에 놀람이 어려 있었다.
하루 전만 해도 그와 비슷했던 한립은 지금 천양지차로 달라져 있었다.
“대라 후기에 이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수사. 시간법칙을 대성하셨군요.”
선시는 공수를 해보였다.
“수사의 덕일세.”
눈을 뜬 한립이 잔잔히 미소 지었다.
“당신의 능력에 제가 스스로 물러서지 않았더라도 결국에는 떨어져 나왔을 겁니다.”
“지기화신을 공들여 만들어 보았는데 잘 맞는가?”
“잘 맞습니다. 이리 훌륭한 육체를 구해주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시는 자신의 몸을 보며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듯했다.
“한 수사, 제가 스스로 물러난 것이 큰 공은 아니라 하나 성가신 일을 줄여준 셈이니 청을 하나 드려도 될지요.”
“말해 보게.”
한립은 이미 그가 몸을 두고 다투지 않고 홀연히 떠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대라 후기에 이르렀으니 윤회전으로 가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사의 실력에 두려울 것은 없겠으나 저는 당신들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떠나겠다는 건가?”
“윤회전이나 천정에 몸을 의탁해 당신의 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지요. 이제 도처를 유람하며 저만의 귀속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진선계 각지의 중생들을 도와 선을 추구하며 살고자 합니다.”
“수사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게.”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보중하십시오.”
선시가 기뻐하며 공수하고는 번뜩 사라졌다. 한립은 선시가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선시를 곁에 두면 늘 경계해야 했다.
다시 눈을 감은 한립은 자신의 변화를 느끼고 얼굴이 밝아졌다.
대라 후기에 이르면 실력이 크게 늘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그런 간단한 수준을 넘어서는 변화였다.
마치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인 것처럼 모든 게 달라졌다.
그는 선령력과 법칙의 힘 그리고 육신의 힘을 쓰지 않고 손을 뻗었다.
푹!
수면에 손을 댄 것처럼 공간이 흔들리면서 깨져나간 공간 파편이 밀실 벽까지 이어졌다.
그의 의식이 움직여 공간 파편을 그 자리에 멈추고 무형의 힘으로 구금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한립은 신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현묘한 힘이 몸에 깃든 것처럼 세상만사가 그의 뜻대로 통제되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의식을 퍼트린 그는 학강선역 전체를 눈 아래 두었다. 이전보다 강대해진 의식이 열 배는 맑아진 듯했다.
그가 머물던 황량한 성안에서 이해는 오늘도 손님을 대접하고 있었다.
학강선역 뿐 아니라 인근 선역 혹은 하계의 일부 계면들도 손바닥을 내려다보듯 살필 수 있었다.
“이게 천도의 힘…….”
수련이 극에 이르면 천지대도와 소통해 천도의 힘으로 하늘을 무너트리고 땅을 멸할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고 들었다.
원래는 도조가 되어야 가능한 일을 그는 대라 후기에 하고 있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그가 손을 뻗었다.
머리 위 아주 높은 곳의 천외허공에 공간이 요동치고 거대하기 짝이 없는 금색 손바닥이 나타나 억만리 천외허공을 내리쳤다.
카카카카카캉.
거대 손바닥에 수많은 운석과 각종 폭풍들이 와해되어 무로 돌아갔다.
천외공간이 격동하며 억만리 규모의 무시무시한 새까만 구멍이 생겨 강대한 흡입력을 발생시키려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기 전에 금색 손바닥이 새까만 구멍을 오므려 버렸다.
밀실 안, 금색 거대 손을 거둔 한립은 희색이 만연했다.
이제 천도의 힘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런 실력이면 평범한 도조와 마주쳐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3대지존법칙을 수행한 덕인 듯했다.
‘완이, 기다려줘. 반드시 구해낼 테니!’
주먹을 쥔 한립은 속으로 다짐했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화지공간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대라 후기의 경지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영역을 퍼트리고 광음천선대진을 발동한 그는 시간차공간 안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 * *
중토선역, 남해(南海).
남첨대륙(南檐大陸)이라 불리는 육지의 극남쪽 해안을 따라 수십만 리에 뻗어있는 98개의 산봉우리는 활화산을 품고 있었다.
백 년마다 그중 한두 개의 봉우리에서 화산이 분출되어 남첨대륙의 수많은 산수들과 중소 선가 종문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은 화산 폭발을 구경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으면 화산이 뿜어져 나올 때 용암 속에서 화연석(火煉石)을 취할 수도 있기에 몰려드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천정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는데 이번에는 화산 폭발이 예정되어 있던 17째 산봉우리에서 용암이 새어 나오기 전에 남첨대륙 진천루(鎭天樓)에서 선사들이 나서서 폭발을 막았다.
그럼에도 대륙의 산수들과 중소 종문들은 원망을 하지 않았다.
진선계에서 가장 성대한 행사인 보제연을 개최하기 위한 준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98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화산산맥 내에 천정에서 극히 중요하게 여기는 응천문(應天門)이 있었다.
이곳의 응천문은 다른 선역에서 중토선역 남쪽으로 들어서는 문이라 해서 남천문(南天門)이라고 불렸고, 실제로는 문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전송진법이었다.
그 안의 대, 중, 소로 나뉘는 전송진 수만 개를 통해 36개의 거대 선역 중 다른 35개에서 수십만 명이 오갈 수 있었다.
응천문이 개방되면 거대 선역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공간통로가 뚫리는 셈이었다.
이런 응천문은 진천루와 마찬가지로 총 네 곳이 있었다.
중토선역은 진선계의 핵심으로 9개의 대륙과 4개의 대양을 지니고 있었는데 천궁대륙(天宮大陸)이 이 구주사해(九州四海)의 중심에 위치해 전통적으로 천정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 주변 동서남북에 자리한 동성대륙(東胜大陸), 서하대륙(西賀大陸), 남첨대륙, 북구대륙(北俱大陸)에 각각 진천루와 응천문이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각 응천문은 평소에도 엄격하게 관리를 해서 늘 도조 급의 강자들이 주둔했다.
보제연이 다가오자 진선계 각지에서 속속들이 다수의 수사들이 중토선역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보제령을 지녀 보제연에 참석하려는 이들 외에 수많은 선인들이 선역 제일의 행사를 구경하고 혹시 모를 기연을 얻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보제연은 천궁대륙에서 개최되었지만 다른 대륙에서도 각종 행사들이 열려 진선계 전역에서 몰려드는 보물과 진귀한 물건들을 두고 경매를 하거나 회합을 열었다.
그러니 이런 기회를 누가 놓치고 싶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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