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8화. 선과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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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같은 선행인데 이해가 얻는 선의의 힘은 왜 이리 강한 것인가. 그와 내 차이점이 뭐지?’
찻잔을 내려다보는 한립의 호흡이 가빠졌다.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종이 한 장 차이를 두고 붙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
그때 자령이 서책을 내려놓았다.
“왜 그러느냐?”
“여기 좀 보세요. 유학의 대가가 적은 글인데 이 구절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녀가 가리킨 구절에는 베푸는 것은 좋은 일이나 공명심을 위해 그리한다면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으니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걸 보자 한립은 얇은 종이를 뚫고 자신이 원하던 답을 손에 넣은 느낌이었다.
“알겠구나, 알겠어! 난 내 이익을 위해 선행을 했으니 위선(僞善)을 행한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선행을 거듭해도 본심에서 우러나 한 일이 아니니 진정한 선의에 가까워졌다 할 수 없는 것이야.”
한립이 길게 숨을 토해내며 말을 쏟아냈다.
대승기 수사이면서 황량한 선역의 작은 성에서 은거 중인 이해는 진작 수행이나 공명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늘 소년을 도운 것도 순전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이지 무슨 보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선의의 힘이 그를 향해 몰려든 것이었다.
그가 처음 서생 노인과 그 손녀를 구해주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런 이유였군요. 참시를 향한 집념 때문에 선행을 해왔기에 공덕을 많이 쌓을 수 없던 거예요.”
“원인을 찾았으니 앞으로는 쉽겠구나.”
자령이 별처럼 눈을 빛내고 한립은 그간의 걱정을 털고 밝게 웃어 보였다.
* * *
7년 후.
양읍성 후미진 지역에 젊은 부부가 나타나 잡화점을 의원집으로 바꾸고 약재를 팔면서 병든 사람들도 고쳐주기 시작했다.
부부는 나이가 어렸지만 의술이 고명해서 웬만한 병은 완쾌를 시켜주고 기이한 질환이나 불치병에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실력 있는 의원 부부는 진료비를 극히 낮게 받아 그 명성이 황량한 성 전체로 퍼져나갔고, 의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젊은 부부는 바로 한립과 자령이었다.
두 사람의 수행에 범인들의 병을 치료하고 고통을 줄여주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한립은 장장 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자신을 이 작은 성의 평범한 사람이라 여기고 사사로운 이익에 대한 집념이나 잡념을 떨쳐낼 수 있었다.
후에 스스로 벌어 모은 은자로 잡화점을 사서 의관을 꾸리고 진심으로 병자들을 치료해온 것이다.
욕심은 털어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완벽히 목적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립은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의관이 생긴 지 10년이 지나 젊은 의원 부부는 이제 중년이 되었다.
다시 시간이 지나 삼십 년 후, 젊었던 부부는 삶을 마무리하는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점차 마음이 맑아진 한립은 사심 없이 사람을 구하는 일이 많아져 선의의 힘도 강해졌다.
* * *
백여 년 뒤.
의관은 백 년의 역사를 지닌 노포가 되어 근방 천 리에서 그곳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지금 의관을 꾸리는 사람은 몇 대에 걸쳐 의관을 물려받은 ‘후손’이었고 말이다.
그 안에서 평온한 표정의 한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보광을 반짝이고 있었다.
자령이 그 옆에서 조용히 그를 살폈다.
속세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령의 분위기도 단아하고 우아해져 있었다.
한립을 따라 적잖은 선행을 하며 선의의 힘을 쌓은 덕에 수행은 진전이 없어도 의식 방면에서 크게 성장했다.
한참 만에 눈을 뜬 한립의 두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한 형.”
“선시를 완벽하게 감응할 수 있었다. 분신참시술을 사용하면 선시를 베어낼 확률이 8할은 되겠어.”
“잘 되었네요!”
한립과 자령은 기뻤지만 백 년간 머문 의관을 떠나려니 아무리 심경의 경지가 높아졌어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고개를 저은 한립은 자령을 데리고 조용히 의관을 빠져나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환자들이 몰려들지 않은 때였다.
“한 수사, 자령 수사. 이제 가려고 하십니까?”
전음으로 다관 장궤 이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수사, 그간 도움을 주어 고맙네.”
한립은 공수하며 진지하게 감사를 표했다.
진심으로 선을 행한 이해가 아니었다면 그는 위선의 문제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도움은요. 그간 제가 도운 것은 별것 없지만 수사께서는 얼마나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까.”
그들 앞에 나타난 이해가 정성을 다해 예를 취했다.
백 년 동안 한립은 틈이 날 때마다 이해의 다관에 와서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다.
강학선역까지 와서 은거를 하고 있는 이해였지만 꽉 막힌 수행의 길에 일말의 아쉬움도 없다면 그건 거짓이었다. 그는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해주는 몇 마디 말에 큰 도움을 받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특별한 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제 생각보다 더 대단한 분들일 거란 걸 이제는 압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두 분의 앞날이 순탄하기를 기원할 것입니다.”
“이 수사, 자네도 잘 지내게.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놀러와 자네의 다관에서 차 한 잔 하고 싶군.”
“언제든 환영할 것입니다!”
한립이 해주는 말에 이해가 무척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한립과 자령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길을 바라보던 이해는 천천히 다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차를 준비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강학선역의 이름 없는 산맥에 뇌전이 번득이고 한립과 자령이 나타났다.
“이곳으로 하지.”
한립은 금빛 검기를 일으켜 슥슥 산 절벽을 파내고 동부를 완성했다.
“강학선역은 천지영기가 희박해서 참시에 불리하지 않을까요?”
자령이 걱정을 표했다.
“괜찮다, 내가 주변 공간의 천지영기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행도 아니지 않더냐. 그리고 선에 대한 진의를 발견한 곳에서 시도해야 성공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야.”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한립의 설명에 자령도 공감하는 얼굴이었다.
“한 형.”
동부로 들어간 한립이 겹겹이 금제를 펼치고 밀실로 들어가려는데 자령이 그를 불렀다.
참시에 도전한다는 것은 커다란 역경이었다. 성공하면 몰라도 실패하면 몸과 마음이 크게 상할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있거라. 그간 곡절을 겪은 만큼 순조로울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한립은 자령의 손을 꼭 잡아준 다음 자신 있게 웃었다.
* * *
밀실 안.
한립은 숙연한 얼굴로 바닥에 지난번 악시를 참할 때 이용했던 진법을 그렸다.
복잡한 진법이었지만 그려본 경험이 있어 꼬박 하루를 종종거리며 다니다 보니 음양쌍어(陰陽雙魚) 형태의 진법이 나타났다.
수많은 주술문자가 진법에서 날아올라 빛을 반짝이니 밀실 안이 빛으로 가득했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지기화신을 불러내 음양진법의 음의 물고기 위에 두고 자신은 양의 물고기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진법을 펼치자 반구형의 보호막이 그와 지선 괴뢰를 감싸고 불꽃, 한기, 뇌전 등이 응결한 사슬이 지선의 몸 곳곳을 뚫어 속박했다.
준비를 마친 한립은 눈을 감고 의식공간으로 들어갔다.
악시 때와 달리 안정된 의식공간 안에는 하얀 의복을 걸친 또 한 명의 ‘한립’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왔습니까?”
백의 한립이 눈을 뜨고 온화하게 말했다.
전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이냐?”
한립은 놀라면서도 암암리에 힘을 비축했다.
“저를 그리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제가 악시도 아니고, 당신과 힘을 겨룰 마음은 없으니까요. 앉으시죠.”
미소를 머금은 백의 한립이 손을 저어 전방에 찻잔과 찻주전자가 올려진 상과 방석을 마련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그 물건들이 의식의 힘으로 응결된 것으로 실제 사물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의식을 이 정도까지 세밀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도 못 할 일이었다.
“무슨 뜻이지?”
한립은 그와 마주 앉았다.
“우리는 뿌리가 같습니다. 삼시는 천성적으로 본체와 육신을 두고 다투게 되어있지만 반드시 서로 싸울 필요는 없지요.”
자신과 한립의 찻잔에 차를 따른 백의 한립이 차를 홀짝였다.
“우리 같은 수사가 서로 싸우지 않고 어떻게 승부를 본단 말인가?”
“도리를 논하는 겁니다.”
“도리를 논한다고?”
“예, 저는 수사와 선악에 대해 논하고 싶습니다. 수사의 대답에 만족스러우면 이 몸을 포기하고 경쟁에서 빠질 마음도 있고요.”
“흠…….”
“물론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제가 몸을 장악하려 해도 원망하지 마셔야 할 겁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래 보던가.”
눈을 번득이 한립이 하하 웃으며 강대한 의식의 힘을 발산해 의식세계를 뒤흔들었다.
백의 한립이 들고 있던 찻잔이 쨍, 깨져 무형으로 돌아갔다.
“본체의 의식에 어느 정도 능력은 있습니다.”
미간을 좁혔던 백의 한립이 가볍게 웃으며 다시 새로운 잔을 응결했다.
“이야기를 나누자니 그리하지.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묻거라.”
기세를 거둔 한립이 차분히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나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소위 선과 악이라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이전이었다면 무슨 선악에 관한 논의를 하자는 것이 달갑지 않았겠으나, 양읍성에서 백 년간 머물며 틈틈이 관련 경전을 읽어 선악에 관한 깨달음과 이론을 함께 익혔다.
“속세에서는 선행하면 보답을 받고, 악행을 하면 그 대가를 치른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평생 선하게 살면서도 곤궁함을 벗어나지 못해 고생스럽게 살고,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자유롭게 유쾌하게 사는 이들이 많으니 이는 어째서입니까?”
백의 한립은 연이어 다음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은 풀잎은 보되 산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겉으로 봐서 쉽게 판단할 수 없지. 타인과 세상에 이익이 된다면 사람을 때리고 포악하게 군다고 해도 선이라 할 수 있으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를 아끼고 잘해준다고 해도 선이라 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누군가 진정으로 덕을 쌓았다면 일평생이 빈곤하거나 힘들 수 있겠으나 대대손손 그 덕을 볼 것이요, 누군가 악행을 일삼아 한순간의 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그 끝은 좋지 못할 것이다.”
한립의 대답에 백의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선행은 무엇이고, 악행은 무엇입니까?”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선이고, 자신에게는 무익하나 타인에게 유익한 일이 대선(大善)이다.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불리한 일을 하는 것이 악이요, 자신에게는 유익하나 타인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는 것이 대악(大惡)이다.”
“허나 범인들은 남을 위한 행동을 전부 선행이라 칭하지 않습니까?”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선은 위선이고 보답을 바라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러 하는 선행이야말로 진짜 선이다.”
“어느 노옹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는데 길을 지나던 젊은 상인이 우연히 그걸 보고 노옹을 구해주었습니다. 노옹이 한사코 은전을 건네며 보답을 해야겠다고 우겨 상인이 그걸 받았다면 그건 위선입니까, 아니면 진짜 선입니까?”
눈빛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스친 백의 한립은 질문을 이어나갔다.
“선이다.”
한립의 대답은 간결했다.
“조금 전 보답을 바라면 진짜 선이 아니라 했는데, 젊은 상인은 은전을 받아 챙겼습니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아닙니까?”
“상인이 보답을 바라고 노옹을 구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그 일이 퍼져 세상 사람들이 선행에 좋은 결과가 따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중생에게 이로우니 이는 선이라 부를 만하다.”
“속세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봐야 남들이 업신여길 뿐이라고요. 이에 대해 어떤 견해를 지니고 계십니까?”
“그런 일이 없다 할 수는 없으나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일을 하였는데도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해서 그걸 진리라 믿고 세상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자신을 바꾼다면 생을 망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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