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7화. 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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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일이 지나 드디어 새로운 선역에 이를 수 있었다.
선령력이 매우 희박해서 북한선역보다도 훨씬 못했고 영계와 비슷할 정도였다.
“무척이나 척박 하구나…….”
의식을 퍼트린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선역 각지에서 텅 빈 광물 광맥의 흔적과 파괴된 지하 영맥들이 감지되었다. 이러니 영기가 희박한 게 당연했다.
이 선역은 인구수도 적어서 수사든 범인이든 대부분 특정 구역에만 밀집해 있었다.
영맥 손상이 그리 심하지 않아 그나마 수련할 천지영기가 남아 있는 곳들이었다.
“이곳의 이름이 무엇이냐?”
“학강선역(鶴崗仙域)이래요. 오래전에는 천지원기가 충만하고 선역 전체에 수많은 광맥이 흘렀는데 천정이 사람을 보내 과도한 채굴을 한 다음에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해요.”
자령은 옥간을 꺼내 의식을 불어 넣어보고는 답했다.
“천정이…….”
“이곳에서 선행을 할 건가요? 인구가 많지 않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살펴는 보자꾸나. 진선계에 이렇게 황폐한 곳도 드무니.”
눈을 반짝인 한립의 말에 자령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뇌전진법을 이용해 학강선역 서북쪽 분지로 이동했다.
수천 리에 달하는 분지 내부는 거대한 성으로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성은 규모가 꽤 있었는데, 활기찬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고 녹슨 쇠 냄새가 풍기는 한산한 거리에는 거의 행인이 없었다.
또한 상점에 들르는 사람들은 손에 꼽혔고, 수사나 범인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이 자신의 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성안은 마치 임종을 앞둔 노인의 삶 같았다.
그런 성 허공에 뇌전빛을 번득이며 한립과 자령이 도착했다. 그러나 잿빛 안개가 끼어 있어서 아무도 그들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아래로 내려가 둘러보자꾸나.”
한립과 자령은 소리 없이 어느 골목에 내려서서 해가 질 무렵 어둑한 거리를 거닐었다.
길 양쪽으로 난 건물 중 몇몇 개는 등불을 켜기도 했는데 그런 집이 많지는 않았다.
“여기는 왜 온 거예요?”
한참을 걷기만 하는 한립을 보고 자령이 물었다.
느긋하게 산책을 하는 모습이 사람을 구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진선계는 영기가 짙어 다른 선역들은 크든 작든 번화하고 융성하지 않더냐. 이런 황량하고 쇠퇴한 지역은 얼마 되지 않으니 그 특별한 분위기를 느껴보려 한다.”
“분위기가 좋지도 않은걸요.”
한립의 대답에 자령은 주변을 살피며 코끝을 찡그렸다.
사실 한립이 이곳에 온 것은 윤회 전주가 내준 연신술과 연관이 있었다. 정확히는 연신술 7성 공법과.
연신술 7성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앞서 6성까지와 달리 자원과 노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에 관한 연구가 필요했다.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 부유한 사람, 빈곤한 사람, 정신이 나간 사람 등등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각자의 삶과 감정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런 혼백의 상태를 포착해 경험과 견문을 쌓을수록 연신술 7성 수련은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다.
그간 자령을 데리고 유람을 다닌 것도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속세의 삶을 경험하고 복잡한 정서와 삶을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쇠락해가는 선역의 활력 없는 분위기는 오랜만이었으니 그 안에서 살아가는 범인들의 기분을 느껴보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사실을 굳이 자령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자령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쫓는 동안 한립은 밤을 지새우며 길을 걸었다.
“이제 되었나요?”
“나 때문에 밤새 기다리게 했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이제 선행을 베풀러 갈 건가요?”
고개를 저은 자령이 물었다.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의식을 퍼트린 한립은 재빨리 뇌진을 형성해 그녀를 데리고 사라졌다.
다음 순간, 성안의 어느 집 위에 나타난 그들은 8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노인을 둘러싸고 무언가를 빼앗으려 드는 걸 볼 수 있었다.
“멈춰라!”
서늘하게 소리친 한립이 손가락을 뻗어 뇌전빛으로 지면을 쓸었다.
펑!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그 여파가 건장한 사람들을 밀어냈다. 한립은 선시를 베어내기 위해 살생을 금하고 있었다.
간신히 선한 의지를 찾아냈는데 살생을 해서 심경을 흐트러트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한립과 자령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을 보고 핏기가 사라져 놀란 쥐새끼들처럼 달아났다.
노인은 제자리에서 얼떨떨하게 서 있다 서둘러 감사 인사를 했다.
한립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분명 노인을 도와주었는데 무형의 선의(善意)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노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고 뇌둔술을 펼쳐 그곳을 떠났다.
보름 정도 그 황량한 성에서 머물며 한립은 백여 건의 도움을 주었지만 선의의 힘은 시종일관 느껴지지 않았다.
성안의 비교적 깔끔한 다관에 한립과 자령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립은 맑은 향기가 퍼지는 차를 앞에 두고도 마시지 않았고, 자령도 차를 시켜두기만 하고 두꺼운 서책을 들추는 중이었다.
서책은 윤회전을 통해 구한 것으로 선악의 의지와 관념에 대해 기술된 것으로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정오 무렵이라 다관에는 손님이 그들뿐이라 매우 한산했다.
“손님,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시면 다른 것을 내어다 드릴까요?”
여위어 파리해 보이는 중년 사내가 웃으며 말을 붙였다. 그는 대승기 수사였는데 다관을 운영하며 은거하고 있었다.
진선까지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으니, 일대에서 이만하면 수행이 높다 할 수 있었지만 한립 앞에서 정체를 숨길 수는 없었다.
“아니네, 차는 괜찮으나 생각할 일이 있어 마시지 않은 것뿐이네. 우리가 괜히 장궤의 차를 낭비하는군.”
고개를 저은 한립은 담담히 미소 짓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나 자령은 장궤를 상대하지 않고 여전히 두꺼운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하하, 고민이 있으시다면 제가 차를 잘못 내어 드렸습니다. 차향이 가볍고 김이 진하게 올라오는 게 손님들의 기분과 어울리지도 않고요. 차라리 청심차(淸心茶)를 맛보시지요.”
장궤는 제 혼자 말하고 안쪽으로 걸어가 새로운 차를 내와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초록빛 차는 거의 맑은 물을 떠다 놓은 것처럼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보고 눈을 반짝인 한립은 흥미가 일어 입을 축였다. 청량한 맛이 혀를 감싸고돌다 시원하게 목으로 넘어갔다.
확실히 고민이 있고 가슴이 답답할 때 기분을 풀어줄 만한 차였다.
“솜씨가 좋군.”
“과찬이십니다. 두 분은 복색과 분위기로 보아 수사시겠지요? 이 지역 수사도 아니신 것 같고요?”
장궤는 사교성이 밝은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안목도 좋고. 난 한립이고 이쪽은 자령이라 하네.”
“아, 네! 한립 수사와 자령 수사셨군요. 저는 이해라 합니다.”
장궤가 포권을 해보였다.
자령이 서책에서 눈을 떼고 장궤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장궤,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같이 앉아 이야기나 나누지.”
한립의 제안에 이해는 거절하지 않고 옆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타지 사람인 것은 어찌 알아보았는가?”
“두 분의 기운은……. 뭐랄까,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생동감이 넘칩니다. 이 양읍성(襄邑城)이 있는 여남대륙(汝南大陸) 수사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분명 훨씬 멀리서 온 분들일 테지요. 이곳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겁니다.”
이해는 웃음을 지었다.
“수사의 혜안에 감탄을 금할 수 없군. 이 일대는 다 이런 분위기인가?”
“말하자면 이야기가 깁니다. 대륙의 영맥이란 영맥은 수만 년 전에 모조리 파헤쳐져서 이미 근간이 파괴되었어요. 떠날 사람들은 진작 떠났고, 남은 이들은 그럴 능력이 되지 않거나 고향 땅에 미련이 많은 사람뿐입니다. 그러니 상황이 나아질 기미도 없고요.”
“여기 이 대륙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여러 대륙을 다녀보신 분이군요.”
“이 장궤도 이곳 사람은 아닌 듯한데? 아니, 아예 이 선역 출신이 아니지 않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찻잔을 내려놓고 가볍게 웃음 지었다.
“오오, 그걸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장궤는 놀란 눈치였다.
“내 다도(茶道)에 능하지는 못해도 강학선역 인근 녹수선역(綠水仙域)이 절세의 영차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소리는 들었네. 그곳에서 다도로 유명한 종문 중 하나에서 녹수참합결(綠水參合訣)이란 특수 공법이 전해진다더군…….
이 장궤가 익힌 물 속성 공법이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고, 게다가 이 다관의 배치며 구조도 녹수선역 본토의 것과 흡사하군. 그래서 그런 추측을 한 것인데 맞는 것인가?”
“수사야말로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예, 저는 멀리 녹수선역에서 온 사람입니다.”
이해 장궤는 감탄을 하며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가 한립과 자령의 수행을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은 특수한 비술을 사용했다 칠 수 있었지만, 각 선역의 특성을 꿰고 있고 자신의 공법적 특성까지 알아차릴 정도면 최소한 진선 혹은 금선경 이상의 진짜 선인이라는 소리였다.
다만 상대가 수행과 정체를 밝히지 않으니 모른 척하는 것이 맞았다.
“솜씨가 괜찮은데, 어째서 자원이 풍족한 녹수선역 말고 강학까지 와서 지내는 것이지?”
“저를 너무 잘 봐주셨습니다. 이 정도 솜씨가 무엇이라고요. 수행도 늘 기미가 보이지 않고 녹수선역에서 저는 하류에 불과했습니다. 저도 노력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휴, 과거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군요. 이전처럼 공명에 목매지 않고 그저 앞으로는 평안하게 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스스로 만족하며 살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해는 쓴웃음을 지었고, 한립은 그의 심경 파동을 감지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야기는 되었고, 두 분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제가 수행은 높지 않아도 이곳에서 머문 지 꽤 되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도와주겠다고 말해줘 고맙네만, 타인은 도울 수 없는 일이라.”
“그렇다면 그저 한 수사의 일이 잘 풀리기를 기원해 드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어쨌든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네.”
한립은 이해의 말에서 진심을 느끼고 공수를 해보였다.
“아저씨, 계세요?”
이때 바깥에서 순박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옷을 입은 범인 소년은 다관 바깥에 서서는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한 수사, 자령 수사 편한 시간 보내십시오. 저는 잠시 가봐야 할 듯합니다.”
이해가 바깥을 힐끗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아가 아니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이해는 소년을 다관 옆으로 데려가 물었다.
“어머니 몸의 한독(寒毒)이 또 발작했습니다. 적양차(赤陽茶)를 다시 사갈 수 있을까 해서요.”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용건을 밝혔다.
“알겠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 얼른 가져다주마.”
고개를 끄덕인 이해는 안으로 들어갔고, 소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입을 달싹이다 결국에는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이해는 자신의 말대로 금방 붉은 옥함을 들고 나왔다.
“일전에 일러준 대로 3번에 나눠 마시게 해드리면 한독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야.”
“감사합니다, 아저씨. 그런데 그간 어머니 병 치료를 하느라 집안의 은자를 모두 써버려서……. 남은 게 이것밖에는…….”
옥함을 받은 소년은 작은 주머니에서 콩알보다 작은 은자 부스러기 몇 개를 털어냈다.
“내 네 사정을 모르겠더냐. 일단 어머니부터 살리거라.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고.”
이해는 인자하게 웃으며 소년의 은자를 받지 않았다.
“아저씨…….”
눈시울이 붉어진 소년은 입술을 꾹 다물어 보았지만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참을 수는 없었다.
“사내아이가 쉽게 눈물을 보이는 것 아니다.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서둘러 가보거라.”
이해가 그런 소년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 홀로 다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등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낸 소년은 바닥에 쿵, 무릎을 꿇고 다관을 향해 두 번 절을 한 다음에야 집으로 뛰어갔다.
다관 안에서 그걸 지켜보던 한립의 표정이 묘했다.
그가 앉은 자리와 소년과 이해가 있던 곳 사이에는 벽이 있었지만 그의 시야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립은 선의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소년이 이해를 향해 절을 할 때 한 줄기 무형의 힘이 이해의 몸을 감싸는 것을 감지했다.
그가 이전에 행한 선행의 보상보다 훨씬 강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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