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96화 (1,953/2,000)

2196화. 선행

*

“상관없는 것들은 꺼지거라!”

청년이 외치자 주루의 다른 손님들은 쫓을 필요도 없이 잽싸게 아래층으로 달아나 남은 것은 한립과 자령 둘뿐이었다.

“당신들도 괜히 곤욕을 치르고 싶지 않으면 가는 게 좋을 텐데?”

무뢰배 하나가 그들을 향해 엄포를 놓았다.

자령은 평범한 얼굴로 변신하고 있어 그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노인의 이야기에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하던 한립은 그 소리에 눈빛이 차가워졌다.

“흥을 깨다니.”

그가 조용히 말하며 탁자에 놓인 젓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무뢰배들의 손목에 느닷없이 젓가락이 지나갈 만한 구멍이 뚫려 피를 터트렸다.

끄아악!

무뢰배들은 뒤늦게 반응하며 손목을 잡고 비명을 질렀다.

사치스러운 청년도 마찬가지라 청의 소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그걸 보던 소녀가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노인을 향해 뛰어가 일으켰다.

“가자.”

한립은 일어서며 은전을 탁자에 올려두고 계단을 내려왔고, 자령이 미소를 지으며 따라갔다.

노인과 소녀도 청년 일당의 보복이 두려워 급히 계단으로 내려왔고, 청년 일당은 고통과 충격에 그들을 막지 못했다.

“은공(恩公)!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서생 조손(祖孫)이 주루를 빠져나가는 한립과 자령을 따라잡았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 소취가 그런 자들의 손에 붙들렸으면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노인이 한립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곁의 청의 소녀는 아예 바닥에 꿇어 한립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들을 일으켜 세우려던 한립이 눈썹을 꿈틀했다.

“한 형?”

자령이 이상하게 여겨 그를 불렀다.

“별일도 아닌 일에 그럴 것 없다.”

한립은 표정을 수습하고 소매를 펄럭여 무형의 힘으로 노인과 소녀를 일으켰다.

그들은 한립을 보는 눈빛에 경외감이 어렸다.

“배경이 있는 자들 같던데 속히 떠나거라. 내 너희를 한 번은 구해줬다만 다음에는 이런 행운이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저들은 금룡방 사람들입니다. 철주(鐵洲) 전역에 세력이 퍼져 있는데 저들이 복수하려고 하면 저희가 어디로 달아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의 말투가 옥산성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외지인이겠지? 고향은 어디더냐.”

“저와 할아버지는 경주(庚州) 사람입니다. 고향에서 기근에 시달리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고요.”

한립의 물음에 청의 소녀가 답했다.

“경주? 경주면 큰 강 두 개가 나란히 흐르는 지역이 아니냐?”

“예, 맞습니다.”

“고향이 구체적으로 경주 어디인지, 집 근처의 환경은 어떠했는지 상세히 말해 보거라.”

한립의 말에 청의 소녀와 노인은 이상하다는 듯 시선을 마주쳤지만 그대로 고향에 대해 찬찬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어. 입구에 큰 버들 나무가 자라는 초옥이 너희의 집이었어.”

이야기를 들은 한립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문 앞에 큰 버들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에 소녀와 노인은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가자, 내 너희를 집으로 데려다주마.”

한립은 소매를 저어 금빛으로 두 사람을 감쌌다.

금빛에 휩싸여 마치 허공에 떨어진 것 같았던 두 사람은 다음 순간 두 발이 단단한 바닥에 닿아 있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곧 옥산성이 아니라 호수 인근의 작은 마을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한립과 자령은 어느새 보이지 않고 두 사람 앞에는 울창하게 버들잎을 드리운 나무가 선 초옥이 보였다.

“여긴 우리 고향 집이 아니더냐.”

입을 쩍 벌린 노인이 눈을 비볐다.

청의 소녀도 믿기지 않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향의 재난은 지나간 듯하니 이 은자로 고향 땅에서 편히 살거라.”

멀리서 한립의 목소리가 들리고 은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노인의 손에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신선 나리! 저와 손녀는 앞으로 평생 신선 나리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원을 드릴 겁니다!”

격동한 노인이 허공을 향해 절을 올렸다. 소녀도 급히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한립과 자령은 하늘 위에 떠 있었다.

“한 형, 이렇게 의협심이 강한 분이신 줄 몰랐어요. 저들을 구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향 집까지 데려다주다니요.”

자령이 웃음 지었다.

그런데 한립은 진지하게 눈을 감았다가 희색을 드러냈다.

“왜 갑자기…….”

“자령, 선시를 베어낼 기연을 찾은 것 같구나!”

시원한 얼굴로 눈을 뜬 한립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네? 정말이요?”

자령도 기뻐하며 되물었다.

한립은 말없이 아래의 노인과 손녀를 가리켰다.

“저들을 도와주었더니 선시 감응에 도움이 된 건가요?”

자령이 눈을 반짝였다.

처음 저들을 구해줬을 때 뭔가 느낌이 왔는데, 저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자 다시 비슷한 느낌을 받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저 처음보다 두 번째는 느낌이 약했다.

“하긴, 남을 돕는 선행이 한 형이 말했던 선(仙)에 대한 깨달음을 깊게 만드는 게 당연하죠.”

총명한 자령은 금방 이치를 깨우쳤다.

“이제 방법을 찾은 것 같구나.”

미소를 머금은 한립은 방대한 의식을 맹렬히 퍼트렸다.

연신술 육성을 익힌 그의 의식은 탐색 강도를 약하게 하면 비익선역 정도는 거의 절반을 살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 * *

비로주(飛虜州)의 어느 산길.

도적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기습한 탓에 마차를 호송하던 표사들은 죽고, 수령으로 보이는 우람한 노인과 마지막 표사 두 명만 남아 도적들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악!

큭!

참혹한 비명이 연달아 들리고 피 웅덩이 속으로 두 사람이 쓰러졌다.

우람한 노인은 비통했지만 악귀 머리가 새겨진 대검을 힘차게 휘둘러 둘러싼 도적들을 밀어냈다.

“항종, 너희 비호표국(飛虎鏢局) 표사들은 다 죽었다. 무릎이라도 꿇고 살려달라고 하면 내 자비를 베풀 수도 있으니 그리하거라.”

노인을 포위한 도적 중에서 쌍도를 쥔 거구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류삼도, 죽일 테면 입 닥치고 죽여라! 나 항종, 맹세컨대 너희 같은 도적놈들에게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람한 노인은 왼팔에 부상을 당해 상반신이 피로 물들면서도 기세를 꺾지 않았다.

“비호표국 총표두답다! 허나 주제를 알고 일을 맡아야지. 되지도 않는 일을 맡아서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만 죽어라!”

거구 도적이 싸늘하게 웃으며 쌍도를 휘두르자 거리를 확보한 도적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활을 당겨 열댓 개의 화살을 쏘아 보냈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우람한 노인은 병장기를 치켜들고 직접 공격해오는 도적들을 막기 급급해 멀리서 날아드는 화살은 막을 수가 없었다.

콰르르!

이때 호선형의 금빛 뇌전이 하늘에서 떨어져 화살들을 쓸어냈다.

강철로 만든 화살들이 금색 뇌전에 닿아 푸른 연기가 되어 사라진 후 남은 뇌전은 백여 갈래로 갈라져 정확히 도적들 향해 날아갔다.

천둥소리가 들리고 날벼락을 맞은 도적들을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게 되었지만 단 한 명도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뇌전에 당하지 않은 우람한 노인은 직접보고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금빛 뇌전이 가시고 도적들이 힘겹게 바닥을 짚고 일어나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가거라. 다시 도적질하는 게 눈에 띄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위엄 있는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진작 가슴이 쪼그라들어있던 도적들은 깜짝 놀라 서둘러 달아났다. 우람한 노인은 달아나는 도적들을 노려보았지만 쫓지는 않았다.

그의 나이에 중상까지 입어 복수하려 해도 능력이 되지 않았다.

공중에서 사내와 여인이 나타났는데, 한립과 자령이었다.

“선인…….”

우람한 노인은 허공에 서 있는 그들을 발견하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곧은 성품을 지닌 너 같은 자가 이렇게 죽는다면 안타까운 일이겠지.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니 도와주마.”

한립은 손가락을 튕겨 푸른 빛을 노인의 체내에 흡수시켜 주었다.

따뜻한 기류가 경맥을 타고 흐른 노인은 피로감이 싹 사라지고 전신의 자잘한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선인 대인, 제 목숨을 구해주신 걸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람한 노인은 얼른 한립과 자령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취했다.

그가 감사를 표함과 동시에 미약한 무형의 힘이 한립의 몸에 강림했고, 한립은 노인이 몸을 일으키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 * *

비익선역의 거대 호수 위에 대형 선박이 떠있었다.

호수답지 않게 심하게 물결이 치는 가운데 검은 촉수들이 호수 깊은 곳에서 튀어나와 선박이 박살이 나기 직전이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곧 크게 출렁인 호수 속에서 괴상한 검은 문어 같은 괴물이 나타나 악취가 풍기는 입을 벌렸다.

선박의 사람들이 그걸 보고 울음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쿠릉!

그 순간 허공에서 금색 벼락이 떨어져 문어의 머리 아랫부분을 지져버렸다.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 문어 괴물은 촉수를 풀고 꼬르륵, 호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몸을 숨겼다.

죽다 살아난 선박 승객들이 기쁨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때 공중에 자령과 함께 나타난 한립이 금색 뇌전이 채 가시지 않은 손을 거두었다.

“선인께서 우리를 구해주셨다! 선인 나리, 감사의 절을 받아주십시오…….”

누군가 그들을 발견하고 소리치며 절을 올리자 다른 이들도 서둘러 뛰어와 그들을 향해 예를 취했다.

입가에 미소가 어린 한립이 번득 사라졌다.

* * *

그렇게 한립이 비익선역 도처를 돌며 선행을 하고 사람들을 구해준 지도 이삼십 년이 지났다.

그가 구해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비익선역 전역에 소문이 퍼져 어떤 지역의 범인들은 그를 위한 사당을 만들고 받들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한립의 용모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자 사람들은 곳곳에 그의 조각상을 세우기도 했다.

비익선역의 수도 문파에서 선인이 빈번하게 나타나 사람들을 구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조사에 나서자 한립은 그들과 얽히지 않기 위해 자령을 데리고 인근의 다른 선역으로 이동했다.

비익선역 바깥 만황계역 상공에 선박 하나가 떠서 지나가고 있었고, 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은 무언가를 감응하는 중이었다.

“선시 감응은 진전이 있어요?”

그가 눈을 뜬 것을 본 자령이 옆으로 와서 관심을 보였다.

“그래, 이제는 간신히 선시의 존재는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덤덤한 말투가 그리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가 있는 건가요?”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구나. 도처에서 선행을 하는데 가면 갈수록 쌓이는 무형의 힘이 적어지고 있다. 근 1년간은 거의 아무 반응이 없을 정도이고.”

“왜 그런 걸까요?”

“알 수 없지. 허나 미약하게나마 선시를 감응했으니 참시까지 남은 길이 머지않았다. 어서 방법을 찾아야 해.”

한립의 말을 들은 자령은 침묵했다.

“내가 구해준 사람들의 수가 적어 공덕이 부족해 선시 감응이 정체된 것이 아닐까 고민하는 중이다.”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요. 한 형, 사람들을 구해주면서 보상이 가장 강했을 때가 언제였어요?”

“언제 보상이 강했냐고? ……아무래도 처음 서생 노인과 그 손녀를 구해주었을 때였지. 그 후로는 그런 강도로 느낌이 온 적은 없었다.”

“제 기억에 그 후로 더 많은 사람을 구해줬을 때도 특별히 보상이 강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인원수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일리가 있구나. 그래, 처음과 그 후의 선행이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고개를 끄덕인 한립도 생각에 잠겼다. 자령도 같이 고민했지만 총명한 그녀도 금방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집착할 것 없다. 그간의 수확이 적지 않으니 앞으로도 기연이 닿을 거라 기대해 봐야겠지.”

한립은 이렇게 말하고 수결을 맺어 선박의 속도를 높였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