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195화 (1,952/2,000)

2195화. 천하 유람

*

시간은 잘도 흘러, 별안간 이십만 년이 지나갔다.

자령은 새까만 고치처럼 검은 실들을 두르고 그 안에서 태을경 최고봉의 기운을 드러냈다.

수행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한번 갔던 길이고 화지공간의 천지영기가 충만해서 이십여 년 만에 원래의 수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거기다 이번에는 자신의 힘으로 수행을 되찾았기에 기운이 주 안정적이었다.

눈을 뜬 자령은 기운을 갈무리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대라경에 도전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금색 영역이 흔들리다 시간차공간이 걷혔다.

누각 대문이 열리고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한립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본 자령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성과가 있었구나. 시간차공간을 펼친 게 헛된 일은 아니었어.”

한립은 자령의 기운을 감지하고 얼굴을 풀었다.

“수련이 잘되지 않은 건가요?”

고개를 저은 자령이 부드럽게 물었다.

“선시(善尸)를 참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더구나.”

“해 선배님께 참시에 대해 듣기는 했는데, 아직 제 수행이 낮아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시지는 않았어요. 제혼에게 들으니 악시를 베어냈다던데 참시가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

“참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과정으로 나뉜다. 일단 체내의 삼시의 존재를 감응하고 다음으로 삼시의 집념을 파악해 베어내야 하지. 악시를 큰 힘 들이지 않고 베어낼 수 있었던 것은 구원관에서 귀령자가 참시선부를 써서 악시를 불러내 주었고, 내 지금껏 살생을 적지 않게 해와 ‘악’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선시는 완전 다르더구나.”

“어떻게요?”

“수도의 길에 들어선 후로 부단히 살육하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고, 애써 선(善)을 행하려 하거나 이해하려 한 적도 없다. 그 탓에 이십만 년 동안 선시의 존재를 감응조차 못했는데 어떻게 베어낼 수 있겠느냐.”

한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다 그런 것 아닌가요?”

자령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도자들은 기본적으로 무정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대라 후기에 이를 수 있는 이가 소수인 것이다. 수련도 어렵지만 최후에 선시를 참하는 것이 더없이 어려운 게지.”

“그럼 이제 어쩌죠?”

한립의 설명을 듣고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령이 얼굴을 굳혔다.

“법칙 수련은 벌써 대라 중기 최고봉에 이르러 계속 폐관수련을 해봐야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난관을 돌파할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해 선배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고계 선인의 고비는 수행이나 법칙이 아닌 마음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어요. 세상 모든 일의 근원에 마음이 있다고요. 저도 진선계에 온 뒤로 마역에서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고 수련만 하느라 급급했는데, 이참에 한 형을 따라 세상 구경을 하면 좋겠네요.”

자령이 희색을 드러내며 밝게 웃음 지었다.

“진선계는 광활하고 독특한 곳이 많으니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긴 나도 그간 수련에만 힘쓰느라 제대로 진선계를 유람하지 못했어. 이걸 고난이 아니라 기회라 생각하면 좋겠구나.”

한립도 자령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답답하던 마음이 편해졌다.

* * *

진선계 변두리의 작은 선역인, 북주선역(北晝仙域).

천지원기가 그리 짙지는 않았지만 하늘에 늘 화려한 광채가 퍼져 있어 풍경이 좋기로 유명했다.

물론 유명하다는 것은 태을경 이상의 선인들에게만 그랬다.

금선경 이하는 평생 자신의 선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보다 수행이 낮으면 다른 선역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대륙 안에서 종종거리고 돌아다니다 생을 다감하기도 했으니까.

북주선역 가장 북쪽의 만년빙하로 이루어진 대륙에 눈이 가득 쌓인 산맥들이 구름까지 솟아 있었다.

날이 좋으면 눈과 빙하가 녹아 수천 개의 폭포를 이루고 떨어지는데 하늘의 광채와 어우러져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 산맥 어느 봉우리에서 사내와 여인이 나란히 서서 풍경을 감상했다.

용모에 변화를 준 한립과 자령이었다.

* * *

옥호선역(玉湖仙域)의 천소호(天巢湖)는 상품 영옥(靈玉)의 산지라 호수에 항상 짙게 끼어 있는 안개 속에서 하얗고, 푸르고, 붉은빛들이 시시각각 반짝였다.

안개 속에서 그윽하게 반짝이는 영옥들 덕에 천소호는 그 아름다운 경치로도 이름을 날렸다.

호수 위를 조각배 하나가 유유히 떠가며 돌고 있는데 한립과 자령이 그 안에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 * *

천화선역(天火仙域), 화조산맥(火鳥山脈)은 산맥의 모양이 꼭 날아가는 새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지하로는 용암이 흘러서 가끔 산봉우리의 활화산이 터지면 불새가 불을 뿜는 것과 같은 장관이 펼쳐지고는 했다.

그 위를 한립과 자령이 나란히 날아가며 화산이 분출하는 기이한 풍경을 함께 감상했다.

* * *

류란선역(流瀾仙域)의 신비로운 습지인 녹니소택(綠泥沼澤), 창해선역(滄海仙域)의 홍일해양(紅日海洋), 현풍선역(玄風仙域)의 풍폭산맥(風暴山脈) 등 한립과 자령은 진선계의 명승지란 명승지를 다 찾아다녔다.

한립의 수행에 둔술도 빨라서 선역을 오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기에 이백여 년 만에 30여군데의 선역을 오가며 수많은 풍경과 정취를 눈과 마음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진선계가 너무 커서 그들이 본 건 빙산의 일각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천정과 윤회전을 경계해 중소선역을 위주로 다니며 수시로 용모를 바꾸었다.

비익선역(飛翼仙域) 서부의 어느 산맥에는 핏빛 대나무들이 가득 자라고 있어서 고공에서 내려다보면 그 풍경이 무척 특별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핏빛 댓잎들이 사사사, 소리를 내며 출렁이는 게 꼭 핏빛 물결 같다고도 했다.

그 혈죽산맥(血竹山脈) 인근의 작은 성인 옥산성(玉山城) 주루 3층에 한립과 자령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들의 잔에도 붉은 술이 담겨 있었고 청아한 댓잎 향기가 풍겼다.

“혈죽해과(血竹海果)는 듣던 대로 술로 담으니 일품이네요. 향으로는 이보다 좋은 술이 있을까 싶어요.”

자령은 술맛을 보고 감탄했고, 그 앞에서 술잔을 시원하게 비운 한립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창 너머 주루 옆길은 행인들이 가득해 성의 번화함이 느껴졌다.

한립은 속세의 성인 옥산성을 오가는 관인, 서생, 상인, 무사, 농부, 거지 등을 보면서 그들의 충만한 정서를 느껴 보았다.

기쁨, 슬픔, 분노, 집념, 탐욕, 원한 등 수많은 삶과 감정이 그를 지나치는 듯했다.

돌연 가볍게 한숨을 쉰 한립은 술잔을 채워 쭉 들이켰다.

“왜 그래요?”

자령이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감정에 관해서는 저들이나 수도자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죠. 수명이 유구하고 불사라 해도 은혜, 원수, 애정 이런 것들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요.”

한립의 대답에 자령도 술잔을 기울이며 탄식했다.

“한 형, 선시는 아직도 느껴지지 않는 건가요?”

자령이 물었지만 한립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고개만 저었다.

“한 형과 함께 다닌 지 벌써 200년째에요. 오랜 숙원을 풀어 만족하고 있고요. 그러지 말고 내일부터라도 다시 폐관수련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간 다양한 곳을 다니며 깨달은 바가 있을지 모르잖아요.”

“참시는 다른 수련과는 다르다. 묵묵히 끈기 있게 시간을 보낸다고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랬으면 벌써 더 많은 수사들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겠지. 예감에 대라 후기의 고비를 넘을 수 있는 방법이 이 속세에 있을 것 같구나. 감을 믿고 인연을 기다려볼 참이다.”

한립은 술 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술잔과 자령의 술잔을 채웠다.

그때 주루 안에서 늙은 서생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능운 노신선이 비검을 제련해 하얀빛을 만발하자! 해와 달의 빛도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더라 이겁니다! 괴룡(怪龍)도 혼비백산해 달아나는데 검빛이 번쩍하니까 한쪽 발이 날아가고, 새빨간 피가 사방으로 튀어 호수의 물을 붉게 물들였다 합니다.”

검선(劍仙)이 백성들을 위해 괴룡을 해치워 준다는 전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비익선역은 선인과 범인의 구별이 뚜렷해서 수도자는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백성들에게 이런 신비한 신선들의 이야기는 늘 인기가 있었다.

노인의 입담에 적잖은 손님들이 모여들어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들은 손님들이 ‘오!’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노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노인은 일부러 헛기침을 하고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시간을 끌었고, 동시에 곁의 열대여섯 살 먹은 청의(靑衣) 소녀가 나서서 활짝 웃으며 쟁반을 들고 청중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더 듣고 싶으면 돈을 내라는 뜻이었지만, 노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제법이었고, 청수한 소녀의 외모도 나쁘지 않아 꽤 많은 이들이 흔쾌히 돈주머니를 풀어 동전을 올려다 놓았다.

노인은 그럴 때마다 돈을 낸 손님을 향해 포권을 해서 감사를 표하는 중이었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미소 지었다.

산촌에서 생활할 때는 주루에서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지만 촌을 나섰다 돌아온 촌민이 들려주는 바깥 이야기에도 매우 신이 났었다.

돈을 받을 때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청의 소녀의 뽀얀 목덜미와 고운 자태에 몇몇 무례한 이들이 농지거리를 하기도 했지만, 소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도 돈을 걷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순박한 모습이 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끄는 듯했다.

몇몇 이들의 불순한 시선을 느낀 소녀는 급히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물러나려 했는데 결국 사치스러운 복장을 한 옹졸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청의 소녀는 놀라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치스러운 복장의 청년은 술 냄새가 나는 트림을 꺽, 해대는 게 이미 만취한 듯 보였다.

청년은 소녀의 턱을 향해 손을 뻗으며 헤벌쭉 웃음 지었다.

“곱게도 생겼어! 이 오라버니를 따라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꾸나!”

청의 소녀는 당황해 도와 달라 외쳤다.

이야기를 풀던 노인이 놀라 급히 달려왔지만 청년의 손에 밀쳐져 나가떨어졌다.

청년은 무공을 익혔는지 힘이 약하지 않아 노인은 그대로 난간에 부딪히며 피를 토하고 푹 고꾸라져 버렸다.

“할아버지!”

울부짖은 소녀가 어떻게든 손목을 뿌리치고 가려 했으나 청년을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다른 손님들은 소란이 벌어진 것을 보고 겁을 먹어 자리를 뜨기 바빴다.

한립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자리에 앉아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일은 속세에서 거의 매 순간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기에 큰일이 아니라 여겼으나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손님들, 여기는 장사를 하는 곳입니다. 제발 이러지들 마십시오.”

점소이가 다가와서 말리려 했다.

“술값을 냈으니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네가 뭔데 우리에게 이러지 말라는 것이냐! 썩 꺼지지 못할까.”

무뢰배 중 하나가 점소이의 멱살을 쥐더니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소란이 일어 다른 손님들이 다 나가버리시면 저희 주루의 매상은 어찌 됩니까? 보아하니 못 보던 분들인데 외지에서 오셨습니까? 저희 주루의 주인은 금 대인이십니다. 저희 주인님께 잘못 보이시면 어떻게 될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점소이는 두려워 않고 차분히 할 말을 했다.

그 말에 무뢰배들의 시선이 사치스러운 복장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금 대인? 금부귀를 말하는 것 아니냐? 겨우 금룡방에서 관사나 하는 것을 내 앞에서 대인이라 칭해?”

여전히 청의 소녀를 붙들고 있던 청년이 차갑게 웃었다.

“호, 혹시 금룡방 분들입니까?”

이제 점소이도 당황한 것 같았다.

“눈이 멀었더냐! 저분이 바로 금룡방 방주의 하나뿐인 아드님이시다!”

점소이의 멱살은 잡고 있던 자가 그대로 점소이를 내동댕이쳤다.

눈을 크게 뜬 점소이는 찍소리도 못하고 엎드려 벌벌 떨었다. 사치스러운 복장의 청년은 소녀를 보며 목울대가 꿀렁였다.

인근에서 이렇게 고운 계집은 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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